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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 : 소펠펠

 

 

 

 

 

 

담배 연기가 무심코 모니터를 훑고 지나갔다.

‘담배 좀 그만펴.’

아버지가 무표정으로 하신 걱정이 생각났지만, 곧 잊어버렸다. 못난 놈.

 

못난 놈. ‘하...’ 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나의 아이덴티티를 잘 표현해주는 말이 있을까?

옆에서 웬 바바리안이 사이즘을 쓰는 걸 보면서 나는 다시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나는 습관처럼 F1을 누르다가 그 계기가 생각났다.

 

체력 : 180

 

그 외의 다른 숫자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 처음엔 그렇게 즐겁게 시작했다. 체력이 많아져서 모든 사람들의 앞에서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겠다고, 그렇게 마음먹었다.

 

 

 

 

 

 

그런데 왜....

 

 

 

 

 

현재 레벨은 97, 위치는 왕릉 4층.

퀘스트를 진행하다가 베누켈로스라는 몬스터가 세이지월 제작서를 준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나는 판금몹임이 무색할 정도로 죽지 않는 베누켈로스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는 때리기 속성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그나마 나은 편이다. 옆에서 허공에 삽질을 하는 하플라이트를 바라보며 씁쓸히 자위했다.

 

 

 

 

그러나 나의 이런 자기위안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무참히 박살났다.

 

 

 

 

갸웃하던 하플라이트는 스태빙을 꺼버리고, 아르데를 끼고 평타를 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방패 같은 폐품을 든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베누켈로스들을 학살하기 시작한 하플라이트를 보면서 나는 그저 채널 이동 버튼만 눌렀을 뿐이다.

 

 

 

 

그렇게 온 채널3. 한적하다. 그래, 이거지.

 

 

세이지월 제작서만 떨궈라, 내가 온힘을 다해 115던젼을 쓸어먹어 주마.

나는 누가 들으면 한숨을 쉴만한 헛된 희망을 상기하면서 방패를 들었다.

 

그리고 이 때, 그 녀석이 나타났다.

 

 

내가 평생을 잊을수 없을 그 아이디.

 

 

 

 

 

 

 

 

 

 

 

 

아이디 ‘하하하’, 팀명 ‘맨맨맨’

 

 

 

 

 

 

 

 

 

 


 

 


녀석은 붙임성이 좋은 녀석이었다.
나처럼 케파인형 하나 안 달고 있는 무뚝뚝한 놈에게 먼저 와서 인사한 것만 봐도 그렇다.
지금 와서 보면, 녀석은 그저 내 팬티를 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여어 히사시부리’

 

 

 

웃기지도 않는 말로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 녀석은 소드맨 기본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래, 거기서 내가 한 유일한 실수는 그 녀석의 등 뒤에 메고 있는 ‘플라미니’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뭐함? ㅋㅋㅋ?’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본능, 이기심 때문이다. 괜히 내가 알려주어서 경쟁자를 늘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나는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잠시라도 했던 자신을 탓했다. 그리고 망설임이 끝난 나는 그에게 상냥해보이도록 애쓰면서 조용히 그 이유를 말해줬다.

 

 

 

 


‘여기서 세이지월 제작서가 떨어진다고 해서요. 베누켈로스를 죽이면 나온다네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등장한 베누켈로스들.  그리고 그 녀석이 돌변한 것도 바로 그 때부터였다. 그리고 내가 하이랜더라는 캐릭터를 증오하게 된, 바로 그 시점 역시 바로  그 때부터였다.

 

 

 

녀석은 ‘아, 진짜임?’


그렇게 말하고는 등에서 그 거대하고 화려한 검을 꺼냈다.

 

 

 

 


그 검에 붙어있는 옵션이 ‘악마’와 관련되었고, 이곳에서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주 먼 훗날이었다.

 

 

 

‘엄청 세네요!’

 

녀석의 실력은 화려했다.

베누켈로스를 한 마리 잡았을 때 나는 오히려 그를 칭찬하고 있었다.

내가 자릿세를 낸 것도 아닌데 저런 재밌는 녀석과 함께 한다면 오히려 괜찮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 녀석은 대답이 없었다.

 

 

아무런 대답도.
아무런 말도.

