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감자.

현 게임시장에서 'HMD(Head Mounted Display)'를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단어가 아닐까 싶다. 영상 출력 장비에서 '모니터'의 집권은 길고 길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제위는 더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시야를 공유할 수있다는 것. 그리고 어떤 화면을 송출한다 해도 무난하게 재생이 가능하다는 점 등 모니터가 가진 이점은 상당하니 말이다.

분명 '대중성'이라는 측면에서 'HMD'는 대세를 잡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HMD'의 가치는 대중성에 있지 않다. 절대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모니터 외의 다른 영상 출력 장비. 발전이 빠르고, 날마다 새로운 기술들이 등장하는 IT/게임 업계에서도 HMD는 주목받는 기술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아직까지 HMD기술에 관련한 소식 대부분이 '하드웨어'와 결부되어 있다는 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직 HMD는 상용화된 기술이 아니며, 검증 단계에 머물고 있다. 훗날 알맹이가 될 소프트웨어보다 하드웨어에 집중하는 것이 옳은 순서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섬머 레슨'은 HMD, 그리고 'VR' 분야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오랜 기간 개발 경력을 쌓아온 대형 개발사에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선 VR 소프트웨어라는 점, 그리고 인간의 본능을 건드리는 심장 떨리는 소재. 특이한 점은 '섬머 레슨'을 기획한 PD가 미소녀와의 미묘한 감정선 흔들기를 소재로 삼는 이 작품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작품을 해온 사람이라는 거다.

▲ 반다이 남코 '하라다 카츠히로' PD

'하라다 카츠히로' PD.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가 집중해서 맡아 온 시리즈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격투 게임인 '철권 시리즈'다. 장구한 세월 동안 두들겨 패고, 부수는 게임을 만들어온 그가 VR, 그리고 HMD에서 본 것은 무엇인가. 어떤 점이 그에게 '섬머 레슨'을 기획하게 하였을까? '인벤 게임 컨퍼런스'의 키노트 강연. 하라다 PD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연단에 선 그의 모습은 '예능'에 가까운 이미지를 풍기는 평소의 그와는 또 달랐다.

'섬머 레슨'의 개발 비화부터, 'HMD' 콘텐츠의 상업화, 그리고 미래까지 다루는 풍성한 강연. 그 순간, 강연장은 이미 IT의 첨단에 있었다.




■ 발단 : HMD VR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섬머 레슨'의 간단한 동영상 시연이 끝난 후, 하라다 PD는 본격적인 강연에 들어갔다. 하라다 PD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격투 게임'은 다양한 매력을 갖고 있지만, '캐릭터'가 굉장한 비중을 차지한다. 햇수를 거듭해오며 '철권' 시리즈의 캐릭터들은 늘어났지만, 모든 캐릭터가 다 성공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가 가진 고민은 '캐릭터에 대한 애착'을 유저들에게 부여하는 것.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캐릭터를 더 좋아하게 만들 것인지가 고민의 시작이었다.

▲ 실사 영화는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철권 시리즈는 다양한 방식으로 캐릭터를 어필해 왔다. 하라다 PD가 직접 흑역사라고 언급한 실사 영화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던 중 한 이론이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사람의 시야 80%를 화면으로 채우게 되면, 그것이 가상이라 해도 현실로 착각하게 된다는 것. 이성을 뛰어넘는 '감각적 오해'가 생겨난다는 점에서 착안한 아이디어. 바로 HMD이다.

생각을 정한 하라다 PD는 (철권의 예산을 몰래 빼돌려)곧장 실험에 착수했다. 첫 시도는 철권의 캐릭터들을 HMD로 옮기는 것. 하지만 몇 번의 시도 끝에 하라다 PD는 '철권'이 HMD와 어울리지 않는 콘텐츠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큰 이유는 '너무 무섭다'는 것. 하기야 인간 이상의 체격을 갖춘 하드코어 격투가들을 눈앞에서 직접 본다니 무서울 수밖에 없다.

