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해골의 비웃음이 한가득 느껴지는 게임오버 화면을 처음 만난 그 순간, 일단 분노가 먼저 튀어나왔다. 이어서 세이브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그저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물론 '위험한 동굴'이라고 뻔히 써있는 곳에 들어갔던 건 분명 내 잘못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봐도 초반인 곳의 던전에서 단 한 방에 전멸을 당할 거라곤 짐작도 못했다. 그나마 똑소리 나게 개편된 오토 세이브 시스템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첫 날부터 게임 할 맛이 바닥을 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참을 볼멘소리로 투덜거렸지만 그렇다고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 하긴, 생각해보면 마이트 앤 매직 시리즈는 원래부터 이랬다.

별볼일 없어 보이는 임무 하나를 수행하기 위해 흥신소 직원처럼 해당 지역 전체를 이 잡듯 뒤져봐야 했고, 그러다가 마주친 적 한 무리(심지어 보스급도 아닌)에게 영혼까지 탈탈 털려도 이상할 것이 없었던 세계. 요즘 게임 컨텐츠를 말할 때 쓰는 표현으로 하자면, 한없이 '불친절'하고 '어려운', 마이트 앤 매직은 원래 그런 게임이었다.

불과 이틀 사이에 세이브만 200회 이상. 전멸을 당하거나 불러오기를 선택해야 했던 것도 열댓 번은 족히 된다. 그래, 원래 이렇게 삽질(?)해가며 진행하는 게 묘미인 게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냉수 한 잔 들이키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는다. 자, 정신 바짝 차리고 다시 시작이다.

얘네가 위험하다 그러면 진짜 위험하다는 의미다.
진짜로, 찍고.


...허허허허허허허허허, 그저 웃지요.


마이트 앤 매직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1인칭 시점에 리얼타임 이동방식을 지향해왔다. 전투 방식에 있어서는 일부 시리즈에서는 리얼타임 모드와 턴 방식 모드 중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작에서는 두 가지를 확실히 분리, 이동방식은 리얼타임(한 걸음 당 게임 내 시간 2분)에 전투방식은 턴제를 채택했다.

플레이어가 조작하게 되는 파티원 수에도 몇 차례 변화가 있긴 했지만, 이번 작에서 다시 4인 파티로 고정됐다. 각 구성원의 클래스와 스탯, 특성을 선택해 성장시키고 모험과 전투, 스토리 진행을 해나가는 지극히 고전적인 방식의 RPG.

이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고전 룰을 많이 따르고 있는 만큼 최근 출시된 게임들처럼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부분은 그리 많지 않다는 점. 쉽게 말하면, 혈압 오르기 쉽다는 뜻이다.

요 며칠 동안 겪었던 에피소드들을 풀어놓으려면 밤을 꼬박 새도 모자라겠기에, 최대한 줄이고 줄인 객관적 감상들만 전하고자 한다.


Point 1. 멀미 유발하던 이동방식은 안녕


몇 개월 전, 아직 앞서 해보기(Early Access) 상태일 때 '마이트 앤 매직 10: 레거시'를 잠시 플레이 했었다. 타일 방식의 맵 구성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뚝뚝 끊기는 현상이 아주 일품(?)이었다. 불과 10분 만에 머리가 지끈거려 쉴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초반 두 번째 던전인 티리아 만 등대까지 진행하는 데만도 꼬박 하루가 걸렸던 기억이 난다.

정식 버전에서 이 끊김 현상은 눈에 띄게 개선됐다.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건 턴제 기반 RPG를 염두에 둔 타일방식 월드 구성의 한계이리라. 대략적으로 비유하자면 한 걸음 걸을 때마다 1~2프레임 정도씩 멈추는 듯한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WASD 또는 방향키를 이용한 조작법도 요즘 게임들의 트렌드를 고려하면 익숙한 모습이다. 한 가지 낯선 점은 소위 게걸음이라 불리는 옆걸음질 키가 A/D, 카메라 방향을 바꾸는 키가 Q/E로 설정되어있다는 것. 실제로 조작해보면 일반적으로 접하던 이동방식과 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뭐, 사실 크게 불편하지는 않고 적응하는데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지만.

기본 시스템이라는 것은 언뜻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는 내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게 마련. 그런 점에서 첫 단계는 일단 합격점이다.

왈도는 이제 시리즈 전체를 넘나드는 유명 인사가 된 듯하다


내가 너무 진지한 건 맞는 말인데... 그래도 너보단 재밌을 거 같아.
※ 이 녀석의 '안 웃긴' 농담이 잘 안 보인다면 클릭. 주의: 정말 안 웃김.


