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내가 원하면 언제라도 게임을 즐길 수 있었던 시절.


오후 늦게 해가 중천에 떠야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창문 넘어 새내기 신입파티가 끝난 이들의 술주정과 오바이트가 간간히 들려오는 깊은 새벽에도 꿋꿋이 모니터를 사수하던 시절. 공격대장, 길드마스터 같은 직함을 하나씩은 가지는 게 당연하고, 내일 걱정 전혀 없이 게임동지와 밤새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야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던 시절...


하지만, 이미 다 지나간 추억일 뿐. 대부분의 유부남 게이머들이 현실 크리에 예전의 화려했던 게임 라이프를 반에 반조차 영위하지 못하고, 그저 과거를 회상하며 울부짖게 되는 것이 비정하지만 참혹한(?) 현 상황이다.


이 스트레스를 마땅히 풀 때는 없고, 괜히 게임웹진을 기웃거리다 애꿎은 게시판에 자신의 사연을 남기며 같은 처지의 유부남들을 소환해 고통을 호소하려는 모습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안구에 습기가 가득해지곤 한다. (아.. 잠시 눈물 좀 닦고..)


▶ [인벤 웹진 - 게이머 토론장] 해설피님의 "즐길 수 있을 때 즐겨라???"


롤플레잉 게임이라면 미친 듯이 파고 들었고, 특히 MMORPG라면 사족을 못쓰는 타입의 하드코어한 경력이지만, 퇴근하면 이미 해가 기울고, 귀가 후 식사하고 집안 일 정리하다 보면 시간은 안드로메다. 유부남 게이머에게 MMORPG는 3D 채팅 프로그램으로 전락하기 일쑤다.


식사준비부터 설거지, 청소, 빨래를 하는 중에도 눈치 없이 게임에 몰입하다가 날벼락을 맞은 후, 아파트 복도 창문에 서서 설움과 눈물의 담배를 한 개피 물며 생각했다. 이 땅에도 유부남 게이머를 위한 전용 컨텐츠가 하나 둘씩 생겨야 한다고.


그래서 어려운 용기를 내어 준비했다. 이 글의 제목은 "유부남 게이머에게 바치는 개념 롤플레잉 게임 3선"이지만, 원래 버전은 "가정의 화목을 그다지 깨트리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롤플레잉의 깊은 맛을 선사하는"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MMORPG는 게임 특성 상 발생하는 부작용을 도저히 상쇄할 자신이 없었기에 그 대상에서 일단 제외시켰다. 레이드한다고 정신 없어 현관 벨소리 못 듣고 밖에 10분 세워놨다가 일주일간 밥을 못 얻어먹을 뻔한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당부하지만, 오직 유부남 게이머의 관점에서, 유부남 게이머를 위해 쓰여진 글이니 관계없는 자는 백스페이스를 눌러도 좋다.





1. 폴아웃3 (2008, 베데스다 소프트웍스)






엘더스크롤 시리즈로 유명한 베데스다 소프트웍스가 2008년에 출시한 싱글 롤플레잉 게임이다. 왕년에 안해본 사람 없다는 1998년에 출시된 폴아웃2의 정식 후속작이면서 핵전쟁 이후의 세계관을 표현한 것은 동일하지만, 게임플레이는 완전히 다르다. 턴제 2D에서 벗어나 3D 액션 롤플레잉으로 구현되었으며, 폴아웃 특유의 S.P.E.C.I.A.L, Perks 시스템도 핵심만을 유지한 채 베데스다의 손길을 타고 새롭게 다듬어 졌다.


폴아웃3의 가장 훌륭한 점은 싱글 롤플레잉이지만 방대한 맵과 컨텐츠로 인해 MMORPG와 견줄 정도로 즐길거리가 풍성하다는 것. 베데스다 특유의 자유도와 각종 모드 지원은 영원히 끝이 나지 않는 (Endless) 모험을 할 수 있도록 하는데, 아마추어들이 제작하는 유저 모드 외에도 베데스다가 주기적으로 공식 모드를 DLC 형식으로 출시하고 있어 폴아웃3는 더욱 완벽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현재 총 5개의 DLC가 이미 출시되어 있는 상황. 정말이지 즐겨도 즐겨도 끝이 없다.


