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이라는 캐릭터를 알게 된 건 참 오래전 일이었다. 아마 모던 에이지 배트맨 시리즈 중 하나를 보았던 것 같은데, 사실 영화의 단편적인 느낌이나 감상 정도는 기억이 나지만,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머릿속에 떠도는 감상은 영화 중간마다 아른거리곤 했던 짙은 드라이아이스 스모그와 뭔가 어색해 보였던 분장의 배트맨. 아마 로빈이 까불락 대면서 뛰어다니던 장면이 생각나는 걸 보면 세계 최악의 영화로도 꼽히는 '배트맨과 로빈'이었던 것 같다.

하여간 이후, 배트맨을 위시한 DC코믹스의 히어로들은 그다지 친숙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적어도 내 머릿속에서 '슈퍼맨'은 유치했고, '배트맨'은 어색했다. 몇 년 후 개봉했던 '엑스맨'이 상당히 잘 뽑혀 나왔기에 'DC'와 '마블'이라는 양대 코믹스 사이에서 백지에 가까운 상태에 있던 내가 마블 쪽으로 턴오버 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지나, '배트맨 비긴즈'의 속편인 '다크 나이트'가 개봉했다.

▲ '배트맨'을 새로 보게 된 순간

굳이 영화가 어떻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다크 나이트'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히어로 영화로 손꼽히는 작품이며, 히어로 영화가 어떻게 하면 모든 계층을 아우를 수 있는지 보여준 영화이니 말이다. 다크 나이트 개봉 후 1년이 지나 등장한 '배트맨: 아캄 어사일럼'은 다크 나이트를 통해 새롭게 인식된 배트맨에 대한 감상을 더욱 확대했다.

'아캄 어사일럼' 이후 '아캄 시티'에 이르기까지, '아캄버스(아캄 시리즈의 세계관)' 배트맨은 영화의 인기에 편승해 대충 만들어 내놓은 슈퍼 히어로 게임이 아니었다. 이중생활과 자신만의 정의에 대한 강박증에 사로잡힌 어두운 히어로. '안티 히어로'로서의 '배트맨'은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로 시작해 '아캄버스'에서 완연해졌다.

그리고 2015년, '아캄버스'의 마지막 작품인 '배트맨: 아캄 나이트(이하 아캄 나이트)'가 등장했다. 물론 미리 사둔 PC 판은 환불했다. 불량한 PC포팅 문제는 될 수 있으면 접어두고 '게임' 그 자체에 집중해 보고 싶었다. 국전으로 달려 PS4 판을 가져왔다. 미리 사뒀지만, 딱히 쓸데가 없어 먼지만 쌓여가던 PS4를 닦았다. 패드를 붙잡고 의자에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면서, 내가 알고 있던 '배트맨'에 대한 감상을 되살렸다.

▲ 뛰어가서 사왔다.





▲ 어둠, 고독, 강박증, 무자비...

'아캄버스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배트맨'이라는 캐릭터가 있었기에 만들어진 게임이다. 그만큼 제작 중 '배트맨'이라는 캐릭터 자체에 대한 숙고 과정이 포함되었을 것은 틀림없다. '아캄 시티'에 이르기까지의 아캄버스 게임들은 '배트맨'의 캐릭터 성을 훌륭하게 살렸다. 다소 무모할 정도로 보이는 과단성, 한번 판단하면 결정을 절대 되돌리지 않는 고집, 그리고 자잘한 조언과 정보는 들을지언정, '충고'는 허용하지 않는 독단성까지. 과거 초기 시절, 권총을 쏘고 장난치는 조커와 코믹 액션을 보여주던 어정쩡한 '배트맨'은 다시는 없었다.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로 정련된 고독하고 단호한 히어로의 모습은 '배트맨'이 어떤 캐릭터인지 단박에 드러낸다.

'아캄 나이트'에 이르러, '배트맨'의 이 성격은 더욱 강력하게 드러난다.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그의 성격은 더욱 어두워졌고, 잔혹해졌다. 물론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불살'은 배트맨의 상징이며, 그의 정신을 지탱해주는 최후의 안전장치다. 하지만 말 그대로 '죽이지만 않을 뿐'이다. 뼈를 부러뜨리는 건 예사인데다, 온몸의 뼈를 죄다 부숴버린다는 협박도 거침없이 한다. 사람이 온몸의 뼈가 다 부러지면 그게 살아도 산 건가 싶다.