Point 2. 그래픽, 고전의 추억과 최첨단 기술 사이를 방황하다


10여 년의 공백을 깨고 후속 작품이 나왔다는 사실에 콩깍지가 씌었었나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래픽이 자꾸 눈에 밟힌다. 거의 항상 보일 수밖에 없는 파티 멤버들의 얼굴이라든가 수없이 뒤적이게 되는 스킬북 아이콘 등은 확실히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시야에 보이는 지형지물이나 배경은 여전히 투박함을 벗지 못했다. 마치 2000년대 초,중반 즈음으로 타임워프한 기분이랄까.

장담하건대, 최근의 기술 추세를 보면 더 좋은 그래픽으로 내놓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건 어떤 이유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만약, 프로젝트에 할당된 인력이나 비용, 혹은 시간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다른 방향에서 생각하자면, 바로 전작인 9편의 느낌, 그리고 시리즈 전체의 느낌을 완만하게 계승하기 위해 일부러 그랬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 솔직히 좀 비약일 수도 있음은 인정한다. 그래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얘기는 아니다. 전작과의 사이에 10년이 넘는 공백이 있었던 만큼, 갑자기 너무 확 달라진다면 시리즈 고유의 색깔이 바래질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테니까.

이유야 어쨌건 간에, 그래픽 관련 부분은 많은 의견이 엇갈릴 듯하다. 특히나 게임을 볼 때 그래픽에 많은 비중을 두는 유저라면 애초에 입맛이 당기지 않을 수도 있다. 전통적으로 마니아들을 많이 거느린 시리즈이니만큼 실제로 영향이 크지는 않을 거라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한 화면 안에 2000년대 초반과 후반이 함께 존재하는 느낌이다.


뭐라? 지금 내 눈 앞에 쏟아지고 있는 이게 '얼음폭풍'이라고라?


Point 3. 전투 난이도, 도전 욕구를 콕콕 찌르다


앞서 해보기 버전을 통해 초반을 잠깐 해봤을 뿐이지만, 그때부터 이미 정식 버전을 꼭 해보고 싶다는 욕심은 충만했다. 일단 전체적인 첫 인상이 괜찮았고, 여기에 추억이 서린 시리즈라는 사실 더해져 미치도록 끌리게 만들었다고 할까.

결코 쉬운 게임은 아니다. 그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특히나 온라인 게임들을 위주로 즐기던 유저라면 이 게임, 상당히 까다롭게 느껴질 것이다. 반대로 이 시리즈를 경험해봤던, 혹은 하드코어한 게임들을 많이 즐겨봤다고 자부하는 유저들이라면 충분히 해볼만할 것이다.

성가신 상태이상을 계속 거는 몬스터, 평타 한 방 스킬 한 방이 강력해서 단 한 턴만 꼬여도 곡소리 나올 몬스터, 끊임없이 회복주문을 쓰며 바퀴벌레처럼 버티는 몬스터 등 색다른 패턴의 전투가 불규칙하게 등장한다. 게다가 결코 웃어넘길 수 없는 수준의 몬스터들도 종종 도사리고 있어 항시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각 파티원들이 가지고 있는 수십 종류의 기술들. 이번 턴에는 어떤 멤버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 극악이라 부를 정도는 아니지만, 만약 매 전투마다 최상의 효율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사람에 따라 체감하는 난이도는 달라진다. 진행하던 전투를 포기하고 불러오기를 누르거나 승리를 거두자마자 세이브 버튼부터 누르는 습관. 이젠 너무도 자연스럽다.

스페이스 바를 누르면 마법 스크롤이 튀어나올 것 같다.
근데 안 나온다...ㅠ.ㅠ


와... 왓 더... 유리몸 마법사 따위는 한 주먹이라는 거냐


Point 4. 오랜만이야... 이토록 불친절한 퀘스트라니...


'불친절한' 퀘스트 방식도 개인적으로는 훌륭한 컨텐츠라고 본다. 어느 지역에서 누구를 찾아라. 어느 던전을 찾아가 누구를 처치하라. 달랑 한 마디 던져주는 것 외에 아무런 단서가 없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말부터 튀어나오는 건 당연한 현상이다.

정보 수집부터 임무 해결까지 모든 과정을 유저에게 맡겨버리는 방식을 오랜만에 접하니 답답함에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목표 달성을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도록 만드는 짜임새는 스스로 세계관을 파악해나가는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됐다.

일단 해당 지역의 구석구석을 뒤져본다. 마을이라면 NPC들이 곳곳에 있을 것이고, 일반 필드라면 어딘가에 단서가 존재할 것이다. 이 과정을 겪다보면 '대체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어느 정도 해소된다. 기존 시리즈를 완벽히 섭렵하지 않았다고 해도 대략적인 흐름을 알 수 있다고나 할까.

무엇보다도, 스토리텔링 측면에서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닌 직접 이야기를 짜맞춰가도록 하는 것은 좋은 방식이다. 물론, 답답함과 짜증을 유발하는 부작용이 꽤나 심각할 수 있으니 앉은 자리 주위에 집어던질 만한 물건은 미리 치워두는 편을 추천한다.