장시간 게임을 붙들 수 없는 유부남 게이머에게는 특히, 외부의 압력과 호출에 상관없이 언제라도 '게임중지'와 '저장' 버튼으로 현재까지 진행한 플레이를 남겨둘 수 있다는 것이 큰 매력으로 다가 온다. 정신없이 돌연변이들과 전투를 벌이던 중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라는 호출이 와도 잠깐 정지해 놓고 갔다오면 만사 오케이.


'왜 자꾸 집에서 게임만 하냐'는 잔소리가 들리면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을 때에는 얼른 게임을 중지한 후 온갖 애교 및 굽신 신공으로 수습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 물론, 성공한다면 바로 세이브 파일을 로딩해서 즐겁게 게임을 제개하면 된다. (대박이지?)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한글화가 되어 있지 않아 언어의 장벽이 있다는 점인데, 이미 출시된지 벌써 1년을 바라보는 시점인 만큼 네이버까페와 폴아웃3 한글 위키 등 정보가 활성화되어 있는 팬사이트도 많아 게임플레이에는 별 지장이 없다.


또한, PC, XBOX360, PS3로 각각 출시되어 있기 때문에 선택의 폭도 넓다. 물론, 사양이 좋은 PC가 갖춰져 있다면 PC로 플레이하는 것이 그래픽이나 '모드 추가' 면에서도 가장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래픽 설정 등에 골치 아플 필요 없는 콘솔도 괜찮은 선택이다. 참고로, 패키지 가격은 PS3 버전이 가장 저렴하다. 새 제품이 최저가로 25,000원 정도. 공식 DLC까지 고려한다면 폴아웃3 본편과 5개의 DLC가 몽땅 들어가 있는 GOTY(올해의 게임) 합본팩을 노려보는 것도 괜찮다. (10월 중순 출시 예정)






나름 최적화 또한 잘 되어 있어 9300M 정도의 그래픽 카드를 달고 있는 노트북에서도 적당히 돌아간다고 하니, 추석, 설날 연휴 등 짜투리 시간은 많지만 은근히 눈치보이는 시기에 회사일 하는 척 하면서 게임에 몰입할 수 있는 탁월한 기동성도 갖출 수 있다.


퇴근 후 의자에 앉아 총 한자루 쥐고 핵전쟁 이후의 웨이스트랜드(Wasteland)을 홀로 걷고 있을 때의 깊은 쾌감은 MMORPG에서도 느낄 수 없는 진한 감동을 준다. 싱글 RPG가 보여줄 수 있는 최정점에 도달한 폴아웃3의 매력에 한번 빠져보는 것을 어떨런지.





2. 데몬즈 소울 (2008, 프롬 소프트웨어)






정말 많이 고민했다. 죄를 짓는 기분도 든다. 과연 이 게임을 추천해야만 하는가?


일본의 프롬소프트웨어가 2008년 PS3 독점작으로 내놓은 롤플레잉 게임 데몬즈 소울은 개발자가 '변태'로 보일 정도로 유저들을 철저하게 괴롭히는 게임이면서, '소울', '쐐기신전', '데몬'이라는 시스템이 게임 내 세계관과 완벽하게 매칭이 되는 유일무이한 롤플레잉 게임이기도 하다.


죽고, 죽고 또 죽으면서도 패드를 놓지 못하게 하는 치명적인 중독성과 싱글 롤플레잉 게임이면서도 온라인 모드를 기본으로 지원해 다른 유저들과 같이 협력 플레이하거나, 다른 유저의 플레이에 침입해 PK를 할 수 있게 만든 설정, 그리고 '오직 소울이 장땡'인 독특하면서도 체계적인 캐릭터 성장 및 마법, 전투 시스템은 콘솔 RPG임에도 불구하고 모 콘솔게임 커뮤니티에서의 게시물 수가 18,000개를 육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자세한 게임플레이는 아래 리뷰 기사를 참고하면 된다.