▲ 말 한마디 잘못하면 뼈마디 다 조각나는 거다.

수없이 많은 범죄자와 싸우면서 도움을 주겠다는 동료의 뜻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모든 사건은 본인이 직접 해결하려 한다. 효율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면 자신 스스로를 엄청난 위험에 내모는 일도 주저하지 않으며, 주변 인물들의 불행과 위험을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아캄 나이트'에서의 배트맨은 그 어느 작품보다도 배트맨의 이런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 배트맨의 정신세계는, 메인 빌런인 '스케어크로우'와의 시너지로 더욱 드러난다. 보통 잘 만든 게임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게이머들의 감정을 고양하는 일종의 '주제', 혹은 '소재'가 존재한다. '파 크라이3'의 경우 '광기'를 주제로 삼았고, '바이오쇼크'는 '은유'로서 게이머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사실 아캄 나이트는 공포 게임이 아니니 '주제'라기보다는 '소재'라고 할 수 있지만, 아캄 나이트를 플레이하면서 가장 밀접하게 플레이어에게 파고드는 감정은 바로 '공포', 그리고 공포로 인한 내면의 분리다.

'배트맨'이 공포로서 범죄자를 제압하는 것은 유명한 설정이다. 상상치 못한 순간에 갑자기 등장해 범죄자를 제압하는 배트맨의 모습과 겁에 질려 제압당하는 범죄자의 모습은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모습이다. '스케어크로우' 역시 '공포'를 무기로 삼는다. 하지만 그 과정은 다르다. '배트맨'이 도시 전설과 같은 은밀성과 자비 없는 제압으로 공포를 일으킨다면, '스케어크로우'는 약물을 사용한다. 그리고 게임상에서, 그 일련의 과정은 배트맨과 스케어크로우 모두에게 예외 없이 작용해 내면의 공포를 불러내고, '무적의 히어로'를 '고독한 한 명의 인간'으로 만든다.

▲ '공포'를 주 무기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묘하게 닮은 '스케어크로우'

'배트맨'은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초인이 아니다. 그가 느끼는 공포의 과정과 그 내용은 오롯이 남아 영상으로 전달된다. 그리고 끝까지 이르는 게임 플레이의 과정에서, '배트맨'은 온전히 '다크 나이트'가 되어 게이머들의 마음에 남는다.





▲ 비에 젖은 '고담'

'고담'이라는 단어는 생각보다 친숙하다. 외국의 도시, 그것도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도시임에도 이상할 정도로 친숙하다. 사람 목숨 알기를 길거리 휴지만도 못하게 여기는 빌런들이 가득하고, 배트맨 하나와 맞붙고 싶다는 바람으로 온갖 사고를 다 치고 다니는 이들이 존재하는 도시. '고담'이라는 단어는 자주 인용되곤 하지만, 결코 좋은 의미는 아니다. 농담 삼아 다른 도시 앞에 붙어 놀리는 경우에나 가끔 사용될까?

'아캄 나이트'의 무대 또한 고담 시이다. 전작인 '아캄 시티'처럼 완벽하게 범죄자들에게 장악되어버린 구역이 아닌, 모종의 일로 시민 전체가 대피해버려 범죄자들밖에 남지 않은 버려진 도시다. 사실 아캄 나이트의 오픈 월드 영역은 넓은 편이 아니다. GTA5와 같은 오픈 월드 작품과 비교하면 형편없이 작은 크기인데다, 그나마도 고담 시 전체가 아닌, 일부를 다루고 있다. 멀찍이 미션 마커가 찍혀도 2,000미터를 넘어가는 경우는 극소수. 게다가 배트클로와 망토를 이용해 훨훨 날아다니는 배트맨에게는 더 좁게 느껴진다.

▲ 엄청 멀어 보여도 보통 30초에서 1분이면 도달한다.

놀라운 건 그 작은 도시 안에 굉장히 다양한 콘텐츠를 오밀조밀 잘도 배치해 놓았다는 거다. '아캄 나이트'에 등장하는 사이드 퀘스트의 숫자는 총 100여 개. 20여 개에 달하는 감시탑과 도로 통제 구역을 포함해 100-200미터 간격으로 사이드 퀘스트를 위한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다. 오죽하면 사이드 퀘스트를 하러 가는 도중 다른 사이드 퀘스트 장소를 두 세 번은 발견할 정도다.

