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집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부모님께 인사 드리고 방에 들어와 가방을 던지고 
그리고 책상 위에 놓여있는 컴퓨터를 켜는 것이다.
"밥은 먹었냐?”라는 부모님의 물음에 건성으로 “배 안고파요”라는 시큰둥한 대답과 컴퓨터 부팅화면을 멍하니 본다.

 
시작프로그램들을 컴퓨터가 미처 읽기도 전에 나의 마우스는 Explorer창을 더블 클릭한다.
불과 1시간 30분전에 보았던 와우인벤 홈페이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7서버 게시판을 클릭한다. “후…오늘도 글이 없군” 하는 반사적인 생각과 함께 와우를 실행한다.
로딩시간조차 길게 느껴지는 이 적막한 시간. 
나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다. 가장 먼저 확인하는 길드 대화창. 

“길드 리하이”
“하이”. “파티님 하이” “파티님 메카 영던!!” “형 왔수?”
키보드의 O버튼을 눌러 다들 어디 있는지 확인한다.
5명 증기.. 4명 노역소.. 총 인원 12명..
다들 열심히들 하고 있다.

나는 샤트라스 점술가 은행구석에서 혼자 버프하며 아침에 보았던 내 인벤창을 다시 한번 본다. 그리곤 파티찾기 창을 살펴본다. 증기와 카라잔막공에서 암사제를 구한다.
지금 시간 오후 11시 40분. 둘 다 포기다.

길드 대화창으로 괜스레 얘기를 한다.
올라오는 답변들은 “ㅋㅋ” 이나 “^^”등으로 아주 짧은 답만이 있을 뿐 이다.
그들은 지금 바쁘다. 다들 인던이니깐.

무엇을 할까 궁리하다 낚시터로 장소를 옮기며 그들의 전멸소식과 아이템 얘기
또 누가 무엇을 먹었나 하는 글들을 본다.
그리곤 나도 살며시 반응을 해준다. 축하해주면서 한편으로는 놀리기도 한다.
10분 후 난 길드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내일 다시 보자는 말을 한다.
잠시 후 와우를 종료함과 동시에 나의 컴퓨터는 꺼진다..
이불을 펴고 자리에 누워 나는 웃으면서 눈을 감는다.


얼마 전 길드의 몇몇 사람들이 길드원 군입대를 핑계 삼아 오프모임을 가졌었다. 
하필 그날이 WWI하는 날이라 밤 늦게까지 일하느라 참석을 하지 못했었다.
꼭 보고 싶었던 얼굴이 있었고 처음으로 인사 나누고픈 사람들이 있었다. 
난 전화를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었지만 여전히 미안하기만 하다.
‘꼭 가고 싶었는데…’


이따금 길드 창으로 오프모임을 갖자는 얘기가 올라온다.
서울사람과 지방사람들이 섞여있는 길드라 마음만큼 뭉치기가 쉽지 않다.
또 다들 쉽사리 동의는 하지 않는다.
오프모임을 할 때마다 진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드마스터에게 미안하기 때문이다.
“조만간 꼭 하자구요” 라는 길드마스터의 말은 그래도 믿음직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얼마 전에 있었던 오프모임이 더 아쉬울 따름이다.


와우라는 게임을 통해 나는 처음으로 온라인 게임을 접했다.
그리고 난 와우를 통해 처음으로 길드라는 것에 가입했다. 
“Cross the styx” 내가 있는 길드 이름이다. 
지난 2년 동안 같이 게임하며 웃고 화내고 지내던 모임의 이름이다.


다른 길드처럼 거대하거나 서버를 대표할만한 길드의 이름은 아니다.
하지만 내게는 와우를 통해 만날 수 있었던 고마운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첫 취직을 하고, 어학연수를 가고,
다시 귀국하고, 다시 취직하던 나의 과거들은 이들과 함께 했다.
그리고 나는 몬스터를 첫 킬 하거나, 던전을 처음으로 공략했었을 때의 기억이 아닌
나의 실제 삶의 일부분에서 이들을 기억한다.
물론 지금도 나의 삶 중에서 이들은 많은 부분을 차치하고 있다. (그들은 절대 모른다. 하핫)


난 이따금 우리들이 와우를 하는데 있어서 길드가 얼마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어느 날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와우는 컨텐츠형 게임이라 커뮤니티의 비중이 다소 약할 수 밖에 없다고”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아니 수긍할 수 밖에 없다고 할까?
실상 길드로 인해 이루어지는 컨텐츠는 와우에선 찾기 힘들다.
기껏해야 길드 인던 아니면 공격대? 그게 다인가?


그렇다면 우리 길드도 그룰도 가고, 폭풍우니 불뱀이니 하이잘이니 검은 사원이니 
뭐 이런 곳에 같이 가고 싶다. 
아이템을 먹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컨텐츠를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픈 작은 욕심일 뿐이다.
에픽? 그 까짓 거 안 나와도 좋다.
그냥 몬스터의 화력을 길드 사람끼리 온몸으로 느끼면서 같이 전멸하고 싶은 생각일 뿐이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언제나 제한된 소수의 인원만이 그러한 것을 누릴 수 있으며, 남아 있는 우리는 
여전히 길드 창으로 “하이~”라는 말을 하며 이내 “할 게 없어…”라는 푸념을 놓아둘 뿐이라는 것을…


하지만 말이다.
길드사람끼리 꼭 인던을 가야만 뭔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어진 컨텐츠가 인던 뿐이라면 우리 각자가 길드만의 컨텐츠를 만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그 어떤 것이든 말이다.
얼라 호드 길드끼리 페랄라스 투기장에서 20명 vs 20명 붙어 보던가… 
한 길드에서 서버의 상권을 다 장악한다던가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도 좋다.
같이 해보는 것에 의의가 있는 거니깐…


나 뿐만 아니라 이 글을 보고 있는 사람들 모두 자신의 길드에 대해 어느 정도의 자부심과 
애착을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솔직히 난 우리 길드가 제일 좋다. 라는 생각을 자주 하는 사람이다.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고, 사람도 적고, 가끔 말다툼도 하지만 난 내가 우리 길드 사람이라는 사실이 아직도 뿌듯하다.
그리고 내가 와우를 하는 한 그들과 함께 할 것임을 난 계속 바래본다.


오늘도 접속한 그들과, 우리와, 그리고 나.
길드 창엔 서로에게 따스한 말 한마디와 격려를 나누면서 이 재미없다고 투덜대는 와우에서
사람냄새 풍겨가며 오늘은 잠시나마 길드원들과 진솔하게 얘기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