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년 사이 로봇공학은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정해진 패턴을 따라 단순 반복하는 기계팔 모양의 작업 로봇은 관절의 움직임과 근육 같은 동력원을 가진 인간형 로봇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로봇이 사람다워지지는 않는다. 카메라, 마이크를 통해 인지한 상황을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비로소 사람다운 로봇이 완성된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AI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3D그래픽과 제작 프로그램의 발달로 반복작업이 줄어들고 개체 하나하나의 품질을 높일 수 있게 됐다. 그 덕에 게임 속 캐릭터의 외형은 진짜 사람에 다가서고 있다. 하지만 이런 멋진 외형을 가지고 있더라도 기계 같은 뻔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그저 잘 만들어진 데이터로 여겨질 뿐이다.

‘사람 같은 AI를 만들기 위한 패턴 설계 방법’을 주제로 강단에 오른 김진수 개발자. 그는 게임 속 캐릭터를 사람 같게 만들기 위해서는 뻔한 움직임을 벗어나는 '사람다운' AI 패턴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해답을 얻기 위해 자신이 직접 창작한 캐릭터 '제임수'를 소개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 넥슨 코리아의 김진수 개발자


제임수, 사람답게 만들기

▲ 파란 '제임수'를 사람답게 만들어보자.

1. 사람 같은 외모

제임수의 외모를 현실적으로 바꾸면 사람 같아질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외형만 사람답게 만드는 것으로는 캐릭터를 사람답게 만들지 못한다. 되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영화 폴라익스프레스는 모션 캡처 기법을 사용해 유명 배우 톰 행크스의 표정과 행동을 현실적으로 구현했다. 하지만 다수 비평가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혹평의 이유는 캐릭터가 기괴하다는 것. 이는 ‘불쾌한 골짜기’ 이론으로 확인할 수 있다.

▲ 모션 캡쳐를 거쳐 만들어진 '폴라 익스프레스'. 평가는 좋지 못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인간과의 유사성이 높아질수록 호감도는 높아진다. 하지만 이게 어느 수준을넘어서면 호감도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구간에 돌입한다. 여기서 어설프게 인간다움이 높아진 캐릭터나 로봇이 움직이면 좀비로 느껴지고, 움직이지 않으면 시체로 느껴지게 된다.

영화 ‘빅 히어로’에서 사랑스러움을 마음껏 뽐내며 흥행을 이끈 인공지능 로봇 ‘베이맥스’. 그는 진짜 사람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대중의 호감을 사는데 사람 같은 외형은 중요하지 않았다. 되려 불쾌한 골짜기 이론에 기반. 사람 같으면서도 ‘로봇’이라는 정체성을 뚜렷하게 깨달을 수 있는 외모가 관심을 높이는 요인이었다.

▲ 인간과의 닮음이 어설프게 높아지면 혐오감이 높아지는 '불쾌한 골짜기' 이론.

▲ 사실적일수록 혐오스러움이 증가한다.


2. 사람다운 행동

일정 수준의 외형을 구현한 후, 필요한 것은 사람다운 행동을 추가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게임 기획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개발자들은 게임의 서비스 이후에도 계속해서 게임개발 작업을 거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업데이트나 퀘스트 추가라는 결과물을 낳는다. 하지만 업데이트가 반복되다 보면 유저들은 일련의 개발 결과물을 새롭게 받아들이지 않기 시작한다. 여기에 힘들게 만든 콘텐츠는 너무나도 빠르게 소비된다. 결국, 개발 속도를 올려야 하고 개발비용도 비례해 높아지게 된다. 그러면서도 유저들의 반응은 계속 식어만 가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 콘텐츠 소모 속도가 빠를수록 개발의 부담도 높아진다.

급박한 게임 개발 시간을 조금이나마 버는 방법은 완벽한 AI 구축이다. 유저들이 AI와의 플레이를 통해 스스로 콘텐츠를 즐기게 하고 그간에 게임을 개발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AI 스스로 놀거리를 만들어 내는 세상. 개발자로는 파라다이스 같은 게임 환경을 구축할 수도 있다.

