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소재로 한 게임은 수도 없이 많다. 아마 '전쟁'이라는 행위 자체가 인류의 역사를 좌우해온 사건이기도 할뿐더러, 동시에 가장 금기시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많은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대부분 '군인', 혹은 '지휘관'으로서 전쟁을 다루게 된다. 무언가를 쏘고 부수고, 혹은 죽이는 것. 이 일련의 폭력적인 행위들을 정당화시키기에 전쟁은 참 좋은 핑곗거리다.

하지만 어떤 단어, 그리고 미사여구로도 전쟁을 미화할 수는 없다. 멋지게 보이는 전투와 명예는 모두 미망일 뿐, 실제의 전쟁은 그저 고통과 죽음만이 가득 차 있고, 파괴된 폐허만 남을 뿐이다. '디스워오브마인'은 전쟁을 다룬 수많은 게임 중에서도 이 남겨진 고통과 죽음에 대해 다루는 게임이다. 폴란드의 11비트 스튜디오에서 만든 이 인디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군인도, 지휘관도 아닌 '민간인'이 된다.

▲ 게임의 주인공은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민간인은 철저한 약자다. 그들에게는 어떤 무기도 주어지지 않았으며, 누구도 그들을 보호하지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낮에는 은신처를 보수하고, 밤에는 얼마 남지 않은 자원을 모으러 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보다 더 약한 민간인에게 물건을 뺏기도 하고, 때로는 나보다 더 강한 민간인에게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디스워오브마인'에서 이 일련의 과정들은 모두 플레이어의 선택에 달려 있다. 어떤 사람이 살아남고, 또 어떤 사람이 죽게 될지 모두 플레이어의 손에 달린 것이다. 기존의 틀을 벗어난 이러한 접근 덕분일까? '디스워오브마인'은 인디 게임임에도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며 다양한 상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네 명이 모인 작은 개발사였던 11비트 스튜디오가 50명이 넘는 중견 개발사가 된 것은 자연스럽게 따라온 성장일 뿐이었다.

'미하일 도르즈도프스키'는 11비트 스튜디오의 리드 디자이너이자 이사회의 이사로도 활동 중인 현역 개발자다. NDC2016의 마지막 날. 가장 큰 강연장의 강단에 그가 올랐다. 가장 성공한 인디 게임 중 하나인 '디스워오브마인'. 이 강연은 이 게임이 어떻게 만들어졌느냐에 대한 이야기였다.

▲ 11Bit Studio, 리드 디자이너 미하일 도르즈도프스키

11비트 스튜디오를 만든 네 명의 개발자들은 본래 폴란드의 그럴듯한 게임사에서 일하던 중견 개발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게임을 만들고 싶었고, 이 내용을 회사에 설득하기보다는 회사를 나와 직접 스튜디오를 차리기가 더 쉽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그들은 '아노말리' 등의 게임을 만들어내며 새로운 스튜디오로 경력을 쌓았다.

'디스워오브마인'을 기획한 것은 '새로운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다. 미하일과 그의 팀은 기존의 게임과 다른 전혀 새로운 게임을 만들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냈다. 전쟁을 다루지만, 군인이 아닌 '민간인'의 이야기를 다루게 된 것 역시 이런 '클리셰 비틀기'의 일환이었다. 당시 미하일의 팀에는 10여 명의 개발자가 있었는데, 이들은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마음껏 개진할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나온 서로의 아이디어에 공감했다. 결국, 이들의 기획을 들은 CEO는 개발을 허가했고, 이들은 전에 만들던 게임을 잠시 내려놓은 채 '디스워오브마인'의 개발에 집중하게 되었다.

▲ 그들의 새로운 도전, '디스워오브마인'

'문제는 어떤 게임을 만드느냐?' 였다.

그들은 당시 진행 중이던 시리아 내전을 비롯한 근현대의 여러 전쟁에서 영감을 얻었고, '전쟁'을 재해석하고자 했다. 하지만 게임의 방향성이 제대로 정해지지 않는다면, 개발을 시작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미하일과 그의 팀은 가이드라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여기서 만드는 가이드라인은 앞으로 이어질 개발 과정에서 흔들림 없는 방향 지침이 되어줄 '나침반'과도 같은 내용이었다.