상자를 열고 싶나? 선택지 따위 없는 주관식 퀴즈를 풀어라.
고전RPG의 위엄.quiz


그나마 오벨리스크 컨텐츠는 매우 구체적인 단서를 주는 편이다.


Point 5. 굿바이 활, 이젠 너를 보내주려 해


리얼한 판타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 정도 표현이 딱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처음 시작한 지역이니까 해볼 만한 녀석들만 있겠지'라는 생각은 일찌감치 접어두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뭐, 세상을 살다 보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시련도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 한 번 쓰러뜨린 몬스터를 같은 곳에서 다시 만날 일이 없다는 건 그나마 감사한 일이다. '몬스터는 좋은 골드 공급원이죠'라는 측면에서 보면 아닐 수도 있지만.

이번 타이틀에서 과연 '무적'이라 불릴 만한 방법이 있을까. 시리즈의 전통처럼 이어져왔던 활&석궁의 효율성도 이번 작에서는 처절하게 추락했다. 글쎄, 레인저 류의 클래스를 파티에 포함시키고 주력으로 키운다면 여전히 어느 정도 쓸만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예전처럼 '절대진리'라든가 '필수스킬'이라는 느낌은 아니다.(타이틀 명은 분명 '힘과 마법'(Might & Magic)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법이 훨~씬 좋다) 아마도 이번 작에서는 '레벨이 깡패'라는 것 이외에 정해진 공식은 없을 듯하다.

예상하지 못한 패턴의 몬스터를 만나 좌절을 겪고, 공략법을 연구해 다시 도전하는 근성.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 높은 미스(Miss) 확률 때문에 치밀한 계산 따위 집어치우고 운에 기대도록 만드는 '될대로 되라' 마인드. 그 모든 게 마이트 앤 매직 시리즈의 매력이다.

레벨에 맞지 않는 던전인 줄도 모르고 뛰어들었다가 '해골 화면'을 영접하더라도, 멍하니 필드를 배회하다가 마나가 바닥인 채로 상태로 전투상태가 걸려 세이브파일 로드를 하더라도, 매일매일 조금씩 다른 성취감이 있다는 것은 굉장한 묘미다. 조언 하나 하자면, 습관성 세이브 증후군 정도는 기꺼이 걸려주는 게 좋다.

극초반 게임오버 이후 바로 찾아온 습관성 세이브 증후군.
저장의 중요성을 절실히 담은 파일명이다


따져보면 그리 좋은 아이템도 아니다.
클릭 한 번 삐끗했다간 바로 알거지 신세




'마이트 앤 매직 10: 레거시'. 아직 일주일도 채 안 됐지만, 추천하고 싶은 타이틀이다. 물론 기다린 시간을 고려하면 아쉬운 점이 너무 많이 박혀있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게임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만약 하룻밤만 투자해도 어느 정도 고레벨이 될 수 있는 온라인 게임에 익숙한 유저라면 손대지 않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른다. 빠르고 명쾌한 게임 진행을 원하는 유저라면 구입을 누르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길 바란다. 24.99달러(Standard Edition 기준)라는 돈을 단순한 모험심으로 날리기엔 아깝지 않은가.

몬스터 리젠이라는 개념이 없는 만큼, 한 지역에서 노가다를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강해지겠지, 라는 근성 마인드는 이 게임에서 통하지 않는다. 한정된 골드와 소모성 품목들을 조금이나마 넉넉하게 챙기길 원한다면 맵 구석구석을 빠짐없이 뒤져가며 숨겨진 상자들을 찾아내는 수고 쯤은 생활화되어야 한다.

고백하자면, 이 게임을 며칠 하면서 끓어오르는 화를 삭힌 적도 많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비속어를 읊어댔던 적도 있다. 한때는 근성과 탐구정신으로 열심히 파고들던 시리즈였는데,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10여 년의 공백기 동안 너무 쉬운 게임들만 접해왔던 걸까.

아마, 리뷰를 쓰고 나서도 당분간은 공략에 매달릴 것이다. 아직 너무 초반이기도 하지만, 그 동안 너무 무뎌져 버린 인내심과 문제 해결능력을 다시 되살리고 싶어서다. 언제쯤 끝날지 기약할 수 없는 모험이긴 하지만, 뭐 어떤가. 처음 맞이했던 때의 반가움을 아직 기억하고 있으니, 시간을 두고 진득하게 즐겨볼 만하지 않을까. 순간의 오기와 분노로 손을 놓아버린다면 왠지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으니 말이다.

스팀 리뷰 코너에 올라온 추천 글 중 하나.
M&M 3~5편, 위저드리 시리즈를 즐겼던 유저라면 취향에 맞을 거라고


한글화 해준 건 감사한 일이지만 이런 어색한 이름은 좀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