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 https://treeofsavior.com/news/?n=777

1. 클라페다


클라페다는 발트 해 연안에 있는 리투아니아의 도시입니다. 리투아니아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이고, 클라페다 주의 주도(州都)이기도 하죠.

도시는 복합적이고 축적된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부분적으로 이곳이 아크메나-다네 강 어귀에 위치해있고,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부동항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지역은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체결 이전까지 독일의 주(州)로서 계속 통치를 받아왔습니다.

1923년 클라페다 봉기 이후로, 클라페다는 리투아니아에 편입되었고, 1939년 나치 독일이 리투아니아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리투아니아가 제3제국에 속하게 된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기간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리투아니아에 속해 있습니다.

**트오세에서의 클라페다

클라페다는 왕국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주요 통치 지역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클라페다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확인되지 않은 조각상이 가장 잘 알려진 랜드마크이고, 도시는 몇몇 클래스 마스터들의 거주지이기도 합니다.

클라페다 인근에는 카틴 숲과 샤울레이 숲과 함께 도시의 주요 산업을 담당하는 샤울레이 수정 광산이 있습니다. 신수의 날 이후 클라페다 시장이 실종되자, 도시의 주교가 대신 우스카와 함께 클라페다를 임시로 통치하고 있습니다. 

클라페다는 광업으로 인해 발전한 전형적인 광업 도시입니다. 과거에는 샤울레이 수정 광산에서 채굴된 수정들 때문에 도시가 크게 번창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클라페다는 어려운 시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제외하고 출회(出廻)가 원활하지 않고, 도시는 다른 지역에서 도망쳐 온 피난민들로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2. 오르샤


오르샤는 벨라루스의 북동쪽에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비텝스크 남동쪽에 있고, 드네프르 강에 위치해 있습니다. 인구는 약 124,000명에 달합니다. 지역 특색으로는 항구와 마섬유공업 단지가 서로 교차하는 철길 나들목이 있습니다. 통조림 식품, 재봉틀, 건축재가 주요 산업물입니다. 이곳은 드나프르 강기슭 북안 동쪽에 있는 강둑에 위치해 있으며, 11세기에 건설되었습니다. 아마(亞麻) 가공이나 공작기계, 콘크리트, 쇠고기 가미 통조림 등이 도시에서 생산되는 주요 생산품입니다.

드네프르 강의 수운(水運), 모스크바-바르샤바 철도, 상트페테르부르크-오데사 철도 사이에 있어 고대부터 상품 수송으로 번창했습니다. 주요 명승지로는 나치 독일 저항 기념박물관이 있습니다. 

1320년에 오르샤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1398년부터 1407년까지 오르샤 성이 건설되었습니다. 1514년 9월 8일 리투아니아 대공국와 폴란드 왕국의 연합군이 모스크바 대공국과 오르샤 전투를 벌였습니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나 리투아니아 대공국 또한 승리가 완전히 유효하지는 못했습니다.

***드네프르 강 흐름



**트오세에서의 오르샤

오르샤는 왕국 이전부터 있던 도시입니다. 물론 그 때는 지역주민들이 모여 살던 큰 마을이었죠. 오르샤와 주변 지방들은 자카리엘 대왕이 벌인 전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오르샤는 왕국 성립 기간 동안에 마지막으로 자카리엘 대왕에게 합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오르샤 주민들은 자카리엘 대왕에게 대항하기 시작했고, 최후의 결전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전설에 따르면 여신들이 개입하여 달리기 경주나 스포츠와 같은 보다 안전한 싸움으로 전쟁을 대신했다고 합니다. 결국 자카리엘 휘하의 용사들이 오르샤 대표들을 이기게 되고, 오르샤는 남부 지방의 마지막 도시로서 왕국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희생없는 전쟁이 끝나고 왕국이 발전하자, 오르샤도 덩달아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080년이라는 기간 동안 오르샤는 일개 도시에서 구조화된 통치도시로 거듭났고, 왕실이 군주를 지정하기도 했습니다. 행정구역의 설립으로 인해 몇 세대에 걸친 자연적인 거주가 이루어지면서 오르샤는 완전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왕국 남쪽에 있는 클라페다에 이은 2번째

도시의 전통을 존중하고자, 테모멜 국왕이 자치 지역에 파견할 관리를 선정할 때, 클라페다나 페디미안과는 다르게 오르샤를 지역 귀족들이 통치하도록 두었습니다. 이 방침을 따른 이후로, 오르샤는 신수의 날 발생까지 천 년간의 번창을 보게 됩니다.