오픈 월드를 구축함에 있어 맵의 크기와 오브젝트의 밀도 중 어느 쪽에 중점을 맞추어야 하느냐는 많은 개발사가 고민하는 주제다. '저스트 코즈2'의 경우 맵의 크기는 획기적으로 크지만, 맵 크기에 맞춰 오브젝트를 균형 있게 배치하려다 보니 오브젝트가 지나치게 단순해져 버렸다. 사실 뭐 그냥 다 때려 부수면 되는 거니 오브젝트라 부르기 뭣하기도 하다. '엘더스크롤5: 스카이림'이 멋진 게임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그중에는 넓은 맵에 밀도 있게 콘텐츠를 배치해 놓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아캄 나이트'의 경우 분산보다는 '밀집'에 가까운 맵 디자인을 선택했다. 넓은 맵은 아니지만, 지하, 지상, 그리고 건물 옥상까지 이용해 콘텐츠를 배치했고, 가끔은 건물 벽에 콘텐츠가 붙어 있는 일도 있다. 그 악명 높은 리들러 트로피를 250개 가까이 배치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고 쳐도, 좀 너무 하다 싶을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느낌이 강하다.

▲ 좁은 맵에 이것저것 많이도 발라놨다.

사실 이 자체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픈 월드의 느낌을 강하게 주지는 않지만, 게임을 즐김에서 불편한 점은 없으니까. 근데 '아캄 나이트'에 들어 새롭게 추가된 콘텐츠가 걸린다. 따로따로 떼놓고 보면 썩 나쁘지 않은데, 서로 연관되기 시작하니까 불편함이 슬슬 느껴진다.





'배트맨'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 보자. 사실 히어로 중에는 '부자'라는 속성을 가진 히어로들이 드물지 않게 보인다. 웬만한 히어로의 경우 일반적인 월급쟁이보다는 돈에 대해 구애받지 않는 편인데다가(스파이더맨 같은 예외 사항도 있지만), 꽤 부유한 삶을 영위한다. 그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부자인 히어로를 보자면 널리 알려진 마블 코믹스의 '아이언 맨'이 대표적인 사례. 빌런 쪽으로 가면 슈퍼맨의 숙적 중 하나인 '렉스 루터'도 엄청난 부자다. 단순히 설정 상으로 치면, '배트맨'인 '브루스 웨인'은 그들보다 더 부자다. 그럼에도 '배트맨'의 장비는 '아이언 맨'이나 '렉스 루터'와 비교하면 상당히 처지는 편이다.

▲ 사실 조금 빈곤해 보이는 아캄 시티 당시의 배트 슈트

몸에 딱 붙는 스판덱스 슈트와 점점 구멍이 뚫리는 망토, 그리고 장난감 같은 탐정 도구들이 모여 있는 도구 벨트 정도가 배트맨의 도구다. 물론 '배타랑' 같은 원거리 무기나 '배트 클로'같은 놀라운 장비들도 있지만, 전차를 씹어먹고 건물 몇 채 정도는 시원하게 말아 드시는 다른 장비 중심의 히어로들과는 수준이 다르다. 굳이 부자가 아니더라도 공부만 열심히 했다면 마련했을법한 장비들이 배트맨의 장비들이다.

하지만 '아캄 나이트'에 들어 드디어 '배트맨'이 부자임을 드러내는 장비가 추가되었다. 바로 '배트모빌'.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에 나왔던 '텀블러'를 포함해 모던 에이지 시절부터 끊임없이 배트맨의 재력을 과시하는 일종의 무적 장비다. 배트맨 혼자 몸으로 이것저것 하다가 안되면 배트모빌을 호출해서 다 때려 부수고 제압하는 패턴은 종종 사용되었다. '다크 나이트'에서는 부서져 버리지만.

▲ 조커가 이녀석을 파괴했을 때 좀 충격받긴 했다.

하여간 이 '배트모빌'은 '아캄 나이트'에서 제2의 주인공이라 불릴 정도로 강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메인 이미지에도 나오며, 게임 중 배트모빌과 관련된 연출 또한 공들여 제작된 것이 드러날 정도다. 문제는 앞서 말했듯, 별로 크지도 않은 도시를 돌아다니기 위해서는 굳이 배트모빌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갈고리 부스터를 통해 날아가는 게 오히려 더 빠르다는 것을 알게 되는 시점부터, '배트모빌'은 일단 이동 수단으로서의 모든 가치를 상실한다.

