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TV에 나오는 수많은 프로그램 중에서도 유독 시트콤을 좋아한다. 같은 등장인물들이 얽히고 얽혀 매번 유쾌한 에피소드를 만들어내고, 감동도 준다. 러닝타임 또한 짧아 매 회가 재밌다. 시트콤을 보면서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해봤다. 우리네 일상도 며칠을 압축하고, 재밌는 부분만 모은다면 시트콤처럼 재밌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우리의 일상과 수많은 아이디어가 모여 만들어지는 시트콤과는 비교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소소한 재미는 줄 수 있다. 일상을 떠나 머나먼 삼만리 타국에서 롤드컵을 취재하며 겪었던 이야기들은 술자리에서 안줏거리로 삼기엔 충분했다. 생각해보니 나의 일상은 e스포츠 팬들에겐 꽤 특별할 것 같기도 하다.

취재 현장에서 '페이커' 이상혁, '뱅' 배준식과 같은 이들을 만나는 게 일상이니까. 그들의 인기를 좀처럼 실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미국에서 그들을 만나자, 새삼 커 보였다.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들의 이름을 연호하고, 열광했다. 롤드컵 취재 도중 생겼던 몇 가지 소소한 이야기를 한 번 풀어보겠다.



에피소드 #1 비행기에서 만난 반가운 얼굴들

이번 시즌 삼성 갤럭시는 한 편의 드라마 소재와 같은 이야기를 썼다. 그 끝에 비록 우승이라는 두 글자가 없었지만, 그들이 두 시즌에 걸쳐 기초 공사를 마치고, 상성을 깨부수며 롤드컵에 진출한 이 이야기는 정말 묵직한 감동이 있었다. 여타 스포츠와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인물들의 개성은 또 어떤가. 만화 작가가 직접 캐릭터를 만든 것 같았다. 진짜 만화 같은 이야기가 현실로 일어난 것이다.

이전 소속 팀에서 매번 꾸준히 활약했지만, 롤드컵에 진출하지 못했던 '앰비션' 강찬용이 나태해진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팀을 떠나는 강수를 두고 택한 곳은 최하위권 팀인 삼성. 강찬용 영입 이후, 삼성은 거듭 발전을 해내고 압도적인 상대 전적을 가진 kt 롤스터를 가장 중요한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깨부쉈다. 한 명의 메이저 선수와 다른 마이너 선수들의 만남은 이 극적인 이야기에 조미료 역할만 했을 뿐, 그 자체의 이야기가 너무나 멋있었다.


하지만 어디에나 주연이 있으면, 조연도 있는 법이다. 비행기에서 만난 뜻밖의 인물은 삼성 갤럭시의 서브 원거리 딜러 '스티치' 이승주와 '헬퍼' 권영재였다. '룰러' 박재혁의 등장 이후로 이승주는 자연스레 후보가 됐다. '헬퍼' 권영재는 잠재력이 폭발한 '큐베' 이성진의 그늘에 가려졌다. 삼성의 주전들이 롤드컵 결승전까지 올라간 것을 보고 이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축하하는 마음이 드는 반면에, 동료가 너무나도 멀어진 것 같아 거리감을 느끼거나, 좌절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비행기에서 본 이승주와 권영재의 표정은 밝았다. 미국을 간다는 것에 들뜬듯했고, 동료를 응원해줄 수 있다는 걸 기뻐하는 것 같았다. 긴 비행 후 다소 지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표정은 밝았다. 스테이플스 센터를 가득 채운 15,000명의 관중 중 아마, 이승주와 권영재가 삼성 갤럭시를 가장 열정적으로 응원했을 것이다.



에피소드 #2 LA의 우버 기사들...


LA 도착한 후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왜 이곳에 왔느냐였다. 그때마다 나는 당당하게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 시즌6의 결승전을 보러 왔다고 답했다. 공항 직원들은 '그게 뭐지?'라는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내 주 교통수단이었던 우버 기사들은 롤드컵을 잘 알고 있었다. 첫 번째 우버 기사는 스리랑카에서 LA로 이민을 왔다고 했다. 스리랑카라니... 무한도전의 한 코너에서나 나오던 나라가 아닌가. 나는 한국에서 롤드컵을 보러 왔다고 하자, 그는 롤드컵 보다는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것에 집중해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알고 보니 그는 해군 출신으로 부산을 자주 오고 갔고, 부산에 많은 친구가 있다고 말했다. 부산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숙소 앞이었다. 서로 어설픈 영어로 주고받았던 이야기들이 재밌어 한 번도 꺼내지 않은 환전 봉투를 열어 2달러를 꺼냈다. 미국에서는 팁은 당연한 거라고 듣기도 했고, 왠지 멋있지 않은가? 당신의 봉사에 감사하다는 뜻을 부담 없이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그는 우버 기사에게는 팁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내가 끝까지 웃으며 땡큐를 외치자 기분 좋게 커피 한잔하겠다는 대답을 하고 사라졌다. 비행기 안부터 호텔에 도착하기까지 좋은 사람들을 만나 유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끝낼 수 있었다.

다음 날도 나는 우버를 탔다. 이번엔 중년의 미국인을 만날 수가 있었는데, 그는 나를 보자마자 롤드컵을 보러 왔느냐고 묻더니, 자신의 아들도 리그 오브 레전드를 즐긴다고 말했다. 내가 아들의 티어가 어디냐고 묻자, 잘 모르겠다고 한 걸 보니 브론즈일 확률이 높다. 실버만 됐어도 아빠에게 자랑하지 않았을까?



