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GDC의 멤버로 처음 확정되었을 때, 그 당시의 감정을 서술하라면 적당한 수식어를 찾을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해 복잡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게임 기자들에게 있어 'GDC'는 안목을 넓히고, 스스로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릴 좋은 기회다. 반면, 단점도 있으니 그냥 무지막지하게 힘들다.

그래도 정해진 이상, 싫다고 뺄 수도 없었다. 그냥 운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나니, 그때부터는 또 다르게 보였다. 이왕 가는 거, 어떤 강연들이 준비되어 있고, 내가 어떤 경험을 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는 '존 카맥'이 나와서 '기어 VR'에 대한 키노트 강연을 했던바 있다. 직접 강연을 기록하러 현장에 갔던 기자는 PPT 한 장 없이 스탠딩 강연을 이어가는 '카맥 스타일'에 고통 받았지만, 업계의 전설인 '존 카맥'을 실제로 보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좋은 경험을 남겼다.


올해 역시 비슷한 수준의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으리라 생각하고 나니 한결 부담이 덜했다. 그래 이왕 가는 것 더 멋진 경험을 하고 오는 게 최선이리라.

그렇게 강연 일정을 뒤적거리던 중, '어라?'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코너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GDC가 30년을 맞이하는 해다. 'GDC'에서는 매년 그 해를 기념할만한 강연을 스페셜 이벤트나 키노트로 배정하곤 했다. 그리고 올해는 바로 이 '30년'이 주제였다. 한 명씩 나와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가는 방식의 이벤트인데, 등장인물의 면면이 예사롭지 않다.

이벤트가 진행되는 웨스트 홀의 가장 큰 대강당은 말 그대로 '대강당'이 뭔지 확실하게 어필하는 스케일을 자랑하고 있었다. 축구장 하나가 통째로 들어가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라고 해야 할까. 족히 천 명이 넘는 업계인이 이 이벤트를 위해 모였음에도 꽉 찬 느낌이 없었다.


이벤트 시작 전, 강당을 환히 비추는 네 개의 대형 스크린을 통해 미처 이 자리에 오지 못한 네임드 개발자들의 특전 영상이 상영되었다. '구다라키 켄', '클리프 블레진스키'... 다들 많이 들어왔음에도 얼굴조차 제대로 모르는 내 머릿속 잊혀진 전설의 인물들이다. 마치 지미 헨드릭스를 직접 만나는 초년 음악가처럼, 부족한 잠이 심장을 쿡쿡 찌르는 와중에도 이유 모를 감정의 파문이 올라왔다.

9:30분. GDC의 공동 설립자이자 최초의 게임 디자인 서적을 집필한 '크리스 크로포드'가 연단에 올랐다. 그는 25년 전 게임을 만들던 당시와 지금을 비교하며, 당시의 기억들을 유머러스하게 늘어놓았다. 지금의 컴퓨터보다 6배가 넘게 비싼 가격이지만, 성능은 몇천 분의 1수준에 불과했던 컴퓨터로 작업하던 그 당시의 이야기.

그는 25년간 게임 산업이 어떤 '변화'를 겪어왔는지 논했고, 앞으로의 게임 개발 환경이 계속해서 변해나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25년 전과 비교해 컴퓨터와 콘솔 보급량은 열 배로 늘어났고, 태블릿은... 그 당시 태블릿은 '스타트랙'에만 있었으니까 무한대로 늘어난 거군요. 스마트폰은 스타트랙에도 없었으니 진짜 무한대로 늘어났네요. 뭐 어쨋든 게임 시장은 계속해서 변화할 겁니다. 이미 우리에게 변화는 익숙하니 말이죠. 아마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점이라면 제 인기 정도겠죠."