그 날의 비극은 도시와 도시의 거주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끼쳤습니다. 하지만 오르샤의 어린 군주는 피난민들을 받아들이고, 주변 지역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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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페다 봉기에 대해서
-클라페다가 있던 지역을 독일에서는 메멜(Memel)지방이라고 부릅니다. 메멜의 독일화 과정은 16세기 종교개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튜튼 기사단의 기사단장이었던 알브레이트 폰 호엔촐레른은 프로테스탄트로 개종을 한 후, 폴란드 국왕이었던 외삼촌 지그문트 1세로부터 공작 작위를 제수받고, 지금의 칼리닌그라드 지역인 쾨니히스베르크에 공작령을 만들게 되고 이게 바로 프로이센 공국의 시작입니다.

**프로이센 공국 문장




하지만 공작령에는 상당수의 리투아니아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체제였으니까요. 다행히 그들도 프로테스탄트로 동화되어 큰 충돌은 없었습니다. 

본격적인 독일화는 19세기 후반에 일어납니다. 독일어를 강제로 배우게 하는 정책이 실현되자, 리투아니아어를 배우지 못한다는 불만이 있었으나 약했습니다. 오히려 서구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했고, 당시 신문이나 책들도 리투아니아어로 출간되었기에 불만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차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패전국이 되자 독일 소유의 메멜 지방도 강제로 빼앗기게 됩니다. 그리고 메멜 지방 관리를 위해 국제연맹 관할 프랑스군이 주둔하게 됩니다. 리투아니아는 메멜 지방이 자국의 영토로 편입되기를 원했습니다. 부동항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프랑스군은 시간을 두고 메멜을 독립시키길 원했고, 메멜 현지인들이나 독일은 일단 독립 후 독일로 편입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리투아니아는 당시 정식국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메멜을 편입하기가 쉽지 않았으나 폴란드가 뜬금없이 메멜 편입에 찬성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사이가 급격히 틀어지고, 급기야 리투아니아의 도시인 빌뉴스를 빼앗기자 더욱 메멜 지방을 노리게 됩니다. 

리투아니아는 독일하고 협상을 하고, 비공식적으로 메멜을 넘겨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메멜 지방에 단체를 조직하여 자국인이 통치하는 곳으로 만들자는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단체에 가입하게 됩니다.

1923년 해당 단체가 리투아니아의 독립과 자치와 관련된 성명을 발표하고,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리투아니아가 군대를 이끌고 여기에 개입하게 됩니다. 당연히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국가들이 화를 내나, 당시 리투아니아가 소련과 동맹을 맺고 있었기에 1924년 정식으로 리투아니아의 지역으로 편입하게 됩니다.

**당시 메멜 지방의 역사적 지도





*오르샤 전투에 대해서

오르샤 전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이 모스크바 공국을 상대로 대승을 한 전쟁으로 러시아가 리투아니아를 완전 전 정복하고자 한 러시아-리투아니아 전쟁의 일환이기도 했습니다.

폴란드 왕이었던 지그문트 1세는 약 35,000명의 병력을 모았습니다. 대부분이 잘 훈련된 기병대였습니다. 지그문트 1세는 약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당장 위급한 지역을 구원하러 갔고, 주력군 3만 명은 러시아군을 향해 움직였습니다.

당시 모스크바 공국 사령관이었던 이반 첼랴드닌은 고라챠 공작과 함께 측면에 배치되어 있던 폴란드 군을 공격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군 전체를 포위하려 했으나 측면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중앙에 대기하고 있던 기병대가 늘어져 있던 러시아군 중앙을 공격하게 됩니다. 한창 공격 중에, 갑자기 방향을 틀어 퇴각을 하자 러시아는 기병부대를 모두 동원하여 적군 기병대를 쫓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갑자기 리투아니아군이 태세를 바꾸고, 폴란드군 포병대가 러시아군을 포위하여 공격을 가했습니다. 결국 러시아군은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게 됩니다.

폴란드 연대기에 의하면 러시아군 4만 5천명 중 3만 명이 전사했고, 이반 첼랴드닌을 비롯한 8명의 사령관들이 사로잡히고, 3000명의 포로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 터무니없는 대패에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는 분개하여 포로 협상 따위는 필요없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측 기록이 전무하기에 교차검증을 할 수가 없어 이 병력이 다소 과장되었다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스크바 공국이 대패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기병대가 바로 문명이나 토탈 워 등에서 잘 알려진 '윙드 후사르'입니다.

***오르샤 전투를 묘사한 그림
Autor nieznany (malarz z kręgu Lukasa Cranacha Starszego), Bitwa pod Orszą.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