***

 …잠시, 옛날 일을 떠올려보자.

 예전에도 이렇게 혼자서 병치레를 해야 했던 적이 꼭 한 번 있었다. 옴닉 사태로 양친을 잃은 후 학교의 기숙사에 혼자 남아있을 때였다. 그녀의 부모님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옴닉 군대 중 하나가 날린 폭탄이 그녀의 부모님을 산산조각 냈기 때문이었다. 텅 빈 무덤 앞에서 그녀는 장례를 치렀다. 눈물이 나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녀를 기다리는 학교로. 

 그때도 심하게 감기에 걸렸었는데, 공교롭게도 하필 그날이 샴발리 수도원의 테카르타 몬다타가 대학에 강연을 오는 날이라 기숙사가 텅 비어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오직 그녀뿐이었다. 

 하지만 앙겔라 치글러는 겨우 그런 걸 가지고 칭얼거리지 않았다. 그러기엔 그녀는 몸에 비해 마음이 너무 많이 성장해있었다. 룸메이트가 그녀에게 무관심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었다. 설마 오늘 아침에 감기가 갑자기 심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런 그녀를 위해 새벽같이 대학 보건실에 가서 약을 타온 것만 해도 ‘친구 하나 잘 뒀다’라는 말을 충분히 할 수 있을 법했다. 별 것 아닌 일이었다. 

 저녁이 되자 룸메이트가 다른 친구들을 이끌고 문병을 겸해 찾아왔고, 그때쯤엔 그녀의 상태도 많이 호전되어 있었다. 감기에 좋다는 온갖 음식(따끈한 리조또부터 시작해서 흰 쌀죽까지)으로 잔뜩 배를 채우고 친구들의 유쾌한 웃음소리로 마음을 채웠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앙겔라 박사는 훌훌 털고 일어나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상에 녹아들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별 것 아닌 일이었다.

 하지만 그 기억은 그녀 가슴 속에서 조그마한 응어리로 남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


 앙겔라 치글러 박사는 불현듯 눈을 떴다. 눈을 떠도 어두컴컴해서, 그녀는 눈이 이상해진건가 하고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는 지금이 한밤중이란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보아하니 하루 종일 잔 모양이었다. 많이 자서 그런지 몸은 가눌 만 했다. 밀린 일이 걱정되는 걸 보니 머리도 어느 정도 돌아가고 있는 듯 했고 말이다. 내일은 본부에 갈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또 일상으로 녹아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

 앙겔라 박사는 이불 속에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녀의 어깨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몸이 추워서가 아니었다. 마음이, 추워서였다. 마음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추웠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시간이 참을 수 없이 싫었다. 이 추위가, 이 고독이 너무 싫었다. 빨리 내일이 되었으면,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갔으면, 그게 지금 앙겔라 박사가 곱씹고 있는 유일한 생각이었다. 몸은 더 이상 끈적이지 않았다. 그녀는 이마에서 떨어진 물수건을 침대 밖으로 던지고 다시…….

 ‘…물수건?’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내가 물수건을 짠 적이 있던가? 당연히 그런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몸도 끈적이지 않고 이불에서 땀냄새도 나지 않았다. 아니 이불이 다른 걸로 바뀌어 있었다. 분명 다른 누군가가 한 일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기쁨인지 걱정인지 모를 미묘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대체 누굴까? 올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때였다.

 “으음…….”

 낮은 톤의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희미하지만 분명 거실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뭔가에 홀린 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거실과 방 하나밖에 없는 이 좁은 아파트가 너무 넓게 느껴졌다. 얇은 잠옷 차림으로, 그녀는 뭔가 모를 야릇한 기분을 느끼며 방문을 열었다. 

 거실엔 달빛이 가득했다. 신음성의 주인공은 소파에 누워있었다. 하지만 소파가 창문을 등지고 있었고, 그 역시 앙겔라 박사를 등진 채 누워있었기에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소파 그림자에 가려 그의 형체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익숙한 모습이었다. 앙겔라는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는 여전히 곤히 자고 있었다. 지친 것처럼 낮게 코를 골면서 말이다. 

 하지만 굳이 그가 누군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겠는가. 이렇게 와 줄 사람은, 단 한 명 가브리엘 레예스 뿐인데. 앙겔라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고마워요.”