컨셉부터 부서진 전쟁 게임의 상식은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과정에서 더 강렬하게 깨졌다. 이들은 게임을 만들며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될 '장르'를 결정하지 않았다. '장르'는 게임을 분류하기 쉽게 만들지만, 게임을 정형화시킨다. 미하일과 그의 팀은 이 게임을 어떤 장르로 만들어 구분하고, 이를 통해 장르 내 다른 게임들과 비교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 게임이 가진 내용을 전달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 이 '가이드라인'은 개발 과정에서 중심을 잡아 주었다.

그렇게 그들은 '디스워오브마인'의 컨셉을 하나씩 만들어나갔다. 그들은 게임을 플레이한 게이머들에게 여운을 남기고 싶었고, 그들에게 선택의 순간을 부여하고 싶었다. 동시에 이 선택의 순간에서, 손익을 계산하는 플레이를 하지 않고, 감정에 의존해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들려 했다. 물론 게임은 플레이어의 선택을 평가하지 않는다. 게이머가 스스로 만든 선택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게임.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디스워오브마인'의 모습이었다.

앞서 말했듯, 이 가이드라인은 굉장히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기획자가 뼈대를 만들고, 프로그래머가 근육을 짜고, 아티스트가 피부를 만든다면, 이 가이드라인은 '영혼'과도 같았다.

"게임을 개발하다 보면, 수없이 많은 아이디어가 생각나요. 이것도 넣고 싶고, 또 저것도 넣고 싶고. 그러다 보면 게임이 점점 초기의 모습을 잃어 가죠. 이때 게임의 개발 방향을 잡아줄 수 있는 핵심이 바로 처음 만들어둔 가이드라인이에요." 미하일은 게임을 통해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면, 언제나 그 초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기본적인 기획을 마친 그들은 '디스워오브마인'을 더욱 생동감 넘치고, 몰입할 수 있는 게임으로 만들기 위해 연구와 공부를 거듭했다.

▲ '디스워오브마인'이란 집을 채울 재료들을 연구해야 했다.

그들의 기본적인 연구 방향은 여러 차례 일어났던 과거의 전쟁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은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를 폭격했다. 코소보와 사라예보의 내전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덧없이 목숨을 잃었다. 개발 당시엔 시리아가 내전에 휘말려 있었다. 그들은 이 전쟁들을 살펴보며, 이런 전쟁들이 어떤 공통점을 가졌는지 연구했다. 전쟁 당시의 도시에서 말이다.

대개, 전쟁과 동시에 도시의 모든 인프라가 마비된다. 전기, 수도, 난방이 모두 끊긴다. 그리고 대다수는, 전쟁과 전혀 상관이 없는 민간인들도 공격을 받는다. 사라예보는 매일 민간인에 대한 폭격이 이어졌는데, 그곳에 살던 한 소녀는 박격포탄의 낙하 소리만 듣고도 탄의 종류와 피격지를 모두 알아맞힐 정도였다.

전쟁이 그저 군대와 군대의 충돌이 아닌, 민간인들에게 당면한 비극이었던 것이다. 당시 민간인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될 것이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가 비극을 겪었다. 뉴스로는 보지만, 실제로 체감할 수 없는 위험이다. 그래서 전쟁 발발과 동시에 이들은 먹이 사슬의 최하단에 있는 '약자'가 될 수밖에 없었고,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이들은 어떤 일이라도 해야 했다.

▲ 때로는 민간인들끼리 충돌하기도 한다.

이렇게 쌓인 자료와 경험담들을 게임으로 만들어나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존'의 코드가 들어갔다. 시계가 확보된 낮에는 무차별 공격이 퍼부어졌다. 저격수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저격했고, 군인들이 총을 난사했다. 그 때문에 이들은 밤에만 움직여야 했고, 그마저도 조심스럽게 이동해야 했다. 이 모든 경험담은 게임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여기서 11비트 스튜디오는 한 가지 결정을 했다. 그들은 게임 속에 '레벨 업'이나 능력치 등의 요소를 넣지 않았다. 인물에 따라 힘이 세서 더 많은 짐을 들 수 있다거나, 더 빨리 달릴 수 있긴 하지만, 이런 장점들은 고정되어 있고, 그 어떤 인물도 성장이나 발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저 민간인일 뿐, 슈퍼 히어로도 아니며, 훈련된 전사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선택 과정을 '예'와 '아니오'로 이분시켰다. 실제 전시에서, 모든 의사 결정은 굉장히 이른 시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문을 여느냐 마느냐, 도움을 주느냐 마느냐. 플레이어는 무엇이 더 나은 결정인지를 비교 분석해볼 시간이 없다. 그저 느낌에 따라, 혹은 양심에 따라 결정을 내려야 하며, 이 선택으로 말미암은 결과는 오롯이 플레이어의 책임이 된다.