▲ 설득력 넘치는 취소 이유

하지만 하라다 PD는 다르게 생각했다. '이렇게 무서울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라는 생각. 그리고 그다음 스텝은 긍정적인 감정을 심어줄 수 있는 콘텐츠를 생각하는 것이었고, 마침내 '섬머 레슨'은 초안이 잡혔다.

▲ 동시에 '가능성'도 엿볼 수 있었다.



■ 한계 : 아시아, 주도권을 쥐는 것이 가능한가?


'섬머 레슨'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를 마친 하라다 PD는 잠시 주제를 돌려 'HMD VR'시장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꺼낸 화두는 '한국과 일본 같은 동북아 게임 강국들이 VR 시장에서 주도권을 쥐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였다.

결론은 생각보다 빠르게 나왔다. 하라다 PD는 VR 시장에서 동북아 기업들이 주도권을 쥘 수 있겠느냐는 자문에 "현 상태로는 절대 무리다."라고 단언했다. 이어 그는 '캐즘 이론'을 현 시장 정세에 적용한 그래프를 보여주었다.

▲ '캐즘'을 돌파하기 직전이 현재 HMD VR의 상황

※ '캐즘 이론'은 새롭게 등장한 효과적인 신기술이 실제 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까지, 즉 일반인들에게 퍼지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이며, 여기서 일반인에게 보급되기 위해 넘어야 할 벽을 '캐즘'(Chasm)이라고 한다.

하라다 PD는 현재 HMD VR의 상황이 '캐즘'의 바로 앞까지 도달해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발전한다면, 벽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어떤 '키'가 존재한다면, 단번에 일상생활에 적용될 수 있는 시기라는 뜻이다. 그 말은 곧 시장에서의 주도권을 가늠하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라다 PD는 자국인 일본의 게임 업계를 말하며, "지금의 일본의 게임업계는 '혁신'과 '빠른 적응'을 추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과거의 일본 게임업계는 굉장히 모험적이며, 동시에 도전적인 세계였다.

▲ 현재의 일본은 '선구자'의 지위를 잃은 상황

당시 일본 게임업계에는 상장 기업이 흔치 않았어요. 감수해야 할 위험보다도 선발 주자로서 얻을 수 있는 선점 효과에 거는 기대를 더 크게 보았죠. 그래서 굉장히 도전적이며, 한편으로는 무모했습니다. 지금이야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는 비즈니스 모델 또한 딱히 확립되어 있지 않은 시대였죠. 하지만 기업이 성장하면서 게임이 사업이 되고, 수익 모델이 정립되면서 '비즈니스'라는 면에서 위험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 도전은 줄어들게 되었고 업계 자체가 점점 정적으로 변해갔죠.

가끔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북미나 유럽 시장도 철저하게 이익을 추구하고, 게임을 사업으로 취급한다. 심지어 수익 모델들조차 북미와 유럽 쪽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다를 게 무엇이냐?" 라고 말이죠.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수익 모델들의 대부분이 북미, 유럽 시장에서 시작된다는 것'이에요. '대기업이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악이다'라는 사고는 이미 구시대의 잔재가 되어 버린 지 오래입니다. 저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지만요. 중요한 것은, 수익 모델조차 서구 시장의 그것을 따라갈 만큼 아시아 업계의 창의적 사고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에요.


▲ 수익 모델조차 북미의 그것을 따라가는 상황이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DLC, 프리투플레이, 그리고 스마트폰의 거치형 어플리케이션까지. 대부분의 수익 모델은 확실히 북미, 유럽 쪽에서 시작된 것이 맞다. 하라다 PD 창의적 시도와 도전이 줄어든 이유를 단 하나로 정의했다.

