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연히 저자, 역자, 출판사 등과 아무런 이해관계는 없습니다.

스티븐 핑커 선생님의 비교적 최근 저작.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와 비슷한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좀 지루하긴 합니다.
지금 다시 계몽 / 사이언스 북스 / 2021
ENLIGHTENMENT NOW / 2018

2부 진보(Progress) 말미를 조금 옮겨 적어봅니다. 우리나라 현실과 비슷하면서도 다른점이 있다는걸 염두에 둬야할것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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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하면 계몽주의의 가치를 위협하는 포퓰리스트의 위협에 대응할 수 있을까? 불안정한 경제는 포퓰리즘의 동력이 아니니,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거나 실직한 철강 노동자와 대화하고 그들의 고통을 느껴 보고자 하는 일은 가치 있는 일이기는 해도 큰 효과는 없을 것이다. 포퓰리즘의 동력은 문화적 반동인 듯하니, 수사, 상징성, 정체성 정치로 불필요한 양극화를 조장하지 않는다면, 아직 자신이 어느 편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을 끌어들이거나, 적어도 그들에게 반감을 사지 않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포퓰리즘 운동은 그들의 숫자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므로, 게리맨더링 같은 선거 제도상의 부정과 시골 지역의 표가 더 큰 무게를 갖는 불균등한 대표성을 개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언론인은 사소한 실수나 추문으로 후보자의 평판에 흠을 내기보다는 그의 이력이 얼마나 올바르고 일관성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 문제의 일부는 도시화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사람을 억지로 농장에 붙잡아 놓을 수는 없다. 그리고 일부분은 인구학적 변화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과학계에서 흔히 하는 말처럼, 때로는 사회도 장례를 치르며 조금씩 전진한다.
 How might one counter the populist threat to Enlightenment values? Economic insecurity is not the driver, so the strategies of reducing income inequality and of talking to laid-off steelworkers and trying to feel their pain, however praiseworthy, will probably be ineffective. Cultural backlash does seem to be a driver, so avoiding needlessly polarizing rhetoric, symbolism, and identity politics might help to recruit, or at least not repel, voters who are not sure which team they belong to. Since populist movements have achieved an influence beyond their numbers, fixing electoral irregularities such as gerrymandering and forms of disproportionate representation which overweight rural areas would help. So would journalistic coverage that tied candidates' reputations to their record of accuracy and coherence rather than to trivial gaffes and scandals. Part of the problem, over the long term, will dissipate with urbanization: you can't keep them down on the farm. And part will dissipate with demographics. As has been said about science, sometimes society advances funeral by funeral.
 
 그럼에도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의 부상과 관련된 수수께끼는, 그 누구보다 선거 결과에 따라 자신의 이익이 크게 위태로워질 수 있는 인구영역에 속한 사람들, 즉 브렉시트의 경우 젊은 영국인들, 트럼프의 경우 아프리카계 미국인, 라틴계 미국인, 그리고 밀레니얼 세대가 왜 충격적이리만치 높은 비율로 선거일에 집에 머물러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다시 이 책의 주제로, 그리고 최근의 반계몽주의적 반발에 대항해서 계몽주의적 휴머니즘의 흐름을 강화하기 위한 나의 작은 처방으로 돌아간다.
 Still, a puzzle in the raise of authoritarian populism is why a shocking proportion of the sectors of the population whose interests were most endangered by the outcome of the elections, such as younger Britons with Brexit, and African Americans, Latinos, and American m

illennials

 with Trump, stayed home on election day. This brings us back to a major theme of this book, and to my own small prescription against the latest counter-Enlightenment backlash.
 
