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임명 : 사이버펑크 2077(Cyberpunk 2077)
  • 개발 / 배급 : CDPR
  • 장르: 오픈월드 RPG/슈팅
  • 플랫폼: 콘솔, PC (GOG, 스팀)
  • 키워드 : #갓겜 #근미래 #오픈월드 #인조인간로보트

  • 얼마 전, 한 여류 바둑기사가 AI바둑 프로그램을 이용해 경기를 치르다 적발되는 일이 있었다. 1차적으로 해당 기사의 잘못은 맞지만, 뒷사정을 들어보니 전혀 이해가 안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바둑 신동, 천재, 유망주라는 타이틀을 달고 살아온 그 기사에게 바둑 외 인생의 선택지는 없었고, 생각처럼 성적이 나오지 않자 결국 선택한게 AI 프로그램이었던 거다.

    이렇듯, 지나친 기대감은 간혹 부정적 결과를 낳는다. 좋은 출발을 했고, 응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모였음에도, 종막에는 이상하게 변질된 결과가 드러난다. 폴란드의 개발사인 CDPR의 '사이버펑크2077(이하 사이버펑크)'가 딱 그 상황이었다.

    오랜 기간 이어진 제한적 정보 공개와 3번에 걸친 출시 연기, 그리고 CDPR의 끝 모를 자부심은 게이머들의 기대심리에 불을 당겼다. 기대가 기대를 낳고, 희망 사항이 뇌피셜이 되어가는 와중에 '사이버펑크'는 게임 이상의 무언가로 게이머들의 마음 속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점은, 이런 게이머들의 불타는 기대감을 두고 CDPR이 딱히 물러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그정도 까지는 아닌데요...'라며 한 번쯤 발을 뺄 법도 했건만, CDPR은 꾸준히 사이버펑크의 멋진 점만을 어필했고, 이런 CDPR의 태도는 안그래도 불타던 게이머의 기대심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되었다. 당연히 게이머들은 기대의 가운데 의심을 품었다. 세상에 그런 완벽한 게임이 있을 수가 있던가?

    그러면서도 게이머는 자신들의 의혹이 들어맞기보다 CDPR의 자신감이 옳기를 바랐다. 그렇게, 서로 승패를 공유하면서도 의심과 무시를 건네는 기묘한 치킨 게임이 시작되었다. 리뷰에 앞서 말하자면, 나 또한 그렇게 완벽한 게임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식 출시보다 약간 앞서 베타 코드를 손에 넣은 후, 가정이 있는 몸임에도 엠바고가 다가오는 시점까지 하루 10시간 이상을 오로지 사이버펑크에 쏟았다. 나는 게임의 '단점'을 찾고자 애썼다. 여느 분야의 평론가나 기자들이 그렇듯, 게임 기자도 게임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제시해야 한다. 좋은 게임이라 한들 장점만 주구장창 써서는 '그래서 얼마 받았냐'는 답글이나 달리는 게 게임 리뷰다. 어떤 게임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 법이었고, 리뷰는 이들의 가려운 곳도 함께 긁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50시간을 넘어 60시간에 가까워지는 플레이 타임 동안 단점을 찾지 못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베타 버전이기에 으레 보일 글리치나 사소한 버그, 스크립트 꼬임 등을 제외하면, 게임으로서 사이버펑크는 단점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번 리뷰는 장단점을 늘어놓으며 균형의 줄타기를 하던 기존의 여러 게임 리뷰와는 사뭇 다르다. 아마 이 리뷰는 끝내 단점을 찾지 못한 내가 CDPR에 보내는 항복 선언이자, 게임의 어떤 부분이 좋고, 그게 왜 좋은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는 수만 자의 설명문일 것이다.

    ▲ 과거를 만들면서, 게임은 시작된다.



    세계 구현도: 비디오 게임 사상 최고의 도시

    - 몇 킬로미터 밖은 설원이고, 반대로 몇 킬로미터 밖은 사막인 작위적인 세계가 아니다.

    - 평지를 기반으로 몇 개의 건물이 놓인 구조가 아닌, 고가도로와 고층 건물이 복잡하게 얽힌 구조의 도시다.

