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사이에 두고 양 옆에 한 남자와 여자가 서 있다. 남자의 한 손에는 자몽을, 여자의 한 손에는 레몬을. 눈치 빠른 사람은 오래 전 CF의 한 장면을 떠올릴 수도 있다. 일단, 그냥 가보자.


둘은 서로 바라보다 결국, 다가가 애틋한 키스를 나눈다. 꽤 달콤하다. 순간, 대단한 발견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하지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녀석들의 결합 때문일까 어딘가 불편한 맛을 낸다.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쌉사름한 맛은 전체로 퍼져 둘이 간직한 고유한 맛의 영역까지도 침범한다.


한낱 나른한 오후의 상상에 불과하거나 CF의 한 장면만은 아니다. 바로, MMO (RPG적 요소라는 의미가 강한)와 FPS를 결합해서 애매모호와 신선함이 뒤섞인 도저히 알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는 헉슬리의 현재 모습이다.






그래서, 헉슬리를 바라볼 때는 우선 가상의 경계선을 그려놓고 MMO와 FPS를 서로 분리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MMO+FPS라는 시도가 아직까지는 우리에게 생소하기도 하며, 아직까지는 헉슬리 전체가 주는 이미지가 상당히 흐려, 자치 커다란 오해와 착각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온 몸에 긴장을 풀면서, 우선 하이퍼 FPS 헉슬리가 초대하는 치열한 배틀존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보자.







헉슬리의 배틀존, 즐거움과 난해함의 교차로.


헉슬리의 배틀존에 입장하려면 쉽지 않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나중에는 길어진 대기열에 따른 보완책으로 긴급전장도 생겨났지만 입장해보면 배틀존에 혼자 뚝 떨어져 있는 등, 다양한 불편을 겪어야 했다.


이는 1차 클로즈 베타테스터의 인원이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이유 중에 하나지만, 사피엔스와 얼터너티브 두 종족 간 인구불균형에 기인하는 바가 컸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사피엔스와 얼터너티브의 차이는 마치 WoW에서의 얼라이언스와 호드의 관계와 매우 유사했다.


아름다운 캐릭터 VS 덜 아름다운 캐릭터, FPS에 생소한 신규 유저 VS FF테스트를 통해 헉슬리를 미리 접한 유저, 오직 밀리터리 FPS만 하던 유저 VS 하이퍼 FPS 매니아 유저, 등등.






1차 CBT에서 섣부른 걱정은 하지 말자며 스스로를 달래고, 배틀존에 입장해서 주위를 둘러보니 다름아닌 별천지가 펼쳐진다. 국내 게임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높은 퀄리티의 그래픽에 놀란다. 그리고 이 곳이 바로 전쟁터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맵의 경계선까지 냅다 뛰어 본다. 맵 가장자리와 멀리 보이는 배경까지 세밀하고 꼼꼼하게 처리했다며 칭찬하는 순간, 뒤통수에 적의 로켓포가 작렬.


화면 중앙에는 쉴드가 사라졌다는 메시지가 뜨고, 캐릭터는 그 충격에 허우적댄다. 도대체 어디지? 대미지 표시를 통해 적을 발견하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사이 어디선가 한방의 로켓포가 다시 날아와 나를 완전히 쓰러뜨린다.






게임진행 만큼이나 리스폰은 꽤 빠른 편이다. 시각과 청각을 총동원해 주위 상황을 파악하려 애쓴다. 탄창은 미리 획득하거나 따로 구입하는 게 아니고, 배틀존 안 전략적 요충지에 놓여진 탄창으로 충전하는 방식이다. 때문에, 적을 바로 앞에 두고 총알이 모자라 억울하게 바닥을 보기도 했고, 탄창을 충전하다 적에게 둘러싸여 비참한 최후를 맞기도 했다.


죽고, 리스폰 되기를 반복하면서 차츰 전체 맵을 파악해 간다. 나름대로 전체 맵 디자인이 훌륭한 편이다. 탄창과 전략 요충지, 그리고 자원 리젠 때문에 비교적 넓은 지형이지만 적과의 조우가 빈번하다. 밀리터리 FPS만을 즐겨오던 몇몇 유저들은 뭐이리 맵이 넓냐며 불만을 터트리기도 했지만.


사운드는 전체적으로 크고 시원시원하게 들리는 편이지만, 무기에 따른 발사 소리가 뚜렷하지 않고 거리와 방향 차이를 짐작하기가 힘들다. 즉, 청각으로 적의 움직임을 예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퀄리티는 인정하지만, FPS 게임 플레이와 함께 맞물리지 않는다는 의미다.


킬(Kill)수는 어느새 적인 얼터너티브와 3배 이상 차이가 난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선 맵을 파악한 후, 우리팀 유닛들의 특징에 맞는 전술을 사용해야 한다. 적들은 이미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스쿼드에 가입 조차 잘 하지 않는 우리팀과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결국, 게임은 끝났고 도시로 복귀한 사피엔스 유저들은 혼란스럽다.






무참하게 패배한 것이 억울했던지 장비, 직업별 특징, 스킬 등 헉슬리의 주요 시스템들을 차근차근 살펴보고 있는 이들도 있고, 게임이 왜이리 어렵냐며 화를 내는 이도 있다. 혹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헉슬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유저도 있었다. 헤드샷을 노리고 수십 발을 발사해도 적이 죽지 않고 오히려 내가 죽었다며 절규하던 유저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신선한 재미와 난해함이 교차하는 분위기에서 일부는 직업간 밸런스에 의구심을 나타내면서도 전장을 신청하고 다시 기다렸고, 나머지는 FPS가 아닌 MMO, 즉 퀘스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사피엔스의 도시 노스탈로니아, 육상수송부대 앞은 이렇게 혼돈이 지배했었다.