▲ 어떤 선택을 하든, 책임은 플레이어의 몫이다.

나아가 전쟁 경험자들의 이야기에서 나온 굉장히 다양하면서도, 가슴 아픈 비극들을 전달하고자 각각의 등장인물에 배경 설정을 덧붙였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사소한 부분이지만, 미하일과 그의 팀은 이런 작은 요소들을 모아 하나의 큰 전쟁을 만들어내려 노력했다.

앞서 말했듯, 기존의 게임들이 갖고 있던 '상식의 파괴'도 이어졌다. 미하일과 그의 팀은 게임의 근본적 부분을 비틀었다. '게임은 재미있어야 한다.'라는 명제를 꺾어, '재미가 아닌 다른 감정으로도 게임을 하게 만들 수 있다.'라는 가설을 세웠다.

물론 게임에 있어 '재미'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미하일도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하지만 그는 희극이 있으면 비극도 있고, 행복한 결말이 있으면 슬픈 결말이 존재하듯, 게임 역시 다른 방식으로 감정을 불러일으켜 유저들의 게임 욕구를 고양할 수 있다고 믿었다.

▲ 때로는 비극도 동기 부여의 요소가 될 수 있다.

"게임은 굉장히 성숙한 문화 매체이며, 우리는 게임을 통해 어떤 메시지라도 전달할 수 있어요"

그의 말대로 게임은 그 어떤 메시지라도 전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디스워오브마인'을 통해 전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식견을 게이머에게 제시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전쟁을 조사했고, 전쟁을 겪은 이들의 이야기를 수집했다.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게임에 필요한 요소들을 하나씩 만들어나갔다.

하지만 이 게임이 어떤 메시지를 교육하는 것은 아니다. 각 플레이어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전쟁을 경험하고, 게임을 플레이하게 된다. 이를 위해 11비트 스튜디오는 플레이어의 결정에 따라 이점과 반대급부를 모두 만들어냈다. 플레이어의 결정이 누군가의 삶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비록 실존 인물은 아닐지라도)을 전달해야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누군가의 죽음 또한 이 의사 결정의 결과가 될 수 있었다.

▲ 누군가의 죽음 또한, 선택의 결과가 될 수 있다.

'디스워오브마인'의 게임 세계에는 '도덕성'의 잣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선택이든지 스스로 합리화할 수 있고, 동시에 어떤 선택이라도 들이대는 잣대에 따라 비난받을 수 있다. 결국, 게임의 흐름은 게이머 자신이 만들어나가게 되고, 게이머는 게임의 마지막에서, '파이널 로그'를 통해 등장인물들이 전후 어떤 운명을 맞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디스워오브마인'에 대한 미하일의 설명은 끝이 났고, 그는 강연장을 가득 채운 청중들을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게임이 아닌, 개발에 대한 이야기. '디스워오브마인'이 오랜 개발 기간 동안 흔들림 없이 목표를 향해 순항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처음 만들었던 '가이드라인'을 끝까지 놓지 않는 것이었어요. 동시에 디자이너 개개인의 개성과 생각이 게임에 적절히 반영될 수 있도록 서로 공감대를 찾아가는 일이었죠. 덕분에 우리의 게임은 처음 기획했던 바를 마지막까지 지킬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점점 더 멋지게 변할 수 있었어요"


그의 강연 시간 대부분은 강연의 주제인 '디스워오브마인'의 개발 과정에 할애되어 있었다. 하지만 강연의 막바지에서, 그는 이 모든 개발 과정이 자신을 포함한 여러 디자이너의 의견과 아이디어가 합쳐지면서 만들어진, 시너지 효과의 산물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디스워오브마인'이라는 게임 자체는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나 역시 게임을 구매했고, 꽤 오랜 시간 동안 플레이했지만, '내 취향'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참화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나갈 걱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심한 압박이었고, 이 과정에서 내가 내린 결정의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강렬한 '메시지'만큼은 잊을 수가 없다. 전쟁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온 내가, 비록 작은 부분이겠지만 직접 느낄 수 있었다. 전쟁에 대해 근거 없이 품고 있던 환상이 전부 사라진 것도 그때가 아니었나 싶다. 나아가 게임이 더 많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시대가 올 거라는 희망이 들었다. 적어도 '게임'을 단순한 쾌락의 수단으로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시선에서, 이런 강렬한 '메시지'의 전달은 게임 산업 전반을 이롭게 할 좋은 영양분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