바로 투자액의 크기 차이

처음 하라다 PD가 반다이남코의 임원들 앞에서 '섬머 레슨'의 데모를 공개했을 때, 회사 측은 굉장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후 선행 투자로서의 연구비를 언급하는 그에게 회사는 쉽사리 긍정적인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HMD 자체가 문제였을까? HMD는 이미 과거부터 존재해 왔다. 다만, 시험용, 혹은 어트랙션과 같은 용도로 극소수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때문에 HMD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앞서 언급한 '대중성'의 부족. '모니터'의 경우 한 번에 하나의 집단에 영상을 송출하고 같은 감정을 갖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HMD의 상용화는 이제 코앞으로 다가와 있으며, 인터넷을 통해 멀리 다 해도 모두가 한번에 같은 영상을 송출 받는데도 큰 문제가 없다. 이미 '대중성'은 확보되었다는 것. 그럼에도 HMD에 대한 투자가 잘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시장성'에 대한 확신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악순환이 시작된다. 시장성이 검증되지 않았으니 투자 금액은 줄어들고, 투자 금액이 적으니 검증 단계의 실험적 소프트웨어들이 제작될 수가 없다. 그 때문에 또 시장성 검증은 늦어지는, 악영향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 결국 악순환이 꼬리를 물게 되었다.



■ 불굴 : 그래도 도전해야 한다


잠시 숨을 돌린 하라다 PD는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내용의 핵심은 바로 '멀미'. 다소 의외의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멀미 증세가 HMD VR 시장에서 가장 잡기 어려운 문제이자, 늘 화두가 되는 주제인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멀미에 대한 분석도 많이 이루어진 상황이기에 'VR'을 다루는 강연 등에서는 일반론과 같은 기초적인 내용이기도 하다.

▲ 모든 VR 개발자들의 주적

하지만 하라다 PD가 주목한 점은 '멀미' 그 자체가 아닌, 멀미가 품고 있는 '독'이었다. 하라다 PD는 '멀미'가 VR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그리고 앞서 언급한 '캐즘'을 돌파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방해가 될 수 있는 수단이라 역설했다. 그는 멀미와 VR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했다.

사람들이 식당에 가서 음식을 시킨다고 예를 들어 봅시다. 맛이 없다면 다소 실망하지만, 그래도 다른 메뉴에 도전하곤 합니다. 하지만 음식을 먹고 식중독이 나버린다면, 그 식당을 다시 찾는 일은 없을 겁니다.

게임이 재미가 없다면 다른 게임을 하면 된다. 하지만 그것이 게임의 문제가 아닌, HMD라는 장비 자체의 문제. 즉 '식중독'과 같다면, 그 사람이 다시 HMD를 시도하는 일은 없어질 거라는 뜻이다. 하지만 멀미를 잡는 것은 굉장히 당연하면서도, 의외로 달성하기 어려운 사안이다.

하라다 PD는 멀미 예방책을 말함에서 '시야의 흔들림'을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령 차를 타거나, 운전하면서 화면이 덜컹거리는 연출의 경우, 직접 몸이 흔들린다면 큰 멀미는 하지 않는다. 몸에 가해지는 정보, 즉 '덜컹거린다'라는 사실과 시각적인 정보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야만 흔들리는 경우 몸의 각 부분에 전달되는 정보 사이의 괴리가 생기면서 멀미가 발생하게 된다. 그 때문에 게임에서 화면을 흔드는 연출은 결코 좋은 연출이 아니라고 말했다.

멀미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하라다 PD는 '멀미를 잡지 않으면, 새 기술에 도전할 이니시에이터(Initiator)들을 잃게 될 것이다'라고 강하게 말했다. 가벼운 불편 증상이 아닌, 새 시대를 막는 큰 걸림돌로서 '멀미'를 바라보는 시각. 확실히 지금까지 들어본 강연과는 다른 시선이었다.