게다가 마치 '스타크래프트'의 '공성 전차'를 보는 듯한 배트모빌의 공격 모드는 스토리의 개연성을 말아먹는 옥에 티가 되어 버렸다. 작중 등장하는 빌런인 '아캄 나이트'는 배트맨에 대해 굉장히 잘 안다. 당연히 배트맨이 불살을 추구하며, 절대로 인명을 살상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사실 지나가는 졸자들도 배트맨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배트모빌의 공격 기능을 활용하려다 보니, 도시를 돌아다니는 전차에 '무인'이라는 설정을 붙여 버렸다. 결국, 그 머리 좋고 배트맨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빌런들이 전차에 사람 하나 태울 생각을 못했다. 아이고 안타까운 녀석들.

▲ 사람 하나씩만 태워놨어도 배트맨은 졌다.

문제는 배트모빌을 이용한 전투 미니게임 자체가 크게 재미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적이 발사하는 투사체의 탄도가 보이고, 적당히 사각을 찾아 이동하기만 하는 전투 시스템은 1990년대의 탱크 게임과 비교해도 그래픽 외엔 나은 점이 단 하나도 없다. 적 수송차량을 찾아내 추격하는 사이드 퀘스트는 질주와 어우러져 재미있기라도 한데, 대놓고 싸우는 무인기들과의 전투는 첫 전투부터 지루하다. 더 큰 문제는 메인 퀘스트 곳곳에 이 전투모드 플레이를 버무려 놓는 바람에 피할 수도 없다는 거다.





'아캄 나이트'를 플레이하면서 느낀 점이 하나 있다. 게임 내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시네마틱 영상'. '아캄 나이트'에는 별도로 제작된 시네마틱 영상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인트로와 엔딩을 제외하면, 모든 컷신의 연출은 인게임에서 카메라 위치만 바꾼 정도다. 물론 그 정도로 기본적인 그래픽 퀄리티가 뛰어난 덕도 있지만, 그 덕분에 게임 플레이와 컷신 사이의 유격이 제로에 가깝게 줄어들었다. 게임 도중 잠시 패드를 놓고 쉴 수 있는 시간이었던 컷신은 게임과 하나로 녹아들었고, 몰입되어 있던 감정이 현실로 다시 빠져나오는 것을 막는다.

▲ 저런 액션 진짜 되는거다

'아캄 나이트'의 고담은 어둡고, 침침하며 동시에 축축하다.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와 어울리는 최고의 무대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실질적인 게임 플레이와 컷신 사이의 벽이 사라짐으로써, 플레이어는 자신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더욱 쉽게 의미를 부여하고, 몰입할 수 있다. 분명히 도시이지만, 범죄로 얼룩져 범죄 그 자체로까지 보이는 고담의 비주얼, 내리는 비와 적색 조명으로 물든 거리. 그리고 기본적으로 음침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웅장하게 울리는 BGM까지, 플레이어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극대화된 연출로 묻어나고, 곧 준비된 컷신처럼 진득하게 뇌리에 묻어난다.

'연출'에 초점을 둔 게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레디 앳 던'의 '디 오더 1886'의 경우 마찬가지로 컷신과 게임 플레이 사이의 유격이 존재하지 않았다. '디 오더 1886'의 경우 게임 플레이 자체가 재밌다고 하기엔 너무 부족해서 금세 묻혔지만, '아캄 나이트'는 3부작으로 이어지면서 전해져온 비결과 정리된 시스템이 함께 했다. 검증된 이미 검증된 게임에 양념을 더 부은 격이다. 덕분에 '아캄 나이트'는 맛있는 요리가 되었다.

▲ 연출 하나는 게임과 컷신을 가리지 않는다.

아쉬운 점이라면, 정돈되어 있던 게임 요소들을 연출로 다듬어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게임 요소 하나하나를 유저가 체득할 만한 계단을 마련해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작을 해본 유저들이라면, 배트맨이 얼마나 많은 장비를 다루는지 잘 알고 있다. 지금 당장 메뉴를 켜지 않고 생각해 보아도 두 종류의 베타랑을 포함해 10종류 이상 존재한다. 그리고 그 중 몇 종류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전작부터 등장한 장비들이다.