유머러스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마친 크리스 크로포드가 들어간 후, 고전 어드벤처 게임의 거장인 '로리 앤 콜'이 나와 '어드벤처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이벤트는 '강연'이라고 볼 수 없었다. 30년 전을 기억하고, 앞으로 30년을 이끌어갈 사람들이 나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강당에 들어선 수없이 많은 개발자와의 '공감'을 꾀하는 자리였다.

'그라엠 디바인'은 윈도우 부팅조차도 실패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며 개발자들과 웃었고, 'CD 롬'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놀라움을 다시 되살렸다. '필 해리슨'은 '플레이스테이션'을 처음 만들던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놓았고, 이에 대응하듯 '켄 롭'은 'XBOX'의 개발기를 풀어놓았다.

개발자들, 업계인들, 그리고 미디어까지. 강당에 들어선 사람들은 '게임'을 사랑하고 게임에 종사하고 있지만, 개개인의 업무 내용은 같지 않을 거다. 그럼에도 모두가 웃고, 그 옛날을 이야기하며 들떠 있었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연사의 말을 듣는 '강연'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 이벤트만큼은, 그냥 순수히 '게임'을 좋아하는 이들이 서로의 추억을 팔며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연사들 모두 다른 주제로 과거부터 미래까지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연사들의 등장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재미 이론'의 저자이자 '울티마' 시리즈를 개발했던 '라프 코스터'는 'MMO'와 오픈 월드에 대해 이야기했고, 'GTA'를 처음 만든 '데이브 존스'는 '전설의 시작'인 GTA를 개발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격투 게임업계의 네임드이자 '에보'의 공동 설립자인 '세스 킬리언'은 'e스포츠'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경험을 말했고, '그림 판당고'로 유명한 '팀 샤퍼'는 퍼블리셔와 개발자, 소비자 간의 삼자 구조와 '킥스타터'로 시작된 새로운 경제구조에 대해 논했다.

'과거'만이 소재는 아니었다. 이벤트의 주제는 '30년의 재조명'이었지만, 더욱 중요한 건 앞으로의 30년이다. '첼시 호위'는 SNG와 F2P의 부흥으로 게이머층의 전체적 팽창에 대해 말했고, '루크 머스캇'은 게이머층의 팽창으로 인한 기성세대의 우려와 게임에 대한 오해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큘러스'의 CEO인 '팔머 러키'는 다가올 VR 시대에 대한 기대와 앞으로 20년 후의 GDC를 상상하며 이벤트의 대미를 장식했다.

모든 연사들은 무대 뒤로 돌아간 상황이었고, 이벤트 시간은 예정되어 있던 1시간을 훌쩍 넘어가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쉽사리 강당을 떠나지 않았다. 불이 꺼지고, 스탭들이 현장을 정리하는 상황에서도 무대에 오른 이들이 지핀 '추억'와 과거에 대한 불은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었다. 힘들었던 시절, 그때는 그게 최고인 줄 알았기에 버텨낼 수 있었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들은 한없이 행복하게 웃고 있었고, 앞으로의 일을 논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다음 강연을 빼먹을 수는 없으니 자리에서 일어나 모스콘 센터를 가로지르는 사거리로 나왔다. 작년부터 꾸준히 보아온 모스콘 센터의 모습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한국인의 시선에선 더없이 파격적인 머리스타일로 돌아다니는 유럽인들, 치마를 입은 남자, 말끔한 정장과 타이로 멋을 낸 화이트칼라 흑인 업계인, 그리고 분주히 돌아다니는 중국의 업계인들과 히잡을 둘둘 두른 아랍계 여성 개발자까지.

모두의 출신이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 다르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오로지 '게임'이었으며, 되먹지 못한 영어 실력으로도 '게임'이라는 코드가 있기에 이들과 즐거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새삼 달라 보인다. 그저 스쳐 가는 외국인 정도였던 그들이 같은 길을 걷는 '동지'로 보이기 시작했다.

20년 뒤에도, 그 뒤로도 우리는 '게임'으로 하나가 될 수 있을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