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미너스 프로덕션 시니어 게임 디자이너 '선'

게임을 이루는 요소는 다양하지만, 보통 좋은 게임성을 이야기할 때 스토리를 먼저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재미있는 스토리는 이야기와 세계관, 캐릭터와 테마의 조합을 통해 만들어지는데, '파이널판타지15(이하 FF15)'에서 버디 시스템과 AI를 담당한 루미너스 프로덕션의 선임 게임 디자이너 '선'은 그중에서도 캐릭터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세덱 2018 세션을 통해 강단에 선 그는 현장에 참가한 모든 개발자에게 '캐릭터를 소중히 하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이번 발표를 준비했다고 소개했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스토리를 이끄는 핵심이 될 만큼 중요하며, 유저들에게 사랑받는 게임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캐릭터를 소홀히하지 않아야한다. 그렇다면 캐릭터를 소중하게 대하는 방법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는 유저가 미디어를 통해 캐릭터를 경험하게 되는 여러 방법을 고려하는, 이른바 'CX (Character experience) 디자인'에 주목했다. 유저와 게임 캐릭터의 연관성이 예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다양해졌기 때문에 그만큼 캐릭터를 표현할 방법과 가능성도 다양해졌다. 바로 이 가능성을 고려하여 게임을 디자인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CX 디자인식 사고라고 할 수 있다.

▲ 게임에서는 영화와 다른 형태의 캐릭터 디자인이 필요하다

감독이 의도한 의미를 영상을 통해 그대로 접할 수 있는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게임에서 유저는 게임을 구성하는 각각의 콘텐츠를 통해 부분적으로 캐릭터를 접하게 된다. 전투, 월드맵 이동, 컷씬의 콘텐츠는 저마다 다른 개발자들이 작업한 결과물이기 때문에, 각각의 이미지를 모두 합쳤을 때 유저가 느끼게 되는 캐릭터의 이미지는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

결국, 캐릭터를 유저에게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캐릭터가 게임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지, 캐릭터 경험에는 어떤 의미를 담을 지 사전에 미리 구상할 필요가 있다.

그는 파이널판타지15의 동료들을 작업할 당시, 먼저 전체 캐릭터 경험의 디자인에 착수했다고 소개했다. FF 시리즈는 특히 동료와의 관계가 중요시되는데, 신작인 15에서는 남자 캐릭터들만 바글바글 등장하기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CX의 방향성이 필요했다.

여기서 그가 정한 컨셉은 '반에서 잘나가는 녀석들의 그룹'을 유저가 게임을 통해 경험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바보처럼 떠들고 웃을 수 있는, 누구나 동경해본 전형적인 우정의 모습을 담는 것은 물론, 표면적인 우정에 그치지 않도록 신뢰·희생·유대의 감정을 담아 내면의 우정을 표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리하자면, FF15의 동료 컨셉은 파티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함께 있으면 즐겁고 없으면 아쉬운, '편한 친구들과 함께 모험하는 느낌'을 주는 것에 집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처럼 초반에 확정한 동료 컨셉을 개발 과정의 마지막까지 동일하게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 FF15는 반에서 잘나가는 '인싸' 그룹 체험을 컨셉으로 잡았다

다음으로는 '매력적인 캐릭터 디자인'이 필요하다. 그는 매력이라는 것은 결국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라며, 유저로부터 어떠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모든 것이 캐릭터의 매력이 된다고 말했다. 이때의 감정은 호기심과 호의처럼 긍정적인 감정은 물론, 적의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모두 포함된다. '더 알고 싶어, 더 함께 지내고 싶어, 응원하고 싶어, 저주하고 싶어' 등등, 그 캐릭터의 존재를 무시하지 못하고 마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캐릭터에 매력을 부여하는 첫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저의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캐릭터의 '표면적인 매력'과 '본질적인 매력'을 함께 충족해야 한다. 캐릭터의 본질적인 매력에 닿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데, 그 전에 유저의 시선을 캐치할 수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첫인상을 위해 표면적 매력은 매우 중요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본질적 매력만이 남게 되기 때문에, 표면적 매력의 효과가 가시기 전에 본질적 매력을 보여주는 것이 캐릭터 디자인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스테레오타입', 즉 고정관념을 이용하는 것은 캐릭터의 표면적 매력을 만들 때 활용할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첫인상만으로 캐릭터를 유저에게 알리고, 캐릭터의 성격이나 특징을 유저가 직접 상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경을 쓴 지적인 캐릭터, 근육질의 마초 캐릭터, 활발한 성격의 장난꾸러기 등이 이러한 이미지에 속한다. 선 디자이너는 FF15의 동료 캐릭터인 프롬프토를 예시로 소개했다.

프롬프토는 '분위기 메이커'라는 고정관념을 컨셉으로 디자인된 캐릭터로, 뭐든지 열심히 하고 강아지처럼 활발하며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 첫인상만으로 다소 가벼운 캐릭터라고 느낀 유저들은 의외로 손재주가 좋고 기계에 정통한 그의 모습에서 기존 인식과의 갭을 느끼고, 나아가 캐릭터의 본심인 '애달픔' 요소에 이르게 되면 비로소 프롬프토를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 "밝게만 보였던 캐릭터가 속으로는 이렇게 고민하고 있었구나"라는 숨겨져 있던 속마음의 이해와 함께 관계성이 정립되고, 캐릭터 자체에 더 큰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 캐릭터의 표면적 매력부터 본질적 매력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결국 전부 자료일 뿐이잖아?'라고 생각하는 이들을 위해 선 디자이너는 실제 FF15 속 모습을 통해 캐릭터의 매력을 강조하는 CX가 어떻게 반영됐는지 설명했다.