에피소드 #3 샤코와 조커의 차이


일행과 합류한 나는 스파이럴 캣츠와의 기분 좋은 인터뷰를 끝마치고, 스테이플스 센터 근처의 햄버거 가게 야외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정말 많은 사람이 코스프레를 하고 다녔다. 그러던 중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롤드컵이 열리는 곳인데, 다들 내가 모르는 게임 캐릭터의 코스프레를 하고 왔다.

아 그냥, 저런 복장을 갖췄다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일까?라 생각하고 다시 햄버거에 손을 뻗었다. 그때 뒤에서 샤코 두 명이 나타났다. 남자 샤코와 여자 샤코. 이를 보자마자 역시 내가 롤드컵에 왔다는 느낌이 물씬 들었다. 그래도 계속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다. 롤 캐릭터보다 내가 알 수 없는 캐릭터가 훨씬 많았다. 생각해보니 롤드컵도 다음날 열렸다.


알고 보니 스테이플스 센터 맞은편에 있는 LA 컨벤션 센터는 미국 만화와 서브 컬쳐의 성지였다. 롤드컵과 비슷한 시기에 코믹콘도 진행이 된 것이다. LA 코믹콘이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내가 아까 봤던 샤코는 샤코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랬다. 샤코가 아니라, 조커였고 분신인 줄 알았던 여자 샤코는 할리퀸이었던 거다. 문득 고교 시절이 영어 문제집을 풀다 봤던 지문이 떠올랐다.

'어떤 남자가 주황색 라벨이 그려진 음료수 캔을 열어 오렌지 주스라 생각하고 마셨는데, 맛이 이상해 음료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런데 음료의 라벨에 감귤 주스라고 적혀 있는 게 아닌가. 쓰레기통에서 다시 캔을 꺼내, 감귤 주스라고 생각하고 마시니 맛있는 감귤 주스였다'라는 내용의 지문이었다. 이 지문을 읽고 편견을 가지고, 사물을 봐선 안 된다고 다짐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잊어버렸다. 스테이플스 센터에서는 롤드컵이 열리니, 당연히 롤 챔피언 코스프레겠거니 생각했다. 참 신기했다.



에피소드 #4 'are you play?' & '페이커 센빠이'


축제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SKT T1의 유니폼을 구매해서 미국으로 갔다. 언제든지 태세 변환을 하기 위해 삼성의 유니폼도 구매하고 싶었지만, 팔지 않더라. 내가 좋아하는 '뱅' 배준식의 아이디가 새겨진 점퍼를 입고 있으니 절로 자신감이 생겼다. 어떤 코스프레어들에게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이 옷은 어디서 사는지, 정말 부럽다, 가지고 싶다 등의 이야기를 했다.

당연히 오해를 받지 않을 줄 알았다. 동료 기자가 시카고에서 삼성이 결승에 진출한 후, 'are you cuvee'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지만, 거짓말이라 생각했다. 삼성의 유니폼도 아니고, 롤드컵 봄버 자켓을 입고 다녔는데도 '큐베' 이성진으로 생각할 수가 있을까? 외모, 덩치 면에서도 많은 차이가 나는데. 그런데 진짜 해외 팬들이 보기엔 다 비슷해 보이나 보다. '뱅' 배준식이냐는 질문은 한 번도 받지 못했다. 외국인도 미추 구분을 잘하는 것 같다.

첫날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어디서 왔느냐?, 무엇을 하러 왔느냐라면 롤드컵 당일 날 20번 정도 'are you player?'라는 소릴 들었다. 굉장히 부담스러운 경험이었다. 나중에는 일일이 설명하는 것을 포기하고, 못 알아듣는 척을 했다.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다들, 해외에 갈 땐 선수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하나 정도 구매해서 가자. 해외 팬들이 친절하게 대해준다.


열정적인 오프닝 이후, 결승전이 진행됐다. 손에 땀을 쥐는 명승부 끝에 SKT T1이 세 번째 롤드컵 우승에 성공했다. 내가 있던 곳은 3층 취재 실이었는데, SKT T1의 승자 인터뷰는 지하 1층에서 이뤄졌다. 주섬주섬 장비를 챙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페이커' 이상혁이 소환사의 컵을 들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롤챔스 시즌 중에 숱하게 봤던 얼굴인데, 다시 정상에 오른 뒤여서일까. 존재감이 달랐다.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은 절로 들 정도였다. '너흰 이런 경험 못해봤지?'라고 말했을 때, 아니라고 답할 수 있는 이는 같이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고 있던 6명밖에 없다. 아, '쇽즈' 누나와 밀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한 것도 잊지 못할 것이다.

치열했던 롤드컵 현장 기사를 모두 마무리 짓고, 대로변에서 우버를 기다렸다. 경기가 끝나고도 1시간이 넘었는데, 스테이플스 센터 주위는 팬들로 여전히 붐볐다. 그러던 중 한 청년이 다가오면서 뭐라 뭐라 말하는 게 아닌가. 이번에도 'are you player'라는 질문이 날아올 줄 알았는데, 그 청년은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더라. 자랑스럽게 한국에서 왔다고 답했다. 그 순간 이 청년이 대뜸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바닥에 대더니 허리를 숙이는 게 아닌가. 100% 백인이었는데, 절을 했다.

일어나고 나서는 두 손을 번쩍 들고 '페이커 센빠이'라고 외쳤다. 나와 동료 기자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깐 당황했지만, 이내 두 손을 번쩍 들고 '페이커 센빠이'를 외쳐줬다. 주위에 있던 20명 정도의 인원이 다 같이 '페이커 센빠이'를 열 번 정도 외치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각자 갈 길을 갔다. 정말 맥락도 없고, 어이도 없지만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