    - 동시에, 지역별 특색이 잘 드러나며, 사이버펑크가 전달하고자 하는 감성을 완벽하게 드러낸다.


    오픈월드 게임의 경우, 세계를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딜레마가 생기게 된다. 현실 속 세계는 게임으로 만들기에 지나치게 광대하고, 하나의 도시만 넣게 되면 무대가 영 심심해지기 마련이다. 비교적 잘 만든 게임에서도 이 딜레마는 여실히 드러난다. 기껏해봐야 읍내 수준이건만 세계 최대 도시라는 타이틀을 자랑하는 경우도 왕왕 보이고, 온갖 사람이 붐빈다는 지역에 기껏해봐야 열 명의 NPC만 우뚝 서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나이트 시티'는 이 한계를 돌파했다. 면적 상으로 나이트 시티는 그렇게 크지 않다. 단순 크기로만 치면 기존의 오픈월드 게임들과 유사한 정도. 도시의 끝과 끝의 거리를 재면 8 킬로미터 정도가 나오고, 도시 외곽의 배드랜드를 포함해도 특출나게 큰 크기는 아니다. GTA5의 배경인 '로스 산토스'보다야 크지만,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세계나 저스트 코즈의 월드 크기를 생각하면, 그리 크다 볼 수는 없다.

    ▲ 미니맵을 보면 그리 큰 도시는 아니다.

    하지만, 그 정도 크기임에도 엄청나게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보통 오픈월드 게임을 수십 시간 하면, 눈으로 훑기만 해도 지형이 감이 잡히기 마련인데, 나이트 시티는 말 그대로 볼 때마다 새롭다. 게임 플레이 중 업무 용도가 아닌, 그저 감탄해서 찍은 스크린샷만 해도 여러 장. 도시를 돌아다니는 사람의 수는 지역별로, 시간대에 따라 달라지며, 밀집도가 높은 경우 사람에 치여 플레이가 힘들었던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의 파리 수준까지 올라간다.

    동시에, 이벤트 밀집도도 굉장히 높은 편이다. 저스트 코즈 시리즈나 미들어스 시리즈처럼 넓긴 한데 껍데기만 있는 세계가 아니라는 뜻. 비록 눈에 보이는 모든 건물을 들어갈 수 있다거나, 하늘 높이 떠 있는 고가도로를 어떻게든 기어올라갈 수 있는 정도로 구현되어 있지는 않지만, 게이머들이 부족함을 느낄 만한 구석은 전혀 없다.

    ▲ 게임 속 곳곳의 스크린샷. 굉장히 다채로운 환경을 보여준다.

    나이트 시티는 오로지 '사이버펑크의 세계'를 드러내기 위한 모든 것들로 채워져 있으며, 그 이상의 것을 담지도, 그리고 필요한 것을 빼지도 않았다. 개연성 없이 존재하는 설원이나 우림 지역은 없다. 도시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거대 기업들의 어마어마한 사옥들과 화려하기 그지없는 특권층의 펜트하우스, 지린내가 날 것 같은 음습한 골목과 이미 수십년 전에 가동을 멈춘 친환경 발전기 터빈들, 기업의 강압적 행보로 아예 수몰되어버린 마을에 이르기까지, 게이머가 마주하게 될 나이트 시티의 모습은 사이버펑크가 드러내고자 하는 디스토피아로의 과도기에 머문 세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서사: 나이트 시티 속 천일야화

    - 엔딩에 이르는 메인 시나리오는, 가장 두꺼운 기둥에 불과하다.

    - V의 이야기를 풀어가며 게이머는 수많은 이들을 만나게 되고, 이들 모두 각자의 이야기와 사연을 지니고 있다.

    - 게이머의 모든 행적과 결정은 수많은 인과관계를 만들어내고, 엔딩에 이르러 이 모든 것이 폭발한다.


