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던 암살자는 이제 바다를 꿈꾼다. 지난 11월 출시된 '어쌔씬크리드 4: 검은 깃발(이하 AC 4)' 의 주된 컨셉이다. 단순한 노략질과 살인만 줄창 해왔던 우리의 암살자는 자유를 찾고자 자신을 숨겨주던 어둠을 벗어나 바다로 뛰어든다.

해상전이라는 새로운 컨텐츠와 더 방대해진 세계관으로 무장한 AC 4는 유저들에게 격한 기쁨을 안겨주기 충분한 게임이었다. 당장 인벤에서만 보더라도 한정판 즉시 구매하고 눈물 젖은 라면과 풀 몇 점으로 점심을 때우던 기자도 있을 정도다(그는 아직도 건강을 핑계삼아 풀만 뜯고 있다).

적 함선을 때려 부수고 대포 빵빵 쏘고, 기지 차지하고...AC 4이 잠입액션의 대표 타이틀로 손꼽히는 '어쌔씬크리드' 의 후속작인건 뭐...그렇다 쳤다. 암살자라고 배 못 타리란 법도 없고, 죄없는 사람들의 주머니를 그만큼 탈탈 털어댔으면 웬만한 배 한 채는 지을테니까.

그런데 아무리 봐도 '어쌔씬크리드: 파이러츠' 의 주인공은 어쌔씬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기에는 너무 해적스럽기만 하다. 그냥 '캐리비안의 도적' 정도가 가장 괜찮은 이름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은밀한 잠입과 매의 눈처럼 날카로운 암살따위는 온데간데 없이 대포나 쏘고 배나 고치는 해적 '알론조' 에게 암살자라니. 뭔가 잘못됐다. 한참 잘못됐다.

오늘 자 달러 시세대로 하면 점심 한 끼 두둑히 챙겨먹을 6,300원을, 단지 '어쌔씬크리드' 란 이름만으로 지출한 기자는 울부짖었다. 육지와 바다를 종횡무진하며 하나 둘 적을 처치하는 쿨시크한 어쌔씬을 기대했더니 웬 늙수구레한 해적과 하얀 돛 함선만 진탕 나온다.

그러고 10분 후, 생각은 180도 바뀌었다. 6,300원 이상의 값어치다. 비록 잠입액션의 손떨리는 재미는 없지만, 그보다 더 한 환상적인 경험이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 날카로운 턱선의 미남 암살자를 기대했건만, 털북숭이 중 2병 뜨내기 선장이 등장
모토는 "영국 해군따윈 강아지나 주라지, 난 해적왕이 될꺼야!"





'어쌔씬크리드 : 파이러츠' 는 AC 시리즈 특유의 한정적 오픈월드 게임 디자인을 가져왔다. 자유도 높은 심리스 오픈월드 게임에 익숙한 유저들이라면 "이게 무슨 오픈월드냐!" 라고 혹평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바일게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오히려 AC 시리즈 특유의 오픈월드 구성은 실로 적절하다. 모바일게임 내에서 심리스 오픈월드를 구축했다가는 탐험은 커녕 게임 지연으로 종료버튼이나 누를 것이다(게임 지연은 안되는데, 실행 시작 화면부터 멈추는 일은 종종 있으니 참고하라).

'어쌔씬크리드 : 파이러츠' 의 이동은 한정된 구역내에서 이뤄지지만 이 안에서 발생하는 임무나 항해, 약탈은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해놨다. 자유롭게 항해하다 어느 정도 물자가 모이면 다른 구역으로 떠나면 된다. 거기다 편의성을 보강하기 위해 항해를 대체할 수 있는 맵 내 간단 이동 기능까지 마련해두었다.

항해 자체는 합격점. 조타를 이용한 방향전환도 굉장히 부드러울 뿐더러, 배의 움직임도 상당히 경쾌하다. 거기다 돛을 펴고 접으며 속도도 조절할 수 있는데다, 빠른 속도로 항해할 때 카메라 연출을 이용해 속도감을 눈으로 직접 보여주기 때문에 항해의 묘미를 잘 전달하고 있다. 유비소프트도 항해 시스템의 완성도는 자부하는지, 항해를 이용한 컨텐츠를 상당 수 마련해 두었다.

조금 실망했던 점이라면 기대했던 해양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손에 땀을 쥐는 격추전이 될 거라 예상했는데 쿵짝쿵짝 오른쪽 왼쪽 공격, 공격, 회피, 공격 버튼이나 누르고 있는 것이 흡사 박자 맞추기 게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음, 정확히 말하자면 전투의 단순함은 공격, 방어, 반격 정도 밖에 없는 '인피니티 블레이드' 의 전투 시스템과 비슷하다. 컨트롤을 통해 전투에 승리하거나, 불뿜는 대포와 침몰하는 군함의 모습에 희열을 느끼고 싶은 유저라면 다른 게임을 찾아보는 걸 추천한다.







게임은 전반적으로 매우 지루하게 흘러간다. 신경 곤두서는 긴장감도 없고, 승리했을 때의 쾌감도 없다. 이 게임의 최대 묘미는 그런 데서 오는 게 아니다. 바로 게임 전체를 '감상' 하는 데서 온다. 햇살 내리쬐는 바다의 반짝이는 일렁임이나 노을빛으로 붉게 물든 돛, 항해 중 이따끔 선원들이 부르는 여유 넘치는 노래와 함께 주인공 알론조가 펼치는 프로젝트인 "나는 해적왕이 될꺼야" 스토리까지...온통 감성 돋는 컨텐츠 천지다. 해상전이나 퀘스트는 모두 '감상' 을 위한 부가적인 컨텐츠일 뿐이다.

'어쌔씬크리드 : 파이러츠'는 AC 4의 세계관을 활용한 스핀오프(Spin-Off)라지만,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신작 출시를 기념한 유비소프트의 자축 타이틀(?)이 아닐까 한다. 세계관은 비슷할 지언정 게임 진행이 단순하고 잠입액션이라는 특유의 컨셉은 볼 수 없다. 그 대신 감성 돋는 영상과 해상전, 오픈월드에서 펼쳐지는 자유로운 항해가 조화롭게 맞물려 여유로운 플레이를 지향하는 어드벤처가 되었다.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이 없으면 어떠랴. AC 4를 해 본 유저라면 '액션 밖에 모르던 유비소프트가 이렇게 여유로운 감성도 지니고 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기존 시리즈를 모르는 유저들이라도 '어쌔씬크리드 : 파이러츠' 가 주는 감성에 흠뻑 취할 수 있을 터다.

"호쾌한 타격! 넘치는 액션! 불타는 열정!!!!!"만 부르짖으며 빠르게 진행되는 최근의 게임 트렌드와는 정말 동떨어진다. 기존 어쌔씬크리드 시리즈의 컨셉과도 다르다. 그러기에 추천한다. 힐링이 필요한 일상 속에서 여유넘치는 항해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감히 얘기하건데, 6,300원이 절대 아깝지 않을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