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베트남 전쟁에 한국이 참전해서 군사적 행동을 한 것과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 학살을 동등한

침략으로 규정하고 비판해야 하느냐... 베트남 전쟁에의 참전은 자유민주주의 일원으로서 공산주의에

맞서기 위한 정당한 전쟁이었고, 일제는 그야말로 침략이었다... 이런 주장을 하시는 분들이 있네요.

 

좀 알고들 씨부립시다... 베트남 전쟁도 서방 제국주의 침략전쟁이었고, 일제 조선 침탈도 제국주의

팽창 침략전쟁이었습니다. 매사에 이런 식이니 너님들이 국뽕에 취한 국수주의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고, 우리의 베트남 파병은 정의이고 일제의 식민지 침략 전쟁은 우리가 피해자니까 불법

이라는 이중적인 국수주의+민족주의의 잣대로는... 일베충들의 일제 식민지 침략 미화 논리에 바른

대응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이자모두라는 일베충의 일제식민지 침탈 미화 논리에 대응하는 여러분들의 반박이 하도 답답하고

어이없어서 베트남 전쟁 발발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잠깐 정리해 드리는데요... 제국주의 침략전쟁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이고, 착한 침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국뽕에 취한 님들의

대뇌가 우리의 참전은 착한 참전이라고 착각하는 것 뿐이죠... 더구나 일제 식민지 침략전쟁을 미화

하려는 논리에 대해서 올바른 반박을 할려면,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적 관점에 선 반박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평등.박애.상호호혜라는 민주주의 일반 원칙에 위배되는 반인류 전쟁 범죄로 진행되는 모든

형태의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할 때 비로소 올바르게 반박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드리면서 글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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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OSS(CIA의 전신 기구) 요원 패티 소령이 중국 남부 국경의 한 찻집에서 호치민을 만납니다.

이 만남은 미국이 일본을 패배시키기 위해 게릴라들을 지원하려는 목적의 만남이었고요.

 

일본이 항복하자 호치민은 항일 투쟁 게릴라를 기반으로 베트남민주공화국을 건설하고 9월 2일을

독립기념일로 선포했합니다. 그러나 독립은 오래 가지 않았지요. 미국과 열강들은 베트남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급기야 프랑스는 1946년에 인도차이나 반도를 재점령했어요.

이 때부터 1954년까지 베트남은 프랑스와 전쟁을 치렀답니다.

 

1953년 프랑스 군대는 베트남 북서쪽에 자리잡은 디엔비엔푸 지역에 베이스 캠프를 차리고 병력을

집중했는데, 보 구엔 지압 장군이 이끄는 베트남 게릴라들은 프랑스 군대를 포위하고 이듬해 봄

전폭적 공세를 개시했는데, 결과는 프랑스 군대의 완패였습니다.

 

이 충격적인 패배로 프랑스는 항복을 선언했고 그 해 베트남 땅에서 철수했지요.

예컨데 모든면에서 전력이 현저하게 뒤떨어졌던 베트남이 프랑스에게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베트남 인민들이 게릴라들을 지원하기 위한 헌신적인 활동이 깔려있습니다.

 

중국이 지원한 대포를 몸에 묶고 중국 국경에서 디엔비엔푸까지 60킬로미터에 이르는 길을 맨발로

운반했다는 일화가 그 예이죠. 이런 인민들의 지원이야말로 베트남 게릴라들이 군사적 성공을 거둔

가장 큰 요인이었습니다.

 

그러자 미국은 '도미노 현상'을 억제한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에 진주해서 남베트남

고 딘 디엠을 수반으로 하는 꼭두각시 정부를 세웁니다. 1956년부터 남베트남을 통치한 디엠은

민중들에게 원성을 샀으며 사회는 혼란하기 그지없었고, 특히 불교도들의 저항이 엄청 거셌습니다.

 

농민은 게릴라 활동을 하며 저항했고, 그 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이 결성됩니다.