첫 번째는 스토리와 레벨로 표현된 캐릭터의 매력이다. FF15의 체험판에는 프롬프토와 녹티스가 버섯을 찾는 형태의 퀘스트가 포함되어 있는데, 여기서 프롬프토는 그저 유저 뒤를 따라다니며 힘들다고 불평만 늘어놓는다. 그는 체험판에 전투 콘텐츠도 있고, 퀘스트 기능도 포함되어 게임 경험으로는 절대 나쁘지 않지만, 캐릭터의 매력을 표현하는 측면에서는 최악이었다고 밝혔다. 프롬프토의 성격이나 매력은 하나도 강조되지 않았고, 그저 부정적인 이미지만 쌓였기 때문이다.

해당 퀘스트는 본편에서 CX 디자인을 적용해 캐릭터의 매력이 한껏 강조되는 형태로 개선됐다. 퀘스트에서 버섯을 찾는 이유도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프롬프토가 희귀한 동물의 사진을 찍기 위해서이며, 더이상 프롬프토가 유저의 뒤를 쫓지 않고 스스로 버섯을 찾아 돌아다닌다. 총 3개의 버섯을 찾아야 하는데, 프롬프토 혼자서 3개의 버섯을 전부 찾고 '이쪽이야!'라고 유저를 부르는 모습도 볼 수 있다.

▲ 오직 캐릭터의 매력을 알리기 위해서 전용 레벨을 추가하기도 했다

두 번째는 UI를 통한 캐릭터 표현이다. FF15에서는 메뉴 UI에 캐릭터의 모습을 크게 배치해서 각 캐릭터의 성격이 느껴지는 포즈나 움직임, 그리고 갤러리 느낌으로 꾸며진 이미지를 감상할 수 있다.

캐릭터 선택 화면의 UI에도 캐릭터의 매력을 강조하는 CX 디자인은 존재한다. 번잡하게 모든 캐릭터의 초상화를 넓게 늘어놓는 대신 현재 선택한 캐릭터의 모습을 크게 배치하는 것이 캐릭터의 매력을 소개하기에는 더 효율적이다. 이러한 디자인을 활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블리자드의 FPS 게임 '오버워치'가 있다.

이외에도 대전에서 패배했을 때 캐릭터의 굴욕적인 모습을 담기보다 승자의 멋진 모습을 하이라이트하는 것이 좋은 CX 디자인의 예다. 선 디자이너는 오버워치에서 경기가 종료됐을 때 나오는 다른 유저의 하이라이트를 보며 "저 캐릭터도 멋있네, 한번 해봐야겠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비록 경기에서는 패배했지만 멋있다고 생각한 다른 캐릭터들을 하나씩 접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는 것이다.

▲ 승자의 모습에 주목하는 것이 좋은 CX 디자인의 예

세 번째는 시스템을 통한 캐릭터 표현으로, 게임성을 더하기 위해 추가한 시스템에 캐릭터의 매력을 접목할 수 있는가를 고려하는 방식이다. FF15에서는 이그니스가 새로운 요리 레시피를 공부하고 습득하는 것으로 요리 시스템의 다양성과 캐릭터의 매력을 모두 담을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예로는 프롬프토의 사진 시스템이 있다. 이는 처음부터 게임성보다 CX에 목적을 두고 만들어진 콘텐츠로, 사진을 찍는 프롬프토 본인의 매력뿐만 아니라, 사진 속에 찍히게 되는 다른 동료들의 CX에까지 공헌했다.

▲ 사진 속에는 평소 보기 힘든 캐릭터들의 모습이 담긴다

네 번째 방식은 AI 활용이다. 유저가 어떤 행동을 해도 동료 캐릭터들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애초에 추구했던 '가까운 친구'라는 컨셉보다 인형과 함께하고 있는 듯한 어색한 느낌을 받게 된다. 동료 캐릭터들이 전투 중에 뒤를 돌아보거나 하는 간단한 동작만으로도 유저는 '저 캐릭터가 나를 신경 써주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이만큼 AI는 CX 디자인에서 중요하게 사용된다.

FF15에서는 동료 캐릭터의 앞으로 통과하거나 부딪히면 하나하나 반응해주는 모습은 물론, 가만히 서서 기다리더라도 자기들끼리 스스로 책을 읽거나 사진을 찍고, 용무를 보러 이동하는 등 자연스러운 AI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게임 밖에서 진행되는 캐릭터 경험이 있다.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를 활용한 별도의 에피소드를 통해 캐릭터의 성격이나 특징을 소개하고 알리는 CX 디자인이다. 게임의 흥행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을 수도 있지만, 게임 속 캐릭터의 매력을 강조하고 홍보하기 위해서 최근에 많은 작품에서 활용되고 있다. 블리자드에서도 최근 단편 애니메이션을 통해 오버워치의 캐릭터 중 하나인 '송하나'의 매력을 소개한 바 있다.

선 디자이너는 게임 개발자는 '커피 장인'과 같은 사람이지만, 앞으로 스타벅스와 같은 유명 프랜차이즈처럼 커피의 맛 이외에도 손님이 커피를 더 잘 체험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커피의 맛은 물론, 가게의 인테리어나 디자인, 매장에 흐르는 음악 등을 활용하여 '좋은 커피 경험'을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발표를 통해 강조한 캐릭터의 중요성과 CX 디자인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그는 캐릭터 경험을 살리는 것은 게임을 개발하는 모든 부서의 개발자들이 함께 고민해야 하는 일이라며, 앞으로도 게임 개발에서 캐릭터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