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 을 보고 나서, 저 어마무시한 하나회를 어떻게 김영삼은 숙청했나 궁금했다. 꺼무위키로 김영삼을 보니 26세 무렵에 최소의 나이로 국회의원을 달고, 무려 9선을 했다는거.
그리고 자유당서 시작해 이승만의 4사5입 이후로 민주계로 전환, 6선 무렵에 1회(그 마저 다음해에 당선), 13대 대통령 선거 때 1회(김대중과 단일화 무산)를 제외하면 전승의 화신이었던 것.
이후 3당 노태우, 김종필과 함께 3당 합당을 통해 지금도 유일하게 보수계열에서 대통령이었다고 할 수 있는 유일한 대통령이지만, 대통령으로서의 행적은 참 반대되는 노선을 탔다고 보인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승리를 위해서 그냥 합당 한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면, 당시 김대중은 절대로 단일화를 거부했던 입장이었기 때문에..
여튼 3당 합당 후, 당 내에는 서울의 봄 마지막에 나오지만, 하나회 출신의 국회의원도 많았고, 군에도, 정부 요직에도 건재했지만, 국방장관과 대화 몇 마디 후 그날 바로 거침없이 하나회출신 장성들을 보직해임했다.


---------------- 아래는 궁금해서 퍼온 글 -----------------
에피소드1


1993년 당시 김영삼은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하나회 출신인 서남수 기무사령관을 보고 "앞으로 대통령과 독대하지 말고 국방장관을 통해 보고하라" 라고 말을 하는 한편,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국군의 명예외 영광을 되찾아주는 일에 앞장서겠다는 말을 통해 에둘러서 군을 엎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김영삼이 본격적인 숙청에 들어간 건 취임 11일 째인 1993년 3월 8일. 이 순간까지 군 수뇌부는 물론 청와대 비서진들까지도 김영삼의 의도를 모르고 있었는데, 김영삼은 몇몇 최측근들과 일을 의논하다 이날 아침 국방부장관인 권영해를 불러서 독대를 했다.
"장군들은 정권이 바뀌면 사표를 내지 않느냐" 라고 일단 김영삼이 운을 뜨자 국방부 장관인 권영해는 "대통령이 새로 취임한다고 군인들이 사표를 내지는 않는다" 라고 답했고, 김영삼이 "그럼 군 장성들을 언제 바꿀 수 있느냐" 고 말하자 권영해는 "대통령이 통수권을 행사한다면 언제든 가능하다" 라고 했으며, 그러자 김영삼은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오늘 바로 바꾼다고 선언해 버렸다. 장관이 극비리에 육군본부 기무사 수방사 특전사 등의 동향을 체크하도록 지시를 내린 상황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김영삼과 권영해가 수뇌부에 대한 인선에 들어갔고, 비 하나회 출신인 김동진과 김도윤으로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교체해 버렸다. 여기까지 과정이 단 네 시간.
여기에 이르러서도 이 일이 군 수뇌부 교체 정도가 하나회 숙청 과정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김영삼 자신과 몇몇 측근에 불과했다.



1993년 4월 1일에는 수방사와 특전사의 사령관까지 기습적으로 교체했고, 이런 교체 의도를 권영해 국방부 장관이 알게 된 건 겨우 발표 하루전이었을 정도로 이러한 진행은 김영삼과 측근들에 의해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그리고 불과 며칠 단위로 각군 사령관과 사단장급까지 교체하는 일이 4월 동안 벌어졌으며, 이러한 기습적인 교체로 군 주요 보직에서 하나회 인사들이 제거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일이 이어지는 중에 당시 대령이던 백승도(하나회 회원은 아니었다)가 하나회 명단을 군인 아파트에 뿌리는 일을 벌였고,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하나회의 깊은 뿌리가 제대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 하나회 명단 살포 건으로 인해 하나회 숙청이 시작되었다는 말들이 간혹 있으나, 앞선 내용에 있듯이 하나회에 대한 숙청은 이미 진행중이었다.



이러한 수뇌부에 대한 1차 숙청 과정 이후 하나회 출신이 군 내 주요 자리에서 물러난 상태에서, 하나회 회원이던 이충석(당시 소장)이 술자리에서 정부가 군을 막 대한다며 술잔을 던지며 소동을 벌이는 일이 벌어졌고, 이를 하나회 숙청에 대한 저항이라고 간주한 대통령과 주요 지도부에 의해 하나회 출신의 주요 장성들은 아예 조기전역까지 당하며 군을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그후에도 하나회 출신은 군 승진인사에서 계속 배격당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하나회 숙청 과정에서 공군참모총장이 합참의장이 되고 국방부 장관까지도 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에피소드2



YS는 “ 이 땅에서 군사 쿠데타의 망령을 영원히 지워 버려야 한다”며 하나회 해체에 나섰다. YS는 김진영 총장-서완수 사령관에 이어 하나회 출신 수도방위사령관(안병호)과 특전사령관(김형선)을 비(非)하나회 출신으로 교체했다. 그해 4월 초 육사 20기부터 36기까지 142명의 명단이 적힌 ‘하나회 회원명부’가 군인 아파트촌에 살포되면서 하나회 색출은 속도를 냈다. 이후 ‘5·24 숙군’이라고 불리는 군 고위직 인사에서 하나회 회원들 중 3성 장군 이상 전원과 장성 50여 명이 군복을 벗었다. 하나회 장성의 회식장소 난동사건 등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YS는 “개가 짖어도 열차는 달린다” 며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YS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외교 안보와 관련한 인사를 할 때 하나회 출신들의 (인사 대상자로 올라오진 않았는지) 명단을 체크했다”고 술회했다.

이로써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충성 ▶군내 주요 보직은 회원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노력 등을 원칙으로 했던 하나회는 해체됐다.

임기 초반 하나회를 뿌리 뽑았던 YS의 칼날은 끝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으로 향했다. YS는 95년 11월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한 5·18특별법 제정계획을 발표했다. 검찰에 특별수사본부가 꾸려지고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과 79년 12·12 사태를 일으킨 신군부 핵심 인사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앞서 95년 10월 19일 당시 민주당 박계동 의원의 폭로로 두 전직 대통령의 수천억원대 비자금도 드러났다. 두 전직 대통령은 결국 대법원에서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을 받았다. 집권 초 하나회를 해체시킨 YS는 96년 하나회 창립자였던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웠다. YS가 아니고선 하기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출처 = https://www.instiz.net/pt/34020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