[체험기] 악마의 영혼에 사로잡힌 인벤기자들의 기록

[투고] 인간의 심리를 꿰뚫는 게임! 데몬즈 소울 리뷰



데몬즈 소울의 이러한 하드코어하면서도 유일한 게임성은 최근 북미에서도 인정받고 있는데, 북미 출시를 앞두고 북미 매체들의 리뷰 점수가 대부분 90점 이상을 획득해 평균 91.23을 기록하고 있는 중이다.






롤플레잉 게임 치고는 이례적으로 한글화가 되었다는 장점 외에도, 앞서 말한 온라인 플레이 덕분에 콘솔 RPG인데도, MMORPG 특유의 거대한 세계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설레임과 다른 유저들과 함께 이 세계를 모험한다는 흥분을 어느 정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이 데몬즈 소울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단, PS3 독점작이기 때문에 집에 PS3가 없다면 몇 개월을 계속해야 끝이 날지 알 수 없는 설득 작업을 미리 각오해야 한다. 게다가, 끝내 설득에 성공한다고 해도, 40만원이 넘는 금액 때문에 '흡연' 혹은 '금주' 등의 조건이 붙을 가능성이 크다. 본인은 생일 선물로 콘솔을 하나 사달라고 했다가 앞으로 '영원히' 생일 선물이 없어질 뻔한 경험도 했기에 더욱 걱정이 된다.


또한, 세이브 없이 항상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게임플레이는 옆에서 급작스러운 질문을 던지거나 무엇을 잠깐 도와달라고 할 때 본의 아니게 무반응으로 일관하게 만들어 글 초반에 언급했던 '날벼락'이 닥칠 위험이 다분하다.






그게 아니라면, 스테이지를 거의 다 깼는데 잠깐 옆의 호출에 응했다 오니 캐릭터가 사망해, 몹이 다 살아나 있는 입구에서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때도 있다. (이거 한번 해보면 진짜 눈물이 난다.) 배경 사운드는 단조로운 편이지만, 깜짝 놀라게 하는 각종 효과 사운드가 압권이라 까딱 잘못하면 거실에서 영구 추방될 수 있는 것도 단점이라면 단점.


하지만, 한번 구입하면 몇 개월 동안 데몬즈 소울만 해도 질리지 않을 정도의 중독성을 보장해 주며, 개인적으로 롤플레잉 팬이 데몬즈 소울을 그냥 지나쳐 가는 것은 정말 큰 불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꼭 한번 해보기를 추천하는 바이다. 단, 추후에라도 여기 와서 '집에서 쫓겨 났네' '아내가 집을 나갔네' 등의 책임 추궁은 본인에게 절대로 하지 말 것!








3. 몬스터헌터 프론티어 온라인 (2008, 캠콤)


몬스터헌터 프론티어 온라인(이하 몬헌 온라인)을 롤플레잉 게임으로 볼 것인지는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키겠지만 개인적으로 레벨 시스템이 아예 없다고 하더라도 캐릭터가 아닌 캐릭터를 컨트롤 하는 유저가 성장한다는 요소는 몬헌 온라인을 가장 훌륭한 롤플레잉 게임으로 꼽는 이유가 된다.


