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4일 바다 건너 폴란드에서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위쳐2' 개발사인 씨디 프로젝트에서 공식 한글화 자막이 출시됐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위쳐2'는 2011년 5월 전 세계 동시 발매된 게임입니다. 2년이 다된 시점에서 한글화 패치를 해준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더욱 놀라웠던 점은 이 패치가 바로 국내 커뮤니티에서 제작된 유저 한글화 패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개발사 씨디 프로젝트는 "번역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며 "그들의 헌신과 노력이 없었다면 번역 자막 패치는 결코 출시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죠.

과거 PC패키지 게임의 한글화는 전적으로 유통사의 영역이었습니다. 하지만 국내 PC게임 시장이 좁아지면서 한글화 게임들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고, 이제는 유통사에게 한글화 게임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소식이 더 반가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음지의 능력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만든 한글화 패치가 퀄리티를 인정받아 개발사에서 인증한 공식 패치가 되었으니 말이죠.

'위쳐2' 한글화 번역과 검수에 참여한 종수(닉네임)님을 만난 것은 지난달 26일이었습니다. 종수님은 인터뷰를 위해 포항에서 서울까지 어려운 발걸음을 마다하지 않았는데요. 이자리에서 지난 2년간의 험난했던 번역 과정을 직접 들어봤습니다.

▲공식패치로 인정받은 위쳐2 유저 한글화 패치


■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2년...위쳐2 한글화 패치의 여정

처음부터 시작해보죠. 위쳐2 번역은 어떤식으로 진행되었나요.
일단 클라이언트를 분해해서 한글화를 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어요. 예전부터 기술지원은 DGEE님이 해주셨는데 대부분의 게임은 우선 DGEE님이 언팩한 다음 한글화를 할 수 있겠다고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번역인들을 초대해서 함께 진행하는 식으로 진행됐죠.

그럼 위쳐2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나요?
그렇죠. 2011년에 한글화 번역팀을 소집해서 조금씩 진행해 나갔어요. 70명까지 규모가 커지다가 중간에 개인 사정으로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20명 내외로 작업을 진행하게 됐죠. 그러다가 또 흐지부지됐는데... 한글화 작업이라는 게 보수를 받는 일도 아니고 온라인으로 하다 보니 결속력도 떨어지는 게 사실이거든요. 정말 책임감이 없으면 하기 힘들죠. 다른 한글화 팀들도 아마 마찬가지일 거예요. 거의 책임지고 계속 일을 끌고 나가는 사람은 카페장이거나 대부분 그렇거든요. 저희 같은 경우는 몇 번 흐지부지됐다가 몇 명 남은 사람 위주로 진행하게 됐죠.

그렇게 최후엔 세 사람 정도 남았나? 그마저도 한 명은 군대 가는 바람에 또 지지부진하다가 카페를 새로 만들고 '차라리 우리끼리 하자'고 해서 다시 진행하게 되었죠. 처음 있었던 카페는 아무래도 게임보다는 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카페다 보니 게임을 모르는 분들도 꽤 많았거든요. 그래서 다시 만드는 카페는 '위쳐2 커뮤니티'로 만들어서 유저를 모으고 이런 유저들을 대상으로 번역자를 초대하게 되었죠.

▲그렇게 탄생하게 된 위쳐2 커뮤니티(http://cafe.naver.com/twkor)


그 후 진행상황은 어떻게 되었나요?
2012년 1월 정도에 카페를 설립했는데 그때 진행상황이 70% 정도였어요. 중간 중간 베타버전 패치를 배포하면서 완성도는 높여가다가 중간에 위쳐2 터키 커뮤니티에서 만든 터키어 패치가 공식적인 언어팩으로 인정받은 것이 자극됐죠. 그게 지난해 4월이었을까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터키 커뮤니티에서 위쳐2 개발사 씨디 프로젝트 대표에게 직접 연락해서 공식 패치로 인정받았다고 하더라고요.

동기부여가 됐겠군요.
그렇죠. 형제의 나라 터키도 하는데 우리도 못할 게 없다고 생각했죠(웃음). 사실 위쳐2 한글화 패치는 개발사가 지원이 없었다면 거의 불가능했을 거에요. 언어 스크립트가 굉장히 엉망이었거든요. 저희가 4~5월에 개발사에 연락했는데 곧바로 NDA(비밀유지협약) 계약서가 오더라고요.

