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 중장 - 스스로 중장에서 중령 강등 자처.

라울 샤를 마그랭 베르느레(Raul Charles Magrin-Vernerey,가명 Ralph Monclar 1892~1964)
제1차 세계대전 장교임관을 시작으로 제2차세계대전때는 자유프랑스군 장성으로서 활약, 각종 훈포장만 60여회 수여받은 베테랑, 자유프랑스군 시절 활동으로 인해 비시프랑스 정부에 사형선고까지 받은 이력이 있을정도.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에게 일찌감치 항복해버린 프랑스의 자존심을 세운 인물이다.

한국전쟁 당시 프랑스의 파병의지가 매우 미약하였으나 꿋꿋하게 프랑스의 한국 파병을 주장한 인물중 한명.

프랑스의 한국 파병 결정권을 쥐고 있던 당시 프랑스 국방차관 막스 르젠에게 한국전쟁 파병 프랑스 대대의 지휘관을 자처하기까지 한다.

"대대급 병력은 령관이 지휘관인데 중장이 어떻게 대대장을 맡을수 있겠는가?" 라는 차관의 물음에

"나는 육군 중령이라도 좋다,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왔고 곧 태어날 자식에게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다." 라고 답하였고 결국 르젠 차관이 이를 받아들여 UN 프랑스군 사령관 및 대대 행정대대장으로 임명하여 한국으로 파병되게 된다.

(물론 한국파병 초기에는 중령이었으나 계급만 중령에 실상은 당시 미군 사령관 리지웨이 중장에 맞먹는 군경력을 가진 인물인지라 미군 장교들이 무진장 애를 먹었고 몇달후에는 다시 중장 계급장을 달고 다녔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 파병을 주장했던 프랑스군은 한국전쟁 중요 전투 중 하나인 지평리 전투에서 엄청난 수훈을 세우게 되면서 초반 파병관련 마찰에 대한 비난도 잠재우게 된다.
이후 프랑스군 2진과 교체 되어 귀국, 말년에 보훈병원장을 역임하시다 1964년 심장마비로 타계하시게 된다.

2. 장철부 중령- 탈영 2회

장철부 중령(본명 : 김병원 1921~1950)
일본 주오대학 법학과 유학시절 제2차세계대전으로 인해 일본군으로 강제징집되어 중국전선으로 끌려가게 되는데 이때 탈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게 된다. 
죽음의 위기가 닥쳤으나 일본군 상부에서는 엘리트 대학생의 단순일탈로 보고 다시 한번 기회를 주자 하여 목숨을 건지게 되는데 재차 탈영을 시도하여 성공, 광복군으로 합류하게 된다.
광복군 합류 후 임정 요인들의 추천으로 황푸군관학교 기병과 과정을 수료하고 1947년 귀국, 1948년 육사 5기 수료, 1949년 육본 기갑연대 산하 제2기병대대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후 한강이남방어전, 금강방어작전에서 기병대대를 이끌고 혁혁한 전공을 세우게 된다.
전차는 고사하고 하운드 장갑차 수십대가 주요병력이었던 기갑연대에서 기병을 이끌고 한국전쟁 초기 전공을 세운 인물.

그러나 기병의 한계로 점점 병력이 쇠약해졌으며 한국전쟁 초기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던 그해 8월 경북 청송에서 북괴군에 맞서 싸우다 전황이 불리해지고 본인마저 중상을 입자 "포로가 되어 수치스럽게 죽느니 깨끗하게 죽겠다." 라는 말을 남기고 권총으로 자결, 전사하게 된다. 전사 당시 한국 나이 30세였으며 사후 광복군 경력이 인정되어 전쟁영웅 및 독립운동가로도 인정을 받게 된다.

3. 최용덕 장군 - 소위에서 장군으로 초고속 진급.

최용덕 장군(1898~1969 8.15)
22세때 독립운동가 서왈보 장군의 권유로 항공학교에 입교하여 파일럿이 되었고 국민혁명군에 합류,
이후 당시 중국공군 창립멤버 및 상교 , 의열단원,  광복군 지청천 장군 참모장을 역임한다.
광복 이후 귀국하여 공군의 모태가 되는 항공건설협회를 창회하여 대한민국 공군 창설을 목표로 삼았으나 
미군 측에서 엄청난 태클을 걸게 되는데 바로 엄청난 경력자인 장군의 경력을 인정하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한것.

-비행경력 수백시간
-중국 공군 소속으로 일본군과 수십차례 전투
-중국 공군 상교(공군이 육군보다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으므로 표면상 계급은 상교(우리나라로 치면 대령)였지만 사실상 육군 소장,중장급 예우를 받았으며 최용덕 장군은 장개석의 전용기 부조종사를 추천해줄정도였음)
-광복군 참장 (현재로 치면 장성급)

육군 김홍일 장군이 막바로 준장으로 임관된것에 비하면 이정도 경력을 가진 장군님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미국 측의 요구는 매우 불합리한것이었고 당연히 항공건설협회 멤버들은 반발할수 밖에 없었는데
최용덕 장군은 이 한마디로 모든 반발을 잠재워버린다.

"이순신 장군도 백의종군하셨는데 조국 공군창설을 위해서 이 정도도 못하겠는가."

결국 최용덕장군은 50세의 나이로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 입교하여 모든 과정을 수료, 1948년 소위로 임관한다.
다행히 임관 이후 초고속 진급을 하여 한국 전쟁 무렵에는 준장으로 진급하게 된다.

한국 전쟁당시에는 김포지구경비사령부를 편성, 김포기지를 방어하였고 이공로로 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항공창을 설립, 우리 기술로 띄운 비행기를 모토로 1953년 우리나라 최초의 군용기
부활호를 제작하는데 기여한다.

공군 퇴역이후에는 체신부 장관등을 역임하였다. 

여담으로는 공군 장군, 장관을 지낸 분이 갈현동에서 셋방살이를 했고 부인께서 장사로 생계를 이을 정도였는데
청탁은 고사하고 본인의 월급을 어려운 공군 후배나 기타 어려운 사람들에게 모조리 써버리면서 벌어진 일.

보다못한 공군 후배들이 나서서 성금을 모으고 해서 장군에게 서울공군회관 근처에 양옥집을 지어줬고
그곳에 기거하셨다고 한다. (이 집은 장군이 돌아가시고 한참뒤인 2004년에 공군이 유족에게 퇴거할것을 요구해 이슈가 되기도 했는데 후일담은 알 수가 없다.)

어떻게보면 엄청난 굴욕도 대한민국 공군을 위해서 감내하셨던 장군은 1969년 8월15일 72세로 자택에서 영면하시게 된다.

현재 우리나라 공군이 세계 10위권 안팎에 위치할 수 있게 기반을 닦아주신 공군의 아버지 그 자체라 할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