    얼마 전, 정보 유출에서 사이버펑크의 메인 퀘스트 볼륨이 생각처럼 크지 않다는 정보가 퍼져 많은 게이머들이 이에 실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진위 여부부터 따져보자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맞는 말도 아니다. 메인 퀘스트만을 빠르게 달릴 경우, 플레이 시간은 15시간 내외에서 정리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엔딩으로 직행할 경우 게이머가 보게 되는 엔딩은 그저 빈껍데기일 뿐이다. 사이버펑크라는 게임에서 '엔딩'이란 그간 게이머가 나이트 시티에서 일궈낸 성과와 행적을 모아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 V와 조니의 이야기는, 가장 가운데 있을 뿐 유일한 이야기는 아니다.

    사이버펑크의 이야기 구성은 총 세 단계의 층위로 구성된다. V가 중심이 되는 메인 퀘스트, 그리고 V와 관련된 주변인들과 얽히는 보조 퀘스트, 픽서의 의뢰를 받거나, 탐험 중 단서를 발견해 시작하게 되는 단발성 의뢰다. 이 중 메인 퀘스트의 비중은 높게 쳐 봐야 40%. 체감상으로는 30%정도밖에 되지 못한다. 사이버펑크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며, 메인 퀘스트는 이 중 주인공 V의 주요 이야기를 다룬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이트 시티의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사연을 지니고 있다. 가족처럼 지내던 이들에게서 추방당해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사람, 나이트 시티의 어둠에 환멸을 느끼고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 살아서 나이트 시티의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이와 죽어서 애프터라이프의 전설이 되고자 하는 자, 인류에 반기를 든 AI와 같은 AI에 반란을 일으킨 하위 AI, 그리고 그걸 인간한테 진압해 달라 부탁하는 AI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게이머를 기다리고 있다. 내 경우, 50시간을 했지만 아직 만나본 적도 없는 인물들도 다수 있다.

    ▲ 진짜 별에 별 꼴을 다 보게 된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는 게이머에게 전적으로 달려 있다. 플레이 40시간에 이르렀을 때, 혹시나 하는 호기심에 2회차를 시작해 10시간 가량을 추가로 플레이했다. 암살과 잠입 위주로 플레이했던 1대 V와 달리 2대 V는 고릴라 암즈와 야구배트를 주력으로 쓰는 몽둥이 V로 키워 몰입했는데, 1회차와는 너무나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다. 1회차에 어이없게 사라진 캐릭터가 조용히 호텔에서 보자며 문자를 보내는가 하면, 1회차엔 겨우 기회를 잡아 복수할 수 있었던 적을 만나자마자 처리하고 후환을 없앴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다채롭게 변할 지는 몰랐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과관계의 구성 또한 훌륭하다. 누군가를 잃었을 때 마지막 배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전화 한 통으로 끝날 수도, 혹은 성대한 장례식에 초대받을 수도 있고, 플레이 3시간 째에 내린 결정이 30시간 후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어떤 이와의 일처리가 다른 이와의 일처리에서 변수를 만들기도 하고, 이 와중에 '게임 오버'는 없다. 오로지 결과만 있을 뿐이다. 의뢰 대상이 죽이지 말고 살려서 데려오라 했는데 여의치 않게 죽이게 되어도, 해당 미션을 다시 플레이할 필요는 없다. 왜 일처리를 그렇게 했냐고 투덜대는 픽서에게 어쩔 수 없었다고 능청맞게 대답해주면 그만이다.

    ▲ 픽서들은 제각각 목표 달성과 돈만 신경쓸 뿐이다.

    얕게는 갱단 사이의 사소한 감정 싸움이나 분실물 회수부터, 깊게는 나이트 시티의 정치 내면과 대기업의 숨겨진 비리에 이르기까지, 사이버펑크의 서사는 모든 면에 고루 분포되어 있으며 그 모든 이야기들의 인과 관계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단순히 쳐들어가서 적을 족치는 구성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액션, 치정, 수사, 복수, 그리고 꿈을 이루기 위한 여정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이야기는 각각의 테마를 통해 나이트 시티의 여러 면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들이 모여, 엔딩에서 폭발한다. 사이버펑크에는 '해피 엔딩'이 없다. 그리고 '배드 엔딩'도 없다. 선택지는 존재하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이 모두 부질없이 흩어지는 엔딩은 게이머가 특별히 선택하지 않는 한 없다. 엔딩에 이르러 게이머는 지금껏 자신이 쌓아온 인물들과의 관계와 행적들을 다시 되새길 수 있고, 엔딩 후 이어지는 크레딧 롤에서 이들은 각자의 영상편지를 V에게 보낸다. 엔딩만 보고 달렸다면 받는 메시지의 수도 적을 테지만, 많은 이들과 추억을 만든 게이머의 엔딩은 크레딧 롤이 끝날 때까지 이어지는 영상 편지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 엔딩은 게이머의 게임 내역에 대한 성적표에 가깝다.