▲ 식당에 퍼지는 '식중독'과도 같다



■ 전망 : VR,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미래


멀미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 후, 하라다 PD는 다시 VR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HMD VR이 '캐즘'을 넘어서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기술, 지금의 스마트폰이나 SNS와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질 것이며, 이 시기는 IT 대기업들이 얼마나 이 분야에 투자를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하라다 PD가 말하는 HMD VR의 상용화는 지금과는 조금 다른 형태였다. 1세대기, 즉 곧 상용화가 예정된 기종은 넓은 의미에서의 '상용화'는 조금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크기도 크고, 휴대성 또한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망막 조사'나 '홀로그램'등 투영 방식은 점점 더 발전하기 마련이다. 이런 방식들이 지금은 아직 실험 단계에 머물고 이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실제 생활에서도 볼 가능성은 작지 않다.

▲ 캐즘을 돌파하는 시점에선 또 다른 세대의 VR이 구현될 지도 모른다.

하라다 PD가 이유 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었다. 그가 보는 HMD VR 시장은 위험이 존재하지만, 그보다 더 큰 보물들이 산지사방에 흩어진 꿈의 바다와 같았다. 수십 년 전 일본의 게임사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선점 효과를 노리며 뛰어들었던 이유는 수익 모델이 정형화되지 않았다는 한계 때문이지만, 결과적으로 그 덕분에 일본 게임업계는 한동안 황금기를 맞이했다.

바로 지금이 HMD VR에 뛰어들 적기라는 뜻이다. 처음 열리는 시장이니만큼, 가능성과 위험이 함께하는 바다. 비록 안정성은 조금 모자랄지언정, 경직된 기성 시장보단 훨씬 높은 잠재력을 갖춘 HMD 시장. 하라다 PD는 그 시장에 대한 도전이 필요한 시점임을 은연중에 말하고 있었다.

▲ 하라다 PD의 '미래'에 대한 기대는 '확신'에 가까웠다.



■ 섬머 레슨 : 발견한 이론의 집대성


한동안 무거운 주제로 일관되었던 강연은 막바지에 이르러 조금은 편한 주제를 다루게 되었다. '섬머 레슨'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다양한 사실들과 이를 실제 적용하는 과정에 대한 총괄 기획자의 솔직한 이야기였다.

실험이 진행되면서 하라다 PD는 몇 가지 '철칙'을 만들었다. HMD로 바라보는 VR 세계에서 '현실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인간의 움직임'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마치 하늘을 보고 우리가 '하늘'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정도의 당연함. 의문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일반화된 명제다.

▲ '섬머 레슨'을 기획하던 단계에서의 '철칙'

VR로 그 움직임을 구현하는 과정은 바로 그 '당연함'을 기초부터 다시 분석하고 조립하는 과적이었다. 평면으로 표현되는 게임의 영상미는 '장대한 풍경'이나 '강렬한 연출', '박력'등에서 나온다. 하지만 VR은 다르다. VR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실제감'. VR의 기본적인 작동 구조부터가 시야 대부분을 덮어씌움으로써 의도적인 착각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비현실적인 움직임은 평소보다 더한 기시감과 어색함을 안겨줄 수 밖에 없다.

때문에 '섬머 레슨'의 개발팀이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이 바로 '리얼리티'였다. 적당한 공간적 압박감을 느끼면 더욱 현실감이 산다는 것을 발견한 후 공간을 좁은 방으로 한정 지었고, 보통 게임에서는 스프라이트조차 만들지 않는 벽걸이 시계의 뒷면, 책상 밑의 질감까지 하나하나 섬세하게 구현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무지막지한 돈이 깨지긴 했지만, 가장 큰 가치를 '현실감'에 둔 이상 필요한 출혈이었다.

이렇게 벽에 돌출된 전기 플러그라던가, 누전을 막기 위한 배관까지 꼼꼼히 만들고 나서 닥쳐온 과제는 바로 '캐릭터'. 어떻게 보면 '섬머 레슨'에서 가장 중요한 콘텐츠이자, 동시에 어려운 과제였다. 그동안 써온 방법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모델링을 마쳐도, '인간적인 느낌'을 넣지 않으면 그저 인간형 오브젝트에 불과할 뿐이었다.