 나는 언론과 지식인들이야말로 현대 서양 국가들은 공정하지도 않고 제 기능도 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국가를 급격하게 흔들지 않고서는 발전도 없다고 말하는 포퓰리스트들의 공범이라고 믿는다. 어느 보수주의자 에세이스트는, "조정실로 돌진하지 않으면 당신은 죽는다!"라면서 9/11 당시에 승객의 반란으로 탈취당한 항공기에 미국을 빗대어 소리쳤다. "방화의 정치"를 주장하는 좌파 인사는 격앙된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나는 클린턴의 지휘 아래 자동 비행하는 미국을 보느니, 차라리 트럼프의 통치 아래 제국이 불타 무너지는 모습을 보겠다. 적어도 거기에는 급격한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주류 신문사의 온건한 논설 위원조차도 흔히 미국을 인종주의, 불평등, 테러리즘, 사회적 병폐, 붕괴하는 제도의 수렁으로 묘사한다.
 I believe that the media and intelligentsia were complicit in populists' depiction of modern Western nations as so unjust and dysfunctional that nothing short if a radical lurch could improve them. "Charge the cockpit or you die!" shrieked a conservative essayist, comparing the country to the hijacked flight on 9/11 that was brought down by a passenger mutiny. "I'd rather see the empire burn to the ground under Trump, opening up at least the possibility of radical change, than cruise on autopilot under Clinton," flamed a left-wing advocate of "the politics of arson." Even moderate editorialists in mainstream newspapers commonly depict the country as a hellhole of racism, inequality, terrorism, social pathology, and failing institutions.
 
 디스토피아적 수사학의 문제는, 만일 사람들이 정말로 미국이 불타는 쓰레기통이라고 믿게 될 경우, "잃을 게 뭐가 있어?" 라는 선동이 영원한 생명력을 얻고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한다는 것이다. 대신에 언론과 지식인들이 통계의 맥락과 역사적인 맥락에서 사건을 다룬다면, 우리는 저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있다. 나치 독일과 마오주의 중국에서부터 베네수엘라와 터키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급진주의 정권은 우리에게 한가지 진실을 보여 준다. '위기'에 반응한 카리스마 넘치는 독재자가 민주주의의 규범과 제도를 짓밟고 자신의 개성이 짙게 밴 권력으로 나라를 통치할 때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것을 잃게 된다는 것을.
 The problem with dystopian rhetoric is that if people believe that the country is a flaming dumpster, they will be receptive to the perennial appeal of demagogues: "What do you have to lose?" If the media and intellectuals instead put events into statistical and historical context, they could help answer that question. Radical regimes from Nazi Germany and Maoist China to contemporary Venezuela and Turkey show that people have a tremendous amount to lose when charismatic authoritarians responding to a "crisis" trample over democratic norms and institutions and command their countries by the force of their personalities.
 
 자유 민주주의는 우리의 귀중한 성취이다. 메시아가 도래하지 않는 이상 거기에는 늘 이런저런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불을 지르고 뼈와 재 속에서 새로운 것이 솟아나기를 바라기보다는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더 나은 길이다. 사회 비평가가 근대성이 준 선물을 보지 못한다면, 책임감 있는 관리자들과 점진적 개혁가들이 우리가 누려 온 엄청난 진보를 더욱 공고히 하고 더 많은 진보의 조건을 강화할 수 있다고 해도 유권자들이 이를 몰라보고 등을 돌릴 수 있다.
 A liberal democracy is a precious achievement. Until the messiah comes, it will always have problems, but it's better to solve those problems than to start a conflagration and hope that something better arises from the ashes and bones. By failing to take note of the gifts of modernity, social critics poison voters against responsible custodians and incremental reformers who can consolidate the tremendous progress we have enjoyed and strengthen the conditions that will bring us more.
 
 근대성을 지지하기 위해 넘어서야 할 난관이 하나 있다. 뉴스를 가까지 들여다보면, 낙관주의는 순진해 보이거나, 전문가들이 엘리트를 표현할 때 가장 즐겨 쓰는 말처럼,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견해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웅 신화에 속하지 않는 현실 세계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진보는 막상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는 잘 느껴지지 않는 작은 진보들이다. 철학자 아이제이아 벌린이 지적했듯이, 완벽하게 정의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고, 조화로운 사회라는 이상은 위험한 환상이며, 자유 민주주의 국가는 그런 이상에 한 번도 도달한 적 없다. 사람들은 단종 재배로 생산된 복제품이 아니고, 따라서 누군가의 만족은 곧 다른 이의 불만이 되기 마련이며, 사람들이 평등한 결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불평등한 대우를 받아들이는 것(*의미를 이해못하겠슴)이다. 게다가 자유의 특권에는 자신의 삶을 망가뜨릴 자유가 포함된다. 자유 민주주의는 진보할 수 있지만, 누더기 같은 타협안과 부단한 개선이라는 불변의 배경 속에서만 진보한다.
 The challenge in making the case for modernity is that when one's nose is inches from the news, optimism can seem naïve, or in the pundits' favorite new cliché about elites, "out of touch." Yet in a world outside of a hero myths, the only kind of progress we can have is a kind that is easy to miss while we are living through it. As the philosopher Isaiah Berlin pointed out, the ideal of a perfectly just, equal, free, healthy, and harmonious society, which liberal democracies never measure up to, is a dangerous fantasy. People are not clones in a monoculture, so what satisfies one will frustrate another, and the only way they can end up equal is if they are treated unequally. Moreover, among the perquisites of freedom is the freedom of people to screw up their own lives. Liberal democracies can make progress, but only against a constant backdrop of messy compromise and constant reform:
 