    이렇게 서사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사이버펑크는 어떤 생각도 게이머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교조적 메시지를 던지지 않는다. 복잡한 나이트 시티 안에는 특정 사상을 지닌 이들도, 사회에 반하는 이들도, 시스템에 순응하는 이들도 그저 존재할 뿐이다. 누군가는 도시에 핵폭탄을 터뜨릴 정도로 과격하지만, 또 누군가는 그래봐야 변하는 것이 없다며 불만을 삼킨다.

    사이버펑크는 게이머에게 '어떻게 하라'고 시키지 않는다. 의뢰를 주는 픽서들은 각자 개인의 성향에 따라 수단을 가리지 않는 픽서와 살인을 저질렀을 때 표정을 찌푸리는 픽서가 있는 정도이며, 의뢰와 임무를 주는 대부분의 동료들은 '이건 네가 선택할 일이야'라며 게이머의 결정을 지지한다. 모든 선택은 게이머로부터 이뤄지고, 모든 결과는 그 선택에서 나온다.

    사이버펑크라는 게임은 단 한번의 흔들림도 없이 그 위치를 정확하게 유지한다. 게이머의 사상이나 신념을 침범하지 않고, 게이머가 스스로의 행동을 정할 수 있고, 그에 대한 결과를 수용할 수 있도록 돕는 수준에서 게이머를 대한다. 나이트 시티를 심판할 것인지, 포용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오로지 나이트 시티를 가장 가까이에서 접한 게이머만의 오롯한 권리로서 남는다.

    ▲ 전투와 죽음, 배신과 타락뿐만 아니라, 가족과 사랑, 유대, 우정, 이상에 이르기까지 사이버펑크의 이야기는 너무나 다양하다.



    성장, 전투 시스템: '게이머'가 V가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 사이버펑크는 RPG와 액션 어드벤처의 중간이 아닌, 그 모든 것의 위에 있다.

    - RPG냐, 액션 어드벤처냐, 슈팅이냐라는 구분보다, 게이머의 몰입에 집중한 디자인

    - 총기 커스터마이징과 특전의 단순함은 약간 아쉬운 부분


    '사이버펑크'와 여타 다른 오픈월드 게임들을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점을 꼽자면, 다름 아닌 '주인공'의 정체성이다. 대작으로 꼽히는 그 어떤 오픈월드 게임과 비교해 봐도 사이버펑크처럼 주인공을 내 마음대로 튜닝할 수 있는 게임은 '엘더스크롤'이나 '폴아웃'시리즈 정도에 불과하다. 이유인즉, 같은 오픈월드 게임이라 해도 '액션 어드벤처'와 'RPG'중 어떤 장르를 본질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 진짜 '내 마음대로' 만드는 주인공 V

    '엘더스크롤'이나 '폴아웃' 등 베데스다의 경우 오픈월드를 배경으로 하는 RPG를 만든다. 'GTA5'나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의 경우 RPG가 아닌 액션 어드벤처로 장르를 표기하며, '어쌔신 크리드'의 신화 3부작의 경우 RPG라 표기는 하지만 RPG보다는 액션 어드벤처에 더 가까운 편이다. 대부분의 오픈월드 게임은 이 쪽에 더 가깝다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이버펑크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차마 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런 철지난 장르적 구분에서 탈피했다. 그냥 모든 부분을 제대로 만들어서 RPG와 액션 어드벤처 사이의 갭을 지워 버렸다.

    ▲ RPG 요소가 강하다 보니 간혹 이런 효율룩을 입게 된다.