문제는 여기서 나온다. 전작을 플레이해본 유저들이야 '베타랑'이나 '배트클로'를 전투 중 응용하는 것을 크게 힘들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캄 나이트'를 통해 아캄버스 시리즈를 처음 접한 유저들은, 전투 중 장비를 응용하는 과정을 상당히 어려워할 수밖에 없다. 중간마다 커맨드가 팝업 되긴 하지만, 실제로 응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냥 "아 이런 기능도 있구나"정도에 그칠 뿐이다. '익숙함'이 불러오기 쉬운 함정이다. 모든 유저가 아캄 시리즈를 접해본 것은 아니라는 것. 그 때문에 다소 거칠게 뭉개져 버린 마감새는 확실히 아쉬운 부분이다.

▲ 들고 다니는 장비가 한두가지가 아니다





'아캄 나이트'에 대한 감상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하나 멋진 블록을, 뭔가 거칠게 조립한 작품". 혹평을 한 배트모빌의 전투 파트 또한 나름의 맛은 있다. 그 맛을 선호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하지만 그 요소 하나하나를 조립하는 과정에서 뭉개져 버린 이음새는 다소 아쉬울 수밖에 없다.

메인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 빌런들은 사실 몇 명 되지 않는다. '스케어크로우'와 '아캄 나이트', 그리고 '데스스트로크' 정도. 나머지 사이드 퀘스트를 통해 만나는 빌런들은 메인 스토리와 크게 개연성이 없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냥 지나가다 보니 보여서 때려잡고 가는 정도랄까? 그중 몇 명의 경우 도무지 왜 튀어나왔는지 모를 정도로 뜬금없이 등장하곤 한다. 분명히 초반에 '스케어크로우'가 고담의 빌런들과 회동을 했음을 언급했는데도, 그들 사이에는 별다른 연결 고리가 등장하지 않는다. 게임의 볼륨을 풍성하게 해주는 콘텐츠로 등장할 뿐이다. 아마 이 부분은 나중에 DLC로 풀릴지도 모르겠다.

▲ 그나마 할리퀸은 명확한 목표가 있다.

하지만 이런 아쉬운 점들은 말 그대로 어쩔 수 없이 눈에 보이는 작은 단점들일 뿐이다. '아캄 나이트'는 영화 삼부작의 마무리인 '다크 나이트 라이즈'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아캄버스 삼부작의 종장을 찍었다. '배트맨'이라는 캐릭터는 이제 더는 그저 그런 슈퍼 히어로들과 같은 선상에 놓이지 않는다. '프랭크 밀러'가 아동용 싸구려 히어로였던 '배트맨'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준 '다크 나이트 리턴즈' 이후, 배트맨은 놀란 배트맨 트릴로지와 아캄 트릴로지를 거치며 '히어로'물이 현실에 도입 가능한 철학을 포용할 수 있는 미디어임을 증명했다.

▲ '배트맨'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제시한 프랭크 밀러의 '다크 나이트 리턴즈'

'아캄 나이트'에서 배트맨의 적은 빌런들뿐만이 아니다. 플레이어는 스스로 '배트맨'이 되어 그가 범죄와 싸우는 이유, 그리고 독단적이고 단호하며, 한편으로는 괴팍하게까지 보이는 성격을 갖게 된 까닭을 절절히 느끼게 된다. 어렸을 때는 그저 무적인 줄 알았던 '히어로'는 영화를 통해, 그리고 게임을 통해 복잡한 내면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자신의 내면과도 싸워야 하는 슈퍼 히어로. 어떻게 보면 '히어로'로서 가질 면모는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배트맨을 좋아하고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배트맨'이 육체적 강함을 통해 어필하거나 강력한 초능력을 가진 영웅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며, 그 시간 동안 팬들 또한 한층 더 성숙해졌고, 성인으로서 '배트맨'의 내면을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배트맨: 아캄 나이트'는 히어로를 소재로 한 게임이지만, 청소년 이용 불가 등급을 받았다. 재미와 희망, 그리고 긍정적인 요소로 가득 차기 마련인 '히어로'물이 어둠과 광기를 품에 안고도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배트맨: 아캄 나이트'의 의미는 그저 잘 만든 '오픈월드 액션 게임'에서 머물지 않는다. '히어로'를 주제로 하면서도 게임이 성공할 수 있음을, 그리고 언뜻 유치해 보일 수 있는 그 소재가 이미 성숙한 성인의 마음속에도 충분히 파문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아캄버스의 대미를 장식한 '아캄 나이트'가 만들어낸 '가능성'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