▲위쳐2 개발사 씨디 프로젝트의 협조를 통해 공식패치로 인정받게 된다


무보수로 하는 건데 계약서도 써야 하는 건가요?
아무래도 공식적인 지원을 받다 보니 개발사에서는 소스 유출을 우려한 거겠죠. 저희도 당연하다고 생각했고요. 계약서 내용을 보면 만약 소스가 유출될 경우 몇천만 원 가량의 벌금도 물게 되어 있었는데 서로 믿고 있었으니까요. 곧바로 사인하고 진행을 하게 되었죠.

계약하게 되면 구체적으로 어떤 이점이 있죠
가장 좋은 건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거죠. 원래 로컬라이징(한글화)는 유통사의 영역이잖아요. 당시 위쳐2 유통사가 반다이남코였는데 유통사가 (물론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만)마음만 먹으면 복돌이를 양성할 수 있는 주범으로 유저 패치 제작자를 매도할 수도 있고 소송도 할 수 있거든요. 그런 위험부담을 일단 덜 수 있고 무엇보다 개발사 측에 소스를 지원받을 수 있으니 일을 하기 정말 편해지죠. 정식 계약을 맺고 일을 하면서 씨디 프로젝트측에 메일만 200통 이상 주고받았던 것 같아요. 그쪽에서 답변도 성실하게 잘 해줘서 더 편하게 일을 할 수 있었어요.

번역하면서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요?
번역이나 검수하는 일도 만만치 않지만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가장 신경 쓰였어요. 솔직히 말하면 위쳐2의 스크립트가 한글화를 하기엔 부족한 게 많았어요. 지금도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곳곳에 눈에 띄는데 닭이나 돼지 등 가축 이름에 병사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도 있어요. 하나하나 다 손대서 완벽하게 만들고 싶은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스크립트로는 정식버전 출시까지 한계가 있었죠. 그래도 개발사 도움을 받아서 이 정도까지 온 게 다행이죠. 검수작업만 한 달 이상 걸렸는데 작업하면서 느낀 게 정식 한글화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작업이 필요한지 알게 됐어요.

▲스크립트 오류로 발생한 문제들이 아직 남아있다


■ 하나씩 배우면서 진행했던 위쳐2 한글화 과정

온라인에서 공동으로 번역하게 되면 문제점도 있을 것 같은데요.
네. 몇 가지 문제점이 있어요. 대표적인 게 한 사람이 주도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게 아니고 그 기간도 오래 걸리다 보니 초기 번역본과 뒷부분이 말투같은 부분이 묘하게 뉘앙스가 달라지는 경우가 생겨요. 아무래도 의역이 들어가다 보니 어쩔 수가 없는데요. 검수과정에서 하나씩 확인하고 짚어 줄 수밖에 없죠.

예전에는 구글 독스로 함께 작업하다 어떤 분이 무난하게 잘 된 번역을 자기 스타일대로 막 번역하고 가버려 당황했던 적이 있어요(웃음). 그럴땐 다시 바뀐 지점을 찾아서 복구하는 식으로 진행하고요.

검수하는데 원칙을 세우지 않으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관성이 있어야 하거든요. 예전에 온라인에서 논란이 되었던 것 중 하나가 '바스타드 소드(bastard sword)'에 대한 명칭 번역이었어요. 롱소드는 장검, 쇼트소드는 단검이라고 번역했다면 바스타드 소드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어원을 따져서 번역한다면 잡종검이나 사생화 검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면 과연 게이머들에게 의미 전달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드워프를 난쟁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엘프를 요정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늘 있었던 논란인데요. 번역자가 기준을 제대로 세우지 않는다면 정말 난처한 경우가 많죠.

갑자기 예전에 반지의제왕 온라인 한국 로컬때 아라곤의 직업인 스트라이더를 '성큼걸이'로 번역해 논란이 되었던 사건이 떠오르네요.
스트라이더가 걸음걸이를 표현하기도하는데 다른 뜻도 많거든요. 예전에 TV방송에서 반지의제왕을 번역할 때 미들어스를 '지구'로, 빌보 배긴스를 '골목쟁이 빌보'라고 하기도 했어요.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떤식의 번역이든 오락가락하지 않고 분명한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종수님은 어떤 번역이 가장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음... 글쎄요 어려운 질문인데요. 제 개인적으로는 의미 전달이 되고 뉘앙스를 잃지 않은 번역이 좋다고 생각해요. 직역이든 직역이든 뭐든 다 쏟아부어서 그 인물이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짚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좋은 번역을 위해 욕심도 생길 것 같은데요. 에피소드 같은 건 없었나요?
위쳐2 게임 장면 중에 온천욕을 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때 주인공 대사가 직역하면 "너 좀 씻어야겠다"라는 말이었는데 그 대사를 좀 더 느낌을 내고 싶어서 "너 때 좀 밀어야겠다"라고 넣고 싶었어요(웃음). 물론 그렇게 안 넣었어요.

