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은 역시 더웠다. 매년 지스타 기간이 되어 부산에 갈 채비를 할 참이면, 덥다는 것을 머리로도 알고, 실제로 겪어 봐서 알면서도 미련하게 두꺼운 옷을 챙기곤 한다. 올해 역시 그랬고. 등이 축축하게 젖어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하며 도착한 벡스코. 지스타2015는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11년 차를 맞이하는 지스타2015. 겉만 두르듯 살펴보았지만, 작년이나 재작년과 같은 열기는 아직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대한민국의 모든 이목과 관심이 일생일대의 시험을 치르는 수능 수험생들에게 집중되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던 외국계 기업들이 빠지면서 그 빈자리가 느껴지는 것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지스타는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VR을 접한 이후 꾸준히 VR 관련 행사를 취재하고, 체험해온 나에게 '엔비디아'가 내세운 'VIBE VR'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라인업이 줄어든 것은 확실히 아쉬운 점이었지만, 소니와 엔비디아가 VR을 내세우며 출전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동시에, 반가운 이를 만날 수 있었다. '오큘러스 코리아'를 만든 과거 한국 지사장, 현재는 '볼레(VoleR)'라는 사명으로 VR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고 있는 '서동일' 대표였다. 비록 참관 업체로 참여한 건 아니었지만, 그는 강단에 서서 그의 경험을 모두와 공유하기 위해 부산을 찾았다. "가상현실 산업, 어디까지 왔나?"라는 제목의 강연. VR에 대한 기초적 접근부터 그 미래에 이르기까지, 서동일 대표의 강연을 정리해 보았다.

▲ 'VoleR' 서동일 대표

서동일 대표의 첫 마디는 "가상 현실을 경험해보지 못한 이는 절대로 그 느낌을 알지 못한다"였다. 이는 VR의 특성과도 어느 정도 결부되는 이야기인데, VR은 '일대다'가 아닌, '일대일'대응 장치를 기반으로 한다. VR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구현 가능한 VR은 머리에 쓰고 보아야 하는 'HMD(Head Mounted Display)'이다. 결국, 직접 쓰는 이가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다는 것. 이어 VR의 기본적인 개요를 어느 정도 설명한 서동일 대표는 '어째서 VR이 매력을 가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산업적 관점 - '수확 체감'을 깰 수 있는 길


서동일 대표는 먼저 '수확 체감'이란 개념을 설명했다. '한계생산 감소'라고도 불리는 이 경제 용어는 자본 및 인력의 투자에 비해 성과가 나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서동일 대표는 현재의 소형 디스플레이 시장이 이 '수확 체감'의 덫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수확 체감'은 일반적일 때와는 조금 다른데, 들인 자본과 인력에 비해 '성과가 나지 않는 것'이 아닌, '성과를 내도 쓸모가 없는' 상황이 다가와 버린 것이다. 과거 소형 디스플레이 시장을 견인하던 디바이스는 '스마트폰'이었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일반적인 크기인 6인치 이하의 스크린에서는 FHD(1920x1080) 이상의 해상도는 큰 의미가 없다. 그 이상의 기술을 넣을 수는 있지만, 실질적으로 넣을 필요가 없다.

그 때문에 소형 디스플레이 시장의 경쟁은 끝이 났고, 기술을 선도하던 기업들이 위축되기 시작했다. 후발주자들도 시간이 있다면 얼마든지 현재의 수준을 따라잡게 된다. 하지만 이 이상의 목표가 없으므로 굳이 더 나은 기술을 연구해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HMD에는 스마트폰보다 더욱 작은 크기, 더욱 높은 해상도의 스크린이 필요하다. 소형 디스플레이 시장을 선도해오던 업체들에 VR HMD의 도래는 또 한 번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소비자적 관점 - '고효율'과 '저비용'


처지를 바꿔 소비자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서동일 대표는 'VR'이 비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이와 달리 '고효율 저비용'의 장비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그는 그 이유로 'VR'이 단순히 '엔터테인먼트'에 국한되는 장비가 아님을 언급했다. 실제로 VR은 굉장히 다양한 분야에 응용될 수 있다. VR의 가장 강력한 이점은 '몰입감', 그리고 '현장감'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굉장히 큰 비용이 들거나, 위험할 수 있는 경험. 즉, 군사 훈련이나 여행 등에서 VR은 엄청난 비용 절감 효과를 가져올수 있다.

단순히 비용 문제가 아닐지라도, VR은 인류의 삶 자체를 보다 윤택하게 바꿀 힘이 있다. 고령으로 여행을 가기 어려운 노인, 공포증으로 놀이기구를 탈 수 없는 사람, 비용 문제로 꿈도 꾸기 어려운 우주여행까지. 인간은 '경험'을 통해 완성으로 나아가는 존재다. 분명히 실제 경험보다 VR이 나은 점은 없겠지만, 그 80%의 경험이나마 실제보다 훨씬 저렴하고, 위험 부담 없이 편하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엔터테인먼트'라는 면에서만 생각할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들이 다가올 것인가?