하라다 PD는 '섬머 레슨'의 캐릭터가 '사고하고 있다'라는 느낌이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릇 '사고'라는 개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발단 - 사고 - 결론'이라는 과정은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하라다 PD는 이 점에 주목했다.

▲ 정말 '사고하는' 대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일단 신경 쓴 부분은 자연스러운 시선의 처리. 하라다 PD는 인간이 시선을 돌릴 때 '눈 - 머리 - 몸'순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인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를 적용했다. 또한, 대화를 나눌 때도 플레이어와 시선을 맞추는 한편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기고, 다시 웃으며 플레이어를 쳐다보는 등, 경직되지 않은 움직임을 만들어내기 위해 여러 시도를 가했다.

또 다른 부분은 나의 행동에 대한 다각적인 '리액션'이었다. 가령 플레이어가 얼굴을 들이밀면 자연스럽게 뒤로 빠진다거나, 너무 멀어지게 되면 알아서 가까이 오는 등, 실제 사람과 비슷한 거리감을 유지하게 하였고, 너무 오랜 기간 시선을 피한다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게임 속 캐릭터가 화를 내는 등 자연스러운 반응을 만들었다.

그 외에도 신경 쓴 부분은 너무나도 많았다. 너무 애니메이션답지도, 혹은 격투가스럽지도 않은 일반적인 체형, 그리고 캐릭터에 딱 들어맞는 모션 캡쳐 모델, 옷의 펄럭임을 구현하기 위해 허벅지에 히트 존을 만들고, HMD라는 환경에서도 모니터로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 수 있도록 신경 쓰는 등, 너무나도 많은 부분을 고려했고, 일일이 고쳐나갔다. 하라다 PD는 이 과정을 말하면서 '다른 게임보다 적어도 두 단계 이상의 세밀한 인물 제작이 필요했다'라고 말했다.




■ 종장 : '희망'을 담은 마무리, 그리고 Q&A


한 시간 반을 이어온 강연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다소 주제가 들쑥날쑥 바뀌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 모든 과정을 바라본 후, 느껴지는 '핵심'은 하나였다. '도전', 그리고 '시도'. 새롭게 태동할 HMD VR 시장에 대한 관심과 다양한 시도가 이뤄질수록, 시장은 더욱 빨리 열릴 것이며, 그곳에서 보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역설이었다.

그는 가능성을 보았을 것이다. '섬머 레슨'을 시연해본 이들의 반응, 그리고 영상을 본 게이머들의 반응, 그것이 전부는 아닐 테지만, 그게 무엇이든 하라다 카츠히로 PD는 HMD와 VR의 미래가 올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을 의심할수록, 점점 늦어질 뿐이라고 주장하며 말이다.

강연이 마무리된 후, 약 30분간의 Q&A 세션이 이어졌다.



■ Q&A 세션


Q. '섬머 레슨'을 처음 보자마자 꼭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게임의 '지속성'에 대한 거다. 한 번쯤은 재미있게 플레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게임을 오래 플레이하게 할 힘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

- '지속성'을 만드는 문제는 우리에게도 큰 과제 중 하나다. 내가 노리고 있는 '섬머 레슨'의 매력은 '캐릭터 그 자체로서의 매력'이다. 한번 보고 싶은 이성을 다시 보고 싶은 감정. 물론 그 감정을 가상의 공간에서 100% 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번 달라지는 캐릭터의 반응에서 현실감을 느끼고, 게임을 즐기는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것도 꽤 재미있는 일일 것 같다.

이 게임은 정답이 없다. 매번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상대는 다른 반응을 보여줄 것이고, 그에 따라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Q. 섬머레슨을 쭉 보면서 느낀 것인데, 2D로 캐릭터를 표현하는 것은 고려해 본 적이 없나? 3D를 고집한 까닭이 있는가?