남베트남 군부는 동요했고 결국 1963년 말 쿠데타로 디엠 정권을 몰아내죠.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이 쿠데타를 지원했고, 이 때부터 남베트남이 항복하는 1975년까지

군부는 계속 쿠데타를 일으켰고 혼란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케네디가 암살된 뒤 대통령이 된 린든 B 존슨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전면적인 북베트남

공격에 돌입합니다. 그러나 이미 오랜 게릴라 전쟁에 단련된 북베트남은 미국의 폭격을 잘 버텨냈고.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자 백악관은 조급해졌고 1968년까지 병력을 계속 증파했어요.

 

급기야 베트남 주둔 병력을 50만까지 늘렸지만, 끝내 미국은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

북베트남 군대와 달리 미군의 사기는 나날이 꺾였고. 1968년 1월 21일, 북베트남군이 케산 지역에

주둔한 미군을 포위해 공습을 감행하자 미국인들은 디엔비엔푸 전투를 떠올리며 긴장했어요.

 

열흘 뒤 일어난 구정 공세는 반전 운동을 촉진했고 미국 지배자들이 승리를 포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미국 본토는 분열했죠. 이제 전선은 미국으로 옮겨졌는데. 거대한 반전 운동이 분출한 것입니다.

지배계급도 분열합니다. 미군 합참의장 웨스트모어랜드는 해임됐고 국방장관 맥나마라는 전쟁 중단을

촉구하다 쫓겨나죠. 대통령 존슨은 옛 친구 맥나마라를 세계은행 총재로 임명합니다.

 

이 때 존슨은 비아냥거리며 이렇게 말하죠.

"맥나마라는 이제 세계은행에서 군사적 우위가 왜 필요한가를 스스로 느끼게 될 것이다."

존슨은 은연중에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말해 버린거였죠. 1969년부터 전쟁은 사실상 의미가 없어집니다.

폭격은 지속됐고 전선은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확대됐지만 그것은 미국이 북베트남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을 따내기 위한 협박일 뿐이었어요. 그러나 북베트남은 굽히지 않고 계속 강경하게 미군 철수를

주장합니다. 결국 1972년 말 백악관은 마지막 협박을 감행하는데. 닉슨은 12월 18일부터 그 해 말까지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폭격을 감행했지요.

 

이른바 '크리스마스 폭격'입니다.

폭격 11일째인 12월 29일 하노이와 하이퐁에는 폭탄 10만 발이 투하됐고,북베트남 지도자 하 반 라우의

표현대로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5개에 해당하는 위력이었습니다" 베트남은 그래도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지친 미국은 1973년 1월 27일 평화 협정에 조인합니다. 미국이 패배한 것이죠. 미군이

철수한 뒤 북베트남은 아무런 저항 없이 2년 만에 남베트남을 점령합니다.

 

북베트남 군사 지도자 반 디엔 퉁의 생일이자 메이데이 85주년인 1975년 5월 1일 북베트남은 사이공을

함락시켰고 독립 전쟁은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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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언급된 "도미노 현상 억제 명분"과 "통킹만 사건"은 네이버 검색해도 나옵니다.

베트남 전쟁에의 한국군 참여는 정당한 전쟁 참여였다... 이런 무식한 소리들은 자제좀 해주세요.

미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총알받이로 내세워진 전쟁 참여였습니다. 그리고 박정희는 총알받이들

내세운 댓가로 돈 받아서 친일재벌 지원하고 꽁지받아서 부정 축재한 놈이고요.

 

아시겠습니까? 일제가 우리에게 했듯이...

베트남전 참전은 미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베트남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억압적인 군사적 행동이었다는

말입니다... 오래된 책이지만 베트남 전쟁의 성격이 무엇이었는지 알고싶다면, 베트남 전쟁의 게릴라

영웅 '구엔 반 봉'의 일대기를 그린 "사이공의 흰 옷" 한번 사서 읽어보세요.

 

왜 우리가 베트남 민족에게 죄인이어야 하는지 스스로 느끼게 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