    ▲ 괴로움 또한 게이머의 선택

    커스터마이징 화면에서, 게이머는 체격을 제외한 V의 모든 신체적 특징을 지정할 수 있다.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당연하고, 성기의 종류(?)와 크기, 심지어 음모의 모양까지도 고르게 된다. 게임 플레이에 별 영향이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게임 내에서 만나는 인물들은 저마다의 성 정체성과 지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선택이 훗날 연인과 친구 사이를 가른다.

    성장 시스템은 '스탯''특전'으로 구분된다. '스탯'은 신체, 반사신경, 테크, 지능, 냉정으로 구분되는 V의 능력치고, 특전은 이와 별개로 해당 분야에 특화된 스킬 트리다. 예를 들어 '신체'에 스탯 점수를 줄 경우 체력과 스태미너, 근접 피해량이 상승하며, 잠긴 문을 힘으로 뜯고 들어갈 수 있는 선택지가 생긴다. 반면 특전의 경우 둔기 피해량이 10% 올라간다던가, 은신 시 이동속도가 20% 빨라지는 등 보다 직관적인 혜택이다.

    ▲ 특전은 직관적이지만 단순한 편이다. 가내수공업 빌드를 타면 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벌 수 있다.

    성장의 방법은 두 종류, 의뢰와 임무를 통해 경험치를 쌓아 레벨을 올리는 것과 특전 분야에 맞는 행동을 반복해 숙련도를 올리는 것이다. 아이템을 계속 제작할 경우 제작 항목의 숙련도가 오르고, 숙련 레벨(최대 20레벨)에 따라 재료 소모가 줄어들거나 특전 포인트를 주지만 이 경우 스탯 포인트는 얻지 못한다. 경험치로 레벨을 올릴 경우엔 스탯 점수와 특전 포인트를 각각 1포인트씩 얻게 된다.

    이렇듯, 이원화된 성장 체계를 통해 온갖 기묘한 성장 트리가 생긴다. 다짜고짜 칼을 빼들고 달려드는 전국구 칼잡이가 될 수도 있고, 소음 권총으로 모든 일을 조용히 처리하는 킬러가 될 수도 있으며, 적을 죽이지는 않지만, 죽는게 낫도록 만들어주는 가부키의 몽키스패너가 될 수도, 스마트 무기를 쓰면서 퀵핵으로 적의 시스템을 모조리 태워버리는 사이버 마법사가 될 수도 있다.

    ▲ 안구 재부팅이라니...

    나아가 이 저마다의 성장 방식은 앞서 언급한 '서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준다. 테크 레벨이 높을 경우 픽서가 짠 계획에 조언을 해 계획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선택지를 열 수도 있으며, 은신에 많은 투자를 한 경우는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으니 무장을 단단히 하라는 픽서의 조언을 비웃고 단검 한 자루로 상황을 정리할 수 있다. 이런 V는 갇혀 있는 잠재적 아군을 구하는 건 힘들지만, 신체 능력을 높힌 V는 문짝을 손으로 잡아 뜯어 구출할 수 있다. 이렇게 구한 인물은, 차후 새로운 일거리를 물어다 주거나 임무 수행 중 도움을 주기 마련이다.

    게이머는 V에게 깊게 몰입할 수밖에 없다. 과거 행적부터 신체적 특징, 그리고 강점과 약점을 모두 게이머 본인이 선택하게끔 만든 시스템에, 마찬가지로 게이머의 선택에 굉장히 큰 영향을 받는 서사적 구조까지 더해지기 때문이다. 게임 시점이 1인칭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3인칭 애니메이션을 상황에 따라 만들어야 하기에 개발 코스트의 문제도 있겠지만, 3인칭 시점은 게임 주인공을 지속적으로 타자화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깊은 몰입에 어울리지 않는다.

    ▲ 1인칭은 몰입에 굉장히 효과적인 시점이다. 자막을 끄면 한층 더 좋다.

    전투 시스템으로 이야길 옮겨 보면 앞선 성장 시스템과 캐릭터 설정이 사이버펑크의 RPG적 면을 강조했다면, 전투 시스템은 사이버펑크가 지닌 액션 게임으로서의 역량을 여실히 보여준다. 슈팅 감각은 여느 FPS와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는 수준. '데스티니' 시리즈나 '둠'처럼 굉장한 슈팅 감각을 보여주는 수준은 아니지만, '보더랜드' 수준은 충분히 되는 정도다. 아쉬운 점이라면, 아이템 시스템이 슈팅보단 RPG를 따라가기 때문에 총기 커스터마이징의 폭이 그리 넓진 못하다는 정도일까?