 미성의 목소리가 거실 안을 옅게 감돌았다. 그것은 그에게 말한다기보다는 혼잣말에 더 가까웠다.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는 그를 깨우고 싶지 않은 마음과 깨우고 싶은 마음, 두 가지가 동시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뭔가, 마음속에서 울컥하고 치달아 올랐다.

 “가브리엘, 잠시 얘기 좀 들어줄래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는 여전히 깊은 잠이 빠져있는 것처럼 숨소리만 고르게 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거 알아요? 난 감기에 걸릴 때마다 우리 부모님이 생각나요.”

 처음이었다. 누군가 앞에서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우리 부모님은 옴닉 사태 때 돌아가셨어요. 도시가 불바다가 됐다고 들었죠. 하지만 제가 급히 학교에서 돌아왔을 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어요. 집은 잿더미가 되어있었고, 부모님의 시신은 찾을 수도 없었죠. 결국 전 텅 빈 무덤 앞에서 장례를 치러야 했어요.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눈물도 나지 않았어요. 아니 슬프지도 않았어요. 눈 한 번 깜빡하니 장례가 끝났고, 다시 한 번 깜빡하니 난 짐을 들고 학교 정문에 서있었어요. 교장선생님이 직접 나와 절 맞아주셨죠. 교장선생님은 인자한 모습의 할머니셨어요. 포근했죠. 그분은 저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셨어요. 하지만 전 울지 않았어요.”

 속삭이듯, 그녀는 마음 깊은 속에 놓아두었던 비밀의 상자를 천천히 열고 있었다. 열고 싶지 않다는 배덕감과 열고 싶다는 열망이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얼마 있지 않아 전 감기에 걸렸어요. 겨울이었으니까,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하필 그날 샴발리 수도원에서 강연을 하러 온 거예요. 기숙사는 텅 비어버렸죠. 그렇다고 제가 친구들에게 버림받았다던가 그런 건 아니었어요. 친구들이 절 얼마나 걱정해줬는데요. 실제로 혼자 있던 시간은 반나절 정도였어요. 중간에 깨서 눈을 떴어요. 입 안은 버석거렸고 눈은 말라붙은 것처럼 아팠죠. 그때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어요.”

 [엄마, 치즈 듬뿍 넣은 그라탕이 먹고 싶어.]

 “처음엔 제가 말하고 나서도 뭐가 잘못됐는지 몰랐어요. 어머니는 늘 가족이 감기에 걸리면 치즈를 듬뿍 넣어 그라탕을 해주셨거든요. 말이 그라탕이지 거의 치즈로 만든 죽이었지만요. 하지만 제 말은 허공을 맴돌다 사라질 뿐이었죠. 어머니께 전화를 하려고 했어요.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걸.”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

 “슬프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겨우, 겨우 그라탕인데, 겨우 그라탕이란 말밖에 안한 건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내렸어요.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요. 난 혼자였어요. 마음이, 마음에 구멍이 뻥 뚫려서 바람이 통하는 것 같았어요. 온기가 필요했어요. 아무나, 누구라도 좋으니까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어요. 하지만 아무도 없었어요, 아무도……. 그 교장선생님마저도, 그 순간만큼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어요. 그때 눈물샘이 다 마를 정도로 울었어요. 친구들이 다시 기숙사로 왔을 땐 모든 감정이 가라앉은 뒤였죠. 부은 눈도 감기 탓으로 어찌어찌 돌릴 수 있었어요. 친구들은 절 간호해줬죠.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뭔가 바스러지는 느낌이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팔뚝에 손을 올렸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있었다. 거친 살결이 느껴졌다. 지금은 그 거친 살결도 양모 옷감처럼 부드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고마워요, 가브리엘. 정말로요. 나, 당신이 와줘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앙겔라는 그렇게 속삭였다. 그가 자는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자는 건지는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그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는 담요를 가져와 그에게 덮어주고선, 조금 망설이다 그의 볼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를 담아. 그리고 방으로 들어와 이번에야말로 깊이 잠들었다. 곧 있을 아침에 가브리엘에게 뭘 해줄까, 그런 기대감을 품고 말이다. 그녀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아아, 이게 소중한 추억으로 남으려면 좋으련만.



 하지만 운명이란 참으로 기묘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