 

 

 

오직 잔인하면서도 아름다운 곡선만으로 나의 시선을 뺏었을 뿐이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녀석은 모닥불을 키고 자리에 앉아있었다.

 

 

 

 

‘팬티스타 개약하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왜함?’

 

 

 

 

 

 


비수처럼 꽂히는 말.

기분이 멍해졌다.

 

 

 

 

 

 

 

그러나

그저 나보다 조금 어린 친구일 뿐,
철이 없을 뿐,
그냥 자기에 대한 애정이 조금 많을 뿐,

그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때는 이미 너무 늦었었다.

 

 

 

 

 

 

 

 

 

 

 

 

 

 

 

 

녀석은 집요했고, 빨랐으며, 무자비했다.
마치 사이코패스(혹은 사이코해승)나

징기스칸의 약탈부대라도 되는 것처럼 내가 가려는 모든 길 앞에,

그의 대검이 무자비하게 날아다녔다.

 

 

 

15분이 지났을까? 안 그래도 화가 나있는 나에게 가혹한 시련이 다시 찾아왔다.

 

이제는 내가 치고 있는 것까지 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도 벌써 엄보블로를 쓴, 베누켈로스에게.

 

 

마침내 내가 화를 참지 못하고 뭐라고 쓰려고 했을 때, 유쾌한 소리가 들렸다.

 

 

 


‘띠링!’

 

 

 

 


그것은 ‘콰다라’ 따위가 떨어지는 평범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레이트 소드 제작서’ 따위도 아니었다.

 

 

그래, 마치 드라마에서처럼 나의 앞에는 ‘세이지월 제작서’라고 쓰인 주황색 종이 쪼가리가 그야말로 전설처럼 떨어진 것이다.

 

 

 

미친 듯이 대쉬를 눌러 그 앞에 가봤지만,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꿈인가?
아니었다.

 

 

그래, 그건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왕릉 4층에서 레벨 6개를 올릴동안 먹지 못했던,


죄없는 베누켈리스의 카운트가 2500개를 가르키는 동안 먹지 못했던,


거의 2주일간의 노가다는 그렇게 허무한 끝을 보였다.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지만,
나는 세이지월을 제일 좋아한다.

 

 

 

그런데 방패도 쓰지 않는 하하맨 새끼가 나의 세이지월을 강탈해놓고,


자기의 닉네임처럼 ‘하하하’하고 쪼개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무언가가 ‘팍’하고 끊어졌다.

 

 

그리고 키보드를 재빨리 누르고 있는 나의 눈에 하하맨이 제작서를 들고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마치 이 순간이 꿈이었던 것처럼.

 

 

 

 

 

 

 

 

 

 

 

 

 

 

 

 

 

 

에필로그

 

 

그렇게 게임을 하면서 인생을 느꼈던 나의 경험은 이제 과거형이 되었다.

 

그리고 나도 이제 회피이동을 쓸 수 있는 5랭의 소펠펠로로가 되었다.

 

그래, 이제는 당당하게 130 인던 앞에 서서 파티플레이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이곳저곳에서 나를 모셔가려고 눈앞에 수없이 떠있는 파티 초대 메시지 중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매너가 좋은 사람들. 링커가 권세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 수가 제법 되는 탓에 오늘은 꽤 빨리 구해졌다. 남은 것은 커세어 하나 뿐.

 

파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어떤 커세어 하나가 파티에 초대되었다. 파티장이 이빨이 좋은지 참 빨리 구해진다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커세어님 하이염! 친하게 지내염!’

 

 

아니 무슨 게임이 아무렇게나 키워도 커세어만 가면 탱커보다 대접을 받는다는 말인가!  무언가!  그런 울컥함을 겨우 진정시키고 커세어의 아이디를 보는 순간, 나는 진짜로, 진심으로 손가락을 멈췄다.

 

 

‘하하하 맨맨맨’

 

 

틀림없이 그 녀석이었다.

 

 

나는 그 녀석을 용서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취업하기 힘들었는지 커세어를 탄것부터, 하하를 가놓고 아직도 나와 렙이 같은 것까지 나름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트리오브세이비어’라는 게임 상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말은 이것이다.

 

 

 

 

 

 

 

 

‘탱커 왜 데려감, 그냥 내 친구 링커 한명 더 끼고 하죠.

   한달 쉬었더니 분위기 이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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