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나타난 홈페이지 븅딱 시키가 쓴 글 속에서... (어머니에게 박정희가 잘못한 것 열가지를

말해주면 '그래도 그분 덕에 이만큼 먹고 살만 해졌다' 라는 말로 입을 닫게 만들어 버린다)는 개소리를

읽고서... 죤나 빡돌아서 좀 시간 투자해서 장문의 글을 써본다... 읽고 참고를 하든지 말든지...

 

 

 

1)유신 체제와 국제 상황

유신체제를 압축해서 말하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의 종신집권, 권위주의적 억압책 강화, 중화학공업화 정책과 이를 위한 사회적 동원의 결합'

 

박정희는 이를 통해 사회를 준전시 상황처럼 통제했다.

1972년에 선포된 유신체제는 주로 “안보 위기”를 근거로  권위주의적 억압을 정당화했고 통치 이념으로

"반공"을 앞세웠다.. 오죽하면 '국시'를 반공이라고 했었을까...

 

이처럼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억압적 통치를 강화해나가던 한국과 달리 세계적으로는 냉전 체제가 

급속하게 무너지고 있었는데, 당시 미국은 베트남에서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고, 그에 뒤따른 패권의 공백을

‘공산 중국’과 타협하는 방식으로 메우려 했다.

 

미국의 한국사 연구자 브루스 커밍스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닉슨 독트린은 베트남전으로부터 승리 없이 철수하겠다는 신호를 분명히 보냈고, 그럼으로써 남한 정권과

유사한 처지의 사이공 정권을 위태롭게 했다.”  “미국의 대외정책상의 극적인 변화로 말미암아 남한은 깊은

충격을 받았으며 아시아의 마지막 도미노 처럼 보였다.

 

2)유신 체제와 국내 상황

극단적 저임금 노동에 기반을 둔 급속한 수출주도 경제성장 전략의 모순이 터지기 시작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정권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반공과 더불어 경제성장이었다.

부산의 사상공단, 마산의 수출자유구역은 박정희의 ‘성공적인 수출지향적 경제발전 전략’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박정희의 특혜를 입은 이 지역, 다시 말해 박정희가 자신에게 우호적인 지역이라고

여겼을 이 지역이 박정희의 무덤이 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율을 보면, 경제는 1976년 14.1퍼센트 성장했지만, 성장률이 1978년에 9.7퍼센트로

떨어지더니 ‘오일 쇼크’가 강타한 1979년에는 6.5퍼센트, 급기야 1980년에는 마이너스 5.2퍼센트로 폭락했다.

 

이것은 박정희의 외자에 의존한 중공업 주도 성장 정책이 얼마나 허약할 수 밖에 없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결과인데... 당시 부총리 자문역을 했던 김기환은 “중화학 공업에 치중하다보니 1975~77년 섬유산업에 대한

은행대출이 전체의 40퍼센트에서 절반으로 줄고 말았는데, 그 결과 노동집약적인 중소기업들이 몰려 있던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반정부 시위가 터졌다”고 분석했다. 부산지역 부도율은 전국의 2.4배에 달했고, 수출

증가율 역시 전국증가율인 18.4퍼센트에 훨씬 못미치는 10.2퍼센트로 둔화했다. 

 

 

위기에 대한 책임 전가

물론 이러한 위기의 대가는 서민들이 치렀다.

1979년 박정희는 전기요금을 35퍼센트나 올려버렸다. 물가가 22퍼센트 올랐고 해고와 실업도 늘었다.

 

많은 농민들이 박정희식 경제성장 정책을 가난에서 벗어날 유일한 기회로 여기기도 했지만, 막상 그들을

기다린 것은 비인간적인 노동규율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었다. 그나마 “선성장 후분배”를 내세운 박정희

정권 시절에 경제성장의 과실도 균등하게 배분되지 않았다. 경제성장률은 높았지만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을 강요당했다.

 

특히 제조업 노동자의 실질임금 상승은 매우 느렸다.

1970년 전태일이 분신했을 때 평화시장 여공들의 시급은 커피 한 잔 값에 지나지 않았는데, 거기서 9년이

지난 1979년 YH 농성 여공의 시급 수준도 그와 같았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재벌과 부자 들은 급속히 부를

늘렸다. 빈부 격차는 박정희 정권 내내 심해졌다.

 

1978년 원풍모방 노동자 장남수는 이렇게 말했다. “100억불 수출을 달성했다고 거리는 들떠 있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들어야만 합니까. 다들 잘 살게 되었다는데, 모두들 경제가 성장했다고들 하는데 저희들은 왜

이렇게 배가 고픕니까 … 알 수가 없습니다 … 저희들은 누구를 위해 일해 왔으며 또 일해야 합니까?”