물론 훌륭한 AI를 만드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김진수 개발자는 '카트라이더'의 포뮬러 모드를 예로 들었다.

포뮬러 모드는 실제로는 AI와 플레이 하지만 유저와 플레이하는 착각이 들게 하면서 쉽게 빠져드는 게임을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쉽게 추월을 내주고', '치열한 경쟁을 유도하고', '원작과 비슷한 플레이 시간을 유지하는' AI 개발을 목표로 했다. 구체적으로는 유저가 1, 2, 3등의 AI와 경쟁하게 하고, 그 아래 단계를 비워둬 AI 끼리 경쟁하는 행동 툴을 구현, 제작했다.

▲ 하위 그룹 AI의 목표 순위가 너무 높으면 일렬로 나란히 주행한다.

▲ 하위 그룹 AI의 목표가 너무 낮으면 상위 그룹과의 차이가 크게벌어진다.

하지만 AI의 선호 등수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한 줄로 길게 늘어서 유저를 방해하거나, 하위권과의 차이가 지나치게 크게 나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는 온전히 지속적인 반복과 예측 시뮬레이션으로 확인하고 수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 이러한 목표 중심적 행동 형태를 '제임수'에 적용. 길을 벗어나지 않고 목표를 찾아가게 했다.


3. 관계

김진수 개발자는 캐릭터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 내 문구를 인용했다.

“리처드 도킨스는 '너희는 이기적인 유전자의 번식 셔틀이다.'라고 말했다. 즉, 정해진 목표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생물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런 목표에 따른 행동은 ‘문화와 관계 등의 요소 전승으로 이겨낼 수 있다.'라고 말하며 목표 중심적 행동을 타개할 방법을 제시했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러한 주장과 함께 목표를 벗어날 수 있게 하는 비유전적 문화요소나 문화의 전달단위를 밈(meme)으로 정의했다. 김진수 개발자는 사실적인 관계 설정을 위해 제임수에 밈을 넣었다. 즉, 정해진 목표 외의 행동을 수행하게 만든 것이다. 다만 AI에 적용할 수 있도록 밈을 수치화해 스테이터스로 나타냈다.

구체적으로는 좋은 관계를 맺고있을 때는 1에 가깝게, 아무런 감정이 없거나 싫어할 때는 0에 가깝게 설정하는 것이다.

▲ 0과 1로 나뉜 관계 수치

▲ 이를 스테이터스로 표현, 세분화하면 관계 수치에 따라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스테이터스 수치는 상호 작용에 따라 바뀌게 된다. 이를 이용하면 특정한 목표를 지정해주었음에도 선호하는 관계에 따라 자신의 행동 패턴이 바뀌게 된다. 이것이 캐릭터 둘에서 셋, 그리고 그 이상으로점차 늘어나게 되면 하나의 커다란 사회관계가 된다.

▲ 두 가지 선택지 중 관계 수치가 높은 쪽을 선택해 이동한 '제임수'.

▲ 관계 수치에 따라 행동을 선택한 '제임수'에 분노를 느낀 또 다른 캐릭터.

김진수 개발자가 개발한 '제임수'는 외형적으로는 파란 폴리곤 덩어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정해진 목표와 관계 요소에 따라 인간다운 행동과 반응을 보였다. 이러한 행동을 기계 답다 말할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 외형만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 캐릭터를 사람답게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유저들이 경쟁상대나 관계를 맺는 인격체로 여기게 할 행동 패턴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행동 패턴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것이 AI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관계의 스테이터스화다.

즉, 모든 인공지능의 기본은 뚜렷한 목표 설정과 그 목표를 벗어나는 창발성을 보여줄 수 있는 관계 설정에 달린 것이다.

"내가 '제임수'에게 심어준 것은 기본적인 행동과 목적이다. 하지만 관계를 더하자 사랑과 증오에 따른 다양한 행동 패턴이 나타났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수치의 스테이터스화였다. 이처럼 관계라는 작은 변경점 하나는 캐릭터끼리 놀 수 있는 하나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사람 같은 AI를 만드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