여기까지 이야기한 서동일 대표는 앞으로 VR 시장에 어떤 것들이 다가올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사용자 경험'을 말했다. 이는 VR 기술이 상용화될 때 당연히 따라올 기본적인 것이지만, VR이 가져올 모든 혜택과 이점의 기본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어 그는 'VR HMD'들이 점점 더 저렴해지면서, 동시에 관련 기술들이 성장한다고 말한 후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VR HMD 시장은 모두가 공인하는 '블루오션'이다. 많은 이들이 달려들고 있지만, 동시에 그만큼 빈틈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이 말이 아무것도 없는 이들이 지금부터 뛰어들어 대박을 내고 시장을 선도하는 대기업이 되기 쉽다는 말이 아니다. 서동일 대표는 '기술'과 '아이디어'라는 코드에 주목하며 강연을 이어갔다. 그는 '앵그리버드'를 만든 '로비오'를 예로 들었다. '앵그리버드'가 등장할 당시 모바일게임 시장은 난국에 가까웠다. '모바일게임'이라는 분야에 대한 '레퍼런스'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마트폰이라는 장치에 훌륭하게 적응한 '로비오'는 EA에 거액에 인수되었다.

서동일 대표가 말하는 점도 이 '인수합병'에 있었다. VR 시장을 선도할 욕심을 갖춘 대기업들은 모두 '기술'을 노리고 있다. 시장의 주도권을 거머쥐기 위해 미래가 보이는 기술들을 빠르게 접수해 자신들의 기술로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VR 시장 진입을 노리는 소규모 개발사들엔 좋은 기회가 되어 준다. 정확한 콘텐츠가 없다고 해도, 간단한 컨셉이나 '아이디어'만이라도 충분히 큰 자산이 될 기회라는 뜻이다.

위험 - 불확실한 미래


하지만 이 상황이 무조건 낙관적인 상황인 것은 아니다. 언제나 투자의 적은 '위험 요소'였고, VR 시장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위험 요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아직 소비자용 버전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VR 시장이 품고 있는 위험 요소 중에서도 가장 큰 부분이자, 모든 위험성의 알파이자 오메가라 할 수 있다. 아무리 훌륭해 보이는 시스템도 '검증'이 없이는 인정받지 못한다. VR 시장의 도래는 기정사실이지만, 과연 VR이 우리의 기대만큼 거대한 시장으로 커질 것인지, 혹은 그저 스쳐 가는 기술의 바람 중 하나로 남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또 한가지 위험은 소프트웨어적 측면에서의 '디자인'이다. 일반적으로 게임에 쓰이는 UI는 화면 외곽에 배치되기 마련이다. 화면 중앙을 가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VR 환경에서 UI를 외곽에 배치할 수는 없다. 인간은 보통 시야각의 15도 이상을 넘어가는 피사체를 볼 때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게 되는데, HMD는 머리가 돌아가면 화면이 같이 돌아가 버린다. 이 때문에 UI를 중앙에 집중적으로 배치할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이 경우 중앙 시야를 가려버린다는 치명적인 문제를 보여준다. '앵그리버드' 전의 모바일 게임 시장과 같은 상황이다. VR에 걸맞은 UI의 개발은 현직 개발자들에게 주어진 거대한 숙제일 것이다.

그 외에도 각종 자잘한 문제점들이 남아 있다. 비효율적인 배터리 소모나 해상도 문제, 그리고 VR의 사양을 따라가지 못하는 PC 사양 등, 실제로 VR이 생활로 녹아들려면 아직 많은 단계가 더 필요한 시기다.

준비는 되었나?

숨 가쁘게 이어온 강연. 서동일 대표는 한번 숨을 돌린 후, 마지막 화두를 던졌다.

"여러분은 준비되어 있습니까?"

하드웨어와 콘텐츠는 유기적 상호관계다. 하드웨어는 콘텐츠의 혁명을 불러일으킨다. 하드웨어의 개념이 바뀌는 순간, 콘텐츠는 그 새로운 하드웨어에 적응해나가고, 새로운 전기를 열게 된다. 동시에 콘텐츠는 하드웨어의 성장을 촉진한다. 콘텐츠가 제때 공급되지 못하는 하드웨어는 그 생명을 잃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순환의 고리는 이제 그 첫 바퀴를 굴러가려는 찰나다. 가상현실은 이제 현실이다.

강연의 마지막, 서동일 대표는 이렇게 말하며 강연을 마쳤다. "여기에 나와 있는 당신들은 VR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