 

 

돌아서는 민심

1978년 12월 총선... 야당인 신민당이 32.8퍼센트를 득표했다. 신민당보다  선명한 야당을 표방한 통일당도

7퍼센트를 얻었다. 반면 박정희의 공화당은 31.7퍼센트를 얻어 사실상 패배했다.

부산과 마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지역의 의석 수 10석 중 공화당은 4석, 신민당은 5석을 차지했다.

그나마 당선한 공화당 4명도 1위가 한 명도 없었고 다 차점자에 지나지 않았다.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에서

공화당의 열세가 두드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는 야당 탄압을 더 강화해 신민당 당수인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했는데, 이는 들끓는

부산 민심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유신대학으로 불리던 부산 대학에서 부마항쟁이 시작되다.

한국 역사에서 자주 그랬듯이 부마항쟁에서도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가 방아쇠 구실을 했다.

유신에 항거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켜 ‘유신대학’이라는 오명을 들어온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누구도 항쟁이 폭발적으로 벌어질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한 부산대학교 활동가는 항쟁 하루 전에도

“역시 부산대는 안 돼” 하며 술을 퍼마셨다고 회고했다.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 4천여 명이 “유신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진출했다. 이어 동아대학교

학생들이 합류하자 시위대 규모는 점점 늘었다. 저녁이 되자 퇴근하는 노동자들이 합류해 시위대는 5만~7만여

명에 달했다. 상인, 접객업소 종업원, 재수생, 교복 입은 고등학생까지 가세했다. 시위의 성격은  하층민들이

대거 참가하면서 점점 격렬해졌다. 경찰서, 어용 언론사, 도청 등이 불에 타거나 파손됐다.

 

항쟁의 규모와 격렬함에 놀란 정부는 신속하게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그러나 시위는 마산으로 번졌다. 마산에서도 학생들이 시위를 촉발했다.

부산대학교와 마찬가지로 ‘유신대학’이던 경남대학교 학생 1천여 명이 거리로 나섰다. “지금 부산에서는 우리

학우들이 유신독재에 항거해 피를 뿌리고 있다. 나가자!”

 

마산에서 항쟁은 더 격렬했다. 부산과 마찬가지로 도시하층민이 항쟁의 주력이 됐다. 10월 20일 정부는 마산의

항쟁이 수출자유지역 노동자들로 확산하려 하자 마산과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진압부대로 투입된 공수부대와 해병대는 대검을 꽂은 채 잔인한 진압 작전을 폈다.

보안사령부가 작성한 보고서 <부마지역 학생소요사태 교훈>은 이렇게 말한다. “과감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타격해 데모 대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함으로써 군대만 보면 겁이 나서 데모의 의지를 상실토록 위력을 보여야

한다.” 이는 다음해 광주를 피로 물들인 공수부대의 야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부마항쟁과 지배자들의 분열

부마항쟁은 군대의 폭력으로 잦아들었지만, 항쟁이 지배자들에게 준 충격은 매우 컸다.

권력자들이 분열했다. 박정희는 강압적 지배를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재규가 총을 쏘기 직전 박정희는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했고, ‘2인자’인 경호실장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데모대원 1, 2백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하고 거들었다.

 

‘온건파’를 대변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강압적 지배방식 사용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부마항쟁 당시 현장을 시찰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항쟁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했다.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 국민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 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일반 시민에 의한 민중봉기로서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주고 피신처를 제공하는 등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

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 체제저항과 정책 불신 및 물가고의  반발에 조세저항까지 겹친 민란

이었습니다”

 

 

김재규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는 박정희를 죽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4.19와 같은 사태가 오면 국민과 정부간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질 것은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많은 국민이 희생될 것인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아니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4.19와 같은 사태는 눈앞에 다가왔고 아니 부산에서 이미 4.19와 같은 사태는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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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박정희의 죽음 이후...

유신시대  박정희 경호원들이었던  박정희의 근위병들이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를 이어간다.

전두환 노태우 둘 다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지냈던 자들... 그리고 전두환이는 죽은 박정희의 딸 박근혜에게

8억원을 건네주지... 그리고 또 오늘날에는 그 극악한 독재가 새킈의 딸년이 "아버지의 선택은 최선이었다"

라고 개씨부리면서 대통령이 되겠다고 설치고 있는 것이고... ㅆㅂ 이런 국가에서 국민으로 산다는 것이

죤나 비참하고 서글프지 않냐?  이것이 우리의 역사란 말이다... 좀 알고나 찬양하자 븅신들아... 

 

니들 머리에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쏘았다는 그 사실들만 인식돼냐?

난 국민적 요구에 의해 김재규가 박정희를 쏘도록 강제당했다고 생각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