 자녀들은 부모와 조부모가 갈망했던 것을 얻었다. 더 큰 자유, 더 큰 물질적인 부, 더 정의로운 사회까지. 하지만 지난날의 병은 모두 잊혔고, 자녀들은 지난 문제의 해결책 때문에 생긴 새로운 문제와 맞닥뜨린다.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해도, 다시 그로 인해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요구가 그렇게 영원히,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발생한다.
 The children have obtained what their parents and grandparents longed for - greater freedom, greater material welfare, a juster society; but the old ills are forgotten, and the children face new problems, brought about by the very solutions of the old ones, and these, even if they can in turn be solved, generate new situations, and with them new requirements - and so on, forever - and unpredictably.
 
 이것이 진보의 본성이다. 창의성, 공감, 좋은 제도가 우리를 이끌어준다. 인간 본성의 어두운 측면과 열역학 제2법칙이 우리를 밀어낸다. 케빈 켈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변증법이 결국 어떻게 전진 운동을 만들어 내는지를 설명한다.
 Such is the nature of progress. Pulling us forward are ingenuity, sympathy, and benign institutions. Pushing us back are darker sides of human nature and the Second Law of Thermodynamics. Kevin Kelly explains how this dialectic can nonetheless result in forward motion:
 
 계몽 운동이 시작되고 과학이 발명된 이후로 우리는 해마다 파괴한 것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창조해 왔다. 하지만 그 몇 퍼센트의 긍정적 차액이 몇십년에 걸쳐 이른바 인간의 문명을 구축햇다. ...... (진보)는 자신을 감추는 행위라서 돌이켜볼 때만 눈에 보인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나는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나의 커다란 낙관은 역사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말한다.
 Ever since the Enlightenment and the invention of science, we've managed to create a tiny bit more than we've destroyed each year. But that few percent positive difference is compounded over decades into what we might call civilization ...... [Progress] is a self-cloaking action seen only in retrospect. Which is why I tell people that my great optimism of the future is rooted in history.
 
 우리는 단기적인 후퇴를 장기적인 진전과 조화시키고 역사의 흐름을 인간의 행위와 조화시키는 건설적인 의제를 귀에 쏙 들어오는 이름으로 표현하는 데 서툴다. '낙관주의'(라는 표현)는 별로 옳지 않다. 사정이 언제나 나아지리라는 믿음은 사정이 언제나 나빠지리라는 믿음보다 더 합리적일 게 없다. 켈리는 진보와 과정의 앞글자  pro-를 가져와 "프로토피아"라는 이름을 제안한다. 다른 이들은 "비관주의적 희망", "낙관적 현실주의", "급진적 점진주의"를 제안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름은 낙관주의자인지를 묻는 질문에 한스 로슬링이 내놓은 답에 있다. "나는 낙관주의자가 아닙니다. 나는 아주 진지한 가능주의자입니다."
 We don't have a catchy name for a constructive agenda that reconciles long-term gains with short-term setbacks, historical currents with human agency. "Optimism" is not quite right, because a belief that things will always get better is no more rational than the belief that things will always get worse. Kelly offers "protopia", the pro- from progress and process. Other have suggested "pessimistic hopefulness," "opti-realism," and "radical incrementalism." My favorite comes from Hans Rosling, who, when asked whether he was an optimist, replied, "I am not an optimist. I'm a very serious possibi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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