▲게임을 하다보면 '찰진' 표현들도 눈에 띈다


번역과 검수를 하시면서 개인적으로 위기였던 때는 언제였나요?
위기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힘들었던 때가 있었어요. 소설 '바이오쇼크' 번역할 때였는데 그때 제가 위쳐2에 한참 빠져있을 때 였거든요. 바이오쇼크도 물론 매력적인 세계였고 보수를 받고 하는 일이기 때문에 가장 급한 거였는데 두 세계를 오가며 번역을 하다 보니 정말 어려웠어요. 특히 바이오쇼크는 1인칭 게임이다 보니 플레이하는 게 힘들기도 했고요. 제가 1인칭 게임은 울렁증 같은 게 있어서 오래 하다 보면 멀미가 나거든요. 그렇게 3~4주 정도는 밤에는 위쳐의 세상에서 낮에는 바이오쇼크 세상을 오가며 지냈죠.

위쳐2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매력적인 건가요?
음... 게랄드의 엉덩이요? 탱글탱글한 게 살아 있잖아요(웃음). 위쳐2 세계를 보면 참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매력이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남자 캐릭터는 다른 게임에 비하면 그리 잘생긴 얼굴은 아니잖아요. 근데 뭐랄까요. 흡입력이 있다고 할까요. 그 세계에 참 잘 어울리는 캐릭터들인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블루 스트라이프의 부대장 버논 '로치'라는 캐릭터인데요. 어수룩해 보이는데 무인처럼 보이는 형상을 굉장히 잘 묘사했어요. 로치 관련 스토리도 상당히 매력적이고요. 위쳐의 매력은 세계관이나 분위기가 아니라 캐릭터 그 자체에요.

가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한글 번역에 대해 불만을 품는 사람들도 눈에 띄는데요. 나름대로 고생해서 번역했는데 악플이 올라오거나 그러면 서운하진 않으신가요?
사실 그런 것 때문에 상처 입고 관두시는 분들도 많아요. 정말 요점을 딱 짚어내시는 분들도 있는가 하면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를 하거나 그저 욕만 하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그럴 땐 슬프죠. 저는 그나마 책으로 번역을 해봤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에 있어서는 좀 면역이 생겼다고 할까요(웃음). 어차피 좋은 번역을 내는 것이 목적이라면 좀 더 꼼꼼히 귀 기울이고 적건 많건 검수과정을 거쳐서 조금이나마 완벽한 퀄리티를 내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물론, 정말 한글화 작업하시는 분들을 위한다면 비난보다는 응원이 필요하고요. 직접 참여하시고 피드백을 주신다면 일하시는 분들이 정말 수월하죠.

오늘 이야기를 다 듣고보니 게임을 참 좋아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외에서 공부하면서 게임을 처음 접했어요. 그때 공부도 하고 직장도 다니면서 일도 하고 그랬는데 굉장히 힘이 들었던 시기였거든요. 주위에 아는 사람도 없어서 대화하기도 힘들었고, 그런 시기에 온라인게임을 접하게 됐어요. '쉐도우 베인'이라는 게임이었죠. 벤젠스 서버에서 했는데 그때 미국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고 중동에 파병나간 군인들이 이 게임을 굉장히 많이 했던 걸로 기억이 나요.

그때 삶의 즐거움을 찾았던 것 같아요. 그 이후에는 발더스게이트, 에버퀘스트, 벵가드, 반지의제왕온라인 등 여러게임을 즐기면서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앞으로도 번역 작업을 계속 하실 생각이신가요?
아직 부족하지만 이제 직업이 되어버렸죠(웃음). 현재도 엘더스크롤 소설 번역일을 하고 있고요. 위쳐3도 매우 기대하고 있어요. 돌이켜보면 위쳐2 번역이 제게 많은 기회를 줬던 것 같아요. 덕분에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날 수 있었고요.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좋은 분들과 함께 일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