거대한 도시와 퀘스트, 화려함에 비친 공허함.


일단 사피엔스와 얼터너티브의 대도시 노스탈로니아와 에스카는 '大'라는 말 그대로 무진장 넓다. 전장에서의 화려한 그래픽도 그대로 이어간다. 다양한 반사효과와 하이 퀄리티의 텍스쳐로 무장한 건물들. 바라보고만 있어도 눈이 즐겁다. 지나가던 누구는 외산 패키지 게임과 비교하기 까지 했으니 얼마나 위대한 발전인가?


퀘스트를 하려면 NPC를 만나야 하는 법. 이때부터 고난은 시작된다. 거대한 도시의 곳곳에 퍼져있는 NPC를 만나기 위해서는 이리저리 헤매야 하는데, 트랜(전철과 비슷한 공중탈 것)은 지정된 경로만을 다녀서 성에 차지 않고, 대부분 두 발로 직접 뛰어다녔다.






머리에 무전기 아이콘을 표시한 NPC 찾아 삼만리. 결국, 몇몇을 찾아내고 퀘스트를 받아도 혼자 할 수 있는 퀘스트는 몇 개 없다. 거의가 '협동', 즉 2~4명의 스쿼드로 수행해하는 퀘스트다. 여기에서 고난에 이은 좌절이 급습해 온다.


만나본 대부분의 유저들은 혼자 수행하다, 수십 번을 죽기를 반복하거나, 이유 모를 접속종료 현상에 그로깅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나중에는 패치로 조정되었지만, 역시나 너무 난이도가 쉬워지는 반대 현상이 일어나 장기적인 측면에서의 밸런스 문제를 심각하게 걱정하게 만들었다.






혼자서 수행할 수 있는 독립퀘스트는 조금 재미있어 질만하면 끝나버리는 허탈감을 안겨준 반면, 4인 스쿼드 퀘스트는 볼륨도 상당하고, 차량을 이용해 몬스터를 뚫고 경로를 확보하는 등 마치 XBOX360 대작 FPS인 '기어스오브워'의 미션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퀘스트 진행 도중에 간간히 팁과 이동경로를 알려주는 메시지는 매우 친절했고, 퀘스트 인스턴스 내부 디자인은 배틀존의 퀄리티를 그대로 이어가는 듯해 대체로 만족스러웠으나, 몬스터 형태와 공격 패턴의 단조로움은 퀘스트 플레이 전체를 '밋밋'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단지 퀘스트를 중심으로 이야기했지만, 지금 분위기는 헉슬리의 MMO 전체적인 부분에까지 만연해 있어, 거대하고 장엄한 느낌을 주던 헉슬리의 대도시는 시간이 흐르면서 생동감이 결여된 단순한 텍스쳐 덩어리로 보일 뿐이었다. 지루하고 평이하다는 감정이 신선하고 재미있다는 평가를 완전히 뒤덮어 버리기 때문이다.



훌륭한 그림 '헉슬리'에 눈동자를 그려 넣다.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쌍둥이 빌딩을 한번 상상해 보라.

가장 처음에 건물의 설계도를 꼼꼼하게 그리고, 그 설계도에 따라 건물 하나씩 차례대로 뼈대를 완성해 나갔으리라. 아직 앙상한 철골만 있을 뿐이지만, 도심 한 가운데에 거대한 건축물이 유사한 형태로 함께 존재하고 있는 모습은 누구에게는 그 자체만으로도 묘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반면, 다른 누구에게는 미완성이 만들어내는 심한 불쾌함을 안겨줄 수도 있다.


헉슬리 지금 모습을 이 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인벤 프로테스터들과 함께 테스트를 진행하며 보고, 들은 헉슬리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버그와 오류, 최적화 문제 점 등을 이 글에서 언급하고도 싶었지만, 거대한 건축물을 설계하고 건설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소한 문제점들은 아직 "건설 중", 즉 1차 클로즈 베타테스트 인 것을 감안한다면 아무 문제도 아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일단 MMO와 FPS라는 각각의 건물 자체를 결함 없이 완성해는 것이 우선 시 되야 하며, 그렇게 완성된 결과물은 본래 기능인 '재미'를 제공해야 한다. 그렇게 정상적으로 생산된 '재미'가 '두 장르의 이색적인 결합'이라는 함수와 적절하게 만나야만 헉슬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MMOFPS를 유저들도 비로소 이해하고 반길 수 있다는 말이다.


길게 돌려 말했지만, 헉슬리는 아직까지 그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콤은 하지만 아직은 쌉사름한 느낌이 더 강한...


MMO+FPS라는 타이틀은 헉슬리를 만들고 있는, 그리고 지켜보는 이들에게 매혹적인 콩깎지가 될 수도 있고, 그릇된 색안경이 될 수도 있다. 분명, 이는 지금의 헉슬리에게 치명적인 독이다.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니까.


길고 긴 터널의 입구에 첫 진입한 헉슬리가 부디 화룡점정이라는 고사처럼 마지막 눈동자를 그려 넣어 MMOFPS로서의 생명을 지닐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해 본다. 이것이 바로, 헉슬리가 이룩해 낸 훌륭한 성과에 감동받은 기자가 무조건적인 박수를 보내지 않는 솔직한 이유다.





Inven Vito - 오의덕 기자
(vito@inv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