밸런스가 잘 맞는 11가지 무기들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냐에 따라서 플레이 스타일이 완벽하게 바뀌고, 그에 따르는 재미가 배가되는 몬헌 온라인은 언뜻 보면 아이템 노가다의 진수처럼 보이겠지만, '헌터'와 '나 자신'을 완벽하게 하나로 결속시켜 주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온갖 설정과 장치가 난무하는 현대 롤플레잉 게임과는 달리 캐릭터와 몬스터의 체력 바도 보이지 않는, 진짜 살아있는 몬스터를 수렵하는 듯한 뼈 속까지 아날로그 정신으로 단단히 무장했기 때문이다. 그래. 그래서 더욱 끌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즐기기 위한 초반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점도 좋다. PC 기반에 한게임에서 무료로 서비스하고 있기 때문에 저렴한 'USB 게임패드' 하나만 장만하면 만사 오케이. 사랑받는 가장이 되기 위해 돈을 아끼고 키보드로 플레이하는 유저도 있다고는 하지만 거의 '신급'에 해당하니 여기서는 제외한다. PC 사양도 낮은 편이라 6600급에서도 쌩쌩 돌아가며, 별도의 그래픽 칩이 달린 노트북에서도 원활한 플레이가 가능하다.


가장 큰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몬헌 온라인의 플레이가 50분 단위로 끊어진다는 점이다. 각 퀘스트는 제한시간을 지니고 있고, 대부분 제한시간이 50분이다. 이는 곧, 어떤 몬스터를 공략한다고 하더라도 50분 안에는 끝나다는 의미다. 다른 유저들과의 온라인 플레이도 마찬가지다.


몬헌 온라인에 빠지게 되면 아이템 제작에 필요한 특정 재료 구할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가 되기에 (이쪽 세계에서는 이런 현상을 '물욕'이라고 부른다.), 플레이 시간은 여타 MMORPG 못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수렵 플레이가 50분 단위라는 것은 몇 시간 이상을 지속적으로 플레이하기 힘든 유부남 게이머에게는 정말 축복이다.






물론,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액션형 게임이기 때문에 데몬즈 소울에서 언급한 상황이 펼쳐질 가능성이 없지 않으며, 4명의 파티원 중에서 누구라도 3번 죽게 되면 퀘스트 자체가 종료되기 때문에 잠시 자리 비우고 돌아왔는데 차단리스트에 등록되어 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50분은 짧은 시간이지만, 중간에 한눈 팔기는 어렵다는 얘기고, 이는 좀 고민해 볼만한 사항이다.


지금은 국내 퍼블리싱을 하고 있는 한게임에 의해 많이 부분이 개선되었고, 몬스터헌터 인벤을 통해 다양한 양질의 팁들이 공유되고 있기 때문에 마음만 있다면 충분히 몬스터헌터의 매력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본산 게임 특유의 다소 불편한 인터페이스와 높은 초반 진입 장벽은 아직도 초보자 헌터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강하게 추천하는 것은 몬헌 온라인의 재미는 몬헌 온라인이 아니면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정말 독특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무기와 방어구를 직접 자신의 손으로 입수해 가면서 더 강력한 몬스터를 차례 차례 수렵해 나가는 플레이는 더 할 것 없이 원시적, 원초적이지만 그만큼 확실한 재미와 중독성을 '지속적'으로 제공해 준다.


또한, 자신만 마인드 컨트롤을 잘 한다면 (..) 짜투리 시간을 활용해서 지속적으로 플레이할 수 있고, 최대 4인 온라인 플레이가 가능하기 때문에 가족 중에 누구를 꼬셔서 함께 할 수 있다는 점도 몬헌 온라인의 장점이다. 사실, 여러가지 이유로 MMORPG는 가족들에게 권하기가 부담되지만, 몬헌 온라인은 50분 단위로 끊어지기에 한 시간 스타크래프트 한판 하는 기분으로 부담없이 즐길 수 있다. 게다가, 롤플레잉 특유의 성장과 도전까지 체험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가. (But, 뒷일은 책임 안짐.)



※ 댓글로 유부남 게이머의 한맺힌 사연 이나 유부남 게이머에게 적합한 또 다른 게임을 적극 추천해 주시면 추첨을 통해 원하시는 인벤 아이콘을 총 다섯 분께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안 그래도 서러운데 뭉쳐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