- 일단 2D를 HMD에서 구현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렵다. HMD로 2D캐릭터를 볼 경우, 내가 직접 그 캐릭터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되는데, 근거리에서 보는 2D 캐릭터는 굉장히 어색하고, 사람이라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다. 그 엄청난 크기의 눈이며 머리... 아마 무서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동공이 없으므로 어느 곳을 쳐다보는지도 알 수가 없다. 3D만이 현실감을 극도로 살리는 방법이었다. 우리 또한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현실감의 증대를 노렸지만, 지금의 방식이 최선의 결과인 것 같다.


Q. 철권을 VR로 만들 생각은 없는가?

- 이미 시도는 해 보았다. 어떻게 보면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 앞서 말했다시피 이 경험이 썩 즐거운 경험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피해도 일직선으로 빠르게 다가온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와서 풍신권을 날리는데, 도무지 이 관계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아니다. 거의 공포 영화 급의 공포를 안겨준다. 그래서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체험만 할 수는 있겠지만, 그 무서운 펀치와 발차기를 맞는다는 것은 썩 추천하고 싶은 경험은 아니다.

HMD를 통해 할 수 있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생각하는 것은 좋지만, 그와 동시에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HMD로 체험한다 해도 '신기함'과 동시에 '불쾌함'을 느끼게 하는 것은 전혀 좋은 방식이 아니다.

Q. VR 체험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싶은 학생이다. 산악자전거를 체험하는 시뮬레이션을 만들고 있는데, 멀미를 유발하기 쉬울 것 같다.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나?

굉장히 재미있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체험해본 적은 없지만 해보고 싶은 주제다. 하지만 아까 말했다시피 지면의 기복을 고려하면 매우 큰 멀미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덜컹거리는 현장감을 연출하기 위해서 몸을 직접적으로 흔드는 것은 효과가 있지만, 카메라만 흔드는 것은 굉장히 좋지 못한 방법이다. 때문에 주제는 좋은데 아마 난이도는 굉장히 높은 도전이라 생각한다.

아마 실제 자전거 모형을 만들고, 현장감을 느낄 수 있는 여러 장치를 만든 후 그 영상 소프트웨어와 합치면 굉장한 콘텐츠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90도 180도 도는 것도 내 몸이 같이 돌면 멀미가 나지 않는다. 몸이 느끼는 감각과 시야의 링크가 어긋날 때 생기는 것이 멀미이기 때문이다.


Q. 포켄(Pokken)을 HMD로 옮겨 본 적이 있나? 만약 해 보았다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존재를 HMD로 구현할 때 주의할 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 인간이 아닌 캐릭터는 실제로 큰 어색함을 준다. 철권에 나오는 쿠마(곰 캐릭터)를 HMD로 구현해 봤는데, 그저 어색하기만 하더라. 실제로 우리가 곰을 만날 일이 없기도 한데다 철권의 쿠마는 리얼리티도 고려하지 않은 캐릭터이다.

포켓몬스터의 경우 평소 생각하는 이미지가 있으니 반대로 리얼리티를 살릴 수도 있겠지만, 사람마다 포켓몬에 느끼는 감성이 모두 다르니 그도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포켄에서도 피카츄의 털을 살렸는데, 그거 HMD로 보면 괴물이 따로 없다. 대중 대부분이 생각하는 머릿속 이미지와 제작된 캐릭터를 맞추는 것. 그것이 굉장히 어려운 과정이라 본다.


Q. 섬머 레슨의 애니메이션은 굉장히 리얼리티를 살렸지만, 조작 면에서는 다양하다고 볼 수가 없다. 공간을 이동하면서 벽과 충돌한다거나 하는 문제 등이 우려되는데, 이런 점이 한계로 오지 않는가?

- VR 소프트웨어가 아직 연구 단계에 머무른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VR로 구현할 수 없거나, 굉장히 어려운 부분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기존의 강렬한 액션 게임들을 VR로 구현하면 유저들은 10분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VR의 한계가 너무 많다고 느끼실 수도 있겠다. 사실 섬머레슨 트레일러가 뜨고 많은 분이 열광해 주셨는데, 단순히 보면 이건 캐릭터가 카메라 보고 끄덕이는 게 전부다. 이게 HMD 게임이 아니라면 전혀 기대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열광한 이유는 이 게임이 HMD로만 구현할 수 있는 새로운 장르이기 때문이다. 평면으로 보는 것과 HMD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아예 다르다. 평면의 세계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게임의 구현. 그것이 HMD의 진짜 잠재력이 아닐까 싶다.


Q. 멀미때문에 안 보이는 곳까지 세부적인 표현을 하게 되고 그 때문에 비용이 굉장히 들게 된다고 했는데, 유저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가격대에서 상업적인 이익을 거둘 수 있을 것 같은가?

- 어려운 질문이다. 섬머레슨의 경우 인체 애니메이션을 사용하다 보니 게임이 굳이 아니더라도 모든 연구 분야에서 사람에 대한 것은 가장 어렵다. 로봇, 인공 지능 등등 말이다. 게임이긴 하지만 역시 사람에 도전하고 있는 우리 또한 마찬가지의 어려움을 갖고 있다.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HMD 게임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주 공간을 유영하는 시뮬레이팅 같은 경우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 큰 공간일수록 디테일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어색함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섬머 레슨은 다르다. 게임의 '볼륨'보다는 너무나도 일반적인 방식으로 다가가는 감정의 자극을 제대로 살려낼 수 있다면, 충분히 시장성을 갖추리라 생각한다.


Q. 투자액의 부족 때문에 한국이나 일본이 북미, 유럽을 이기기 어렵다고 말했는데, 그럼 우리가 선구자가 될 길은 없는가? 그리고 '섬머 레슨'의 영상 발표 이후 회사의 반응은 어땠나? 여전히 투자가 없었나?

- 첫 번째 질문에 답하자면, 투자금의 볼륨으로 미국을 넘어서기는 어려울 것 같다. 현재 상황을 보면, 북미나 유럽 쪽은 단순한 '콘텐츠'보다 사람의 삶을 바꾸는 '플랫폼'의 개발에 더욱 주력하고 있다. SNS나 온라인 플랫폼 등을 말이다. 그리고 나면 우리가 그곳에서 쓰일 각종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식이다.

결국, 뒤따라가고 있는 모양새인데, 이는 과감한 투자 없이는 뒤집기 어려운 구조이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한국이나 일본의 기업이 이런 과감한 투자를 하는 것은 보기 어려울 듯싶다.

두 번째 질문에 답하자면, 솔직히 바뀐 것 같다. 사실 처음부터 작정하고 몰아붙인 감이 있다. 철권 팀에 배분된 예산도 내 마음대로 섬머 레슨에 투자하곤 했다. 그때 난 확신이 있었다. 세상에 공개할 경우, 업계를 뜨겁게 달굴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말이다.

물론 아직 '섬머 레슨'의 게임화는 결정된 사안이 아니다. 하지만 밖에서 여론이 높아질수록 회사에서는 긍정적인 고려를 하게 될 것이다. 나의 의견보다, 유저들의 뭉친 한 마디가 회사에는 더욱 강한 압박이다. 물론 회사 내에서 내 평가는 내려가겠지만, 그만큼의 위험을 안더라도 해볼 만한 도전이 아니었나 싶다.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다. 임원이나 CEO가 아닌 중간급의 젊은 크리에이터들이 용기를 가지고 일어서야 HMD는 점점 더 커지고, 성장할 것이라고 확신하다.

마침 지금은, HMD VR 시장에 뛰어들 적기이다. HMD VR이 '캐즘'을 돌파하고 삶을 바꾸기 위해서는 HMD를 갖춰야 할 이유, 즉 '소프트웨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도, 큰 자산이 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물론 위험도 있지만, 한 번쯤 도전해볼 만한 시장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