    판정이 굉장히 빡빡한데다 탄 분산이 조준점을 따라가지 않고 랜덤으로 튀는 경향이 있어 FPS 치고는 퍽 어려운 편이지만, 숙련되면 총 한자루로도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근접 무기 또한 마찬가지. 근접 무기 관련 특전중엔 이동 시 방어력 증가 등의 방어적 특전이 많이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야구배트 하나로도 나이트 시티를 평정할 수 있다.

    ▲ 어지간한 슈팅 게임에 절대 한 밀리는 편

    게임 중반 이후에 접어들면서 이중 점프나 충전형 파워 점프 등의 임플란트를 부착하고, 맨티스 블레이드나 고릴라 암즈 같은 근접전용 팔 임플란트를 부착하게 되면, 게임의 장르가 또 한번 바뀐다. 이때부터는 맨몸으로 빌딩과 빌딩 사이를 날아다니며 무기 하나 없이도 모든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 근접 무기의 타격감 또한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생각 이상으로 훌륭한 편이다.

    2077년의 마법인 해킹 시스템도 발군. 어떻게 사용하냐에 따라 잠입 시 적의 상황을 파악하거나 눈을 가리는 용도로 쓸 수도 있고, 단순히 적을 불태우거나 감전시킬 수도 있으며, 데이터 포인트에서 돈과 데이터를 빼가거나 경계 시스템을 아군으로 돌려 버리는 등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다. 유비소프트에는 미안한 말이고, 개인적으로 유비소프트 게임의 팬이긴 하지만, 해킹 하나만 놓고 볼 때 사이버펑크가 와치독보다 더 나을 정도였다.

    ▲ 장비가 구려 전투가 어렵다면 채굴로 돈을 버는 방법도 있다.



    그래픽, 사운드, 최적화: 과함도, 모자람도 없는

    - 레이 트레이싱은 떡칠이 아닌, 제한적으로 적용되어 있으며, 덕분에 최적화는 나쁘지 않은 편

    - 각종 효과음은 만족스러우며, 음악은 게임 집중을 돕는 정도의 수준

    - 총기 커스터마이징과 특전의 단순함은 약간 아쉬운 부분


    그래픽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이버펑크의 그래픽 수준은 매우 뛰어난 편이지만, 세세하게 따지고 들면 현시대 최고의 그래픽이라 부를 정도는 아니다. '레이 트레이싱' 기능의 경우 모든 텍스처에 떡칠하기보다 느낌은 살리면서도 최적화를 위해 제한된 부분에만 사용된 것이 느껴지는 정도인데, 사실 끄고 게임을 해도 영 이상하거나 답답한 느낌은 없다. 어디까지나 켜고 할 경우 약간 더 좋은 정도의 수준이다.

    ▲ 레이 트레이싱을 켰을 때와 껐을 때의 비교. 건물 조명이 유리 바닥에 비춰진다.

    그 덕분인지 최적화는 당초 예상보다 훨씬 훌륭하게 이뤄졌다. 테스트에 쓰인 컴퓨터 사양이 꽤 좋은 편이긴 하지만(3900XT, RTX 3080, 32GB RAM) 슈퍼 컴퓨터라 부를 정도는 아니다. 어느 정도 투자한 게이머라면 충분히 수급할 정도의 성능인데 이 사양으로 2560 x 1080(21:9) 해상도에서 대부분의 경우 60프레임을 안정적으로 방어했다. 물론 레이트레이싱 기능을 포함해 모든 사양을 최고로 올려 놓은 상태였다. 최저로 떨어지는 경우에도 드라이버 업데이트 없이 45프레임은 완벽하게 막아내는 정도였다.

    세부 텍스처의 단계를 벗어나 거시적 관점에서의 비주얼 구성은 지금껏 나온 모든 게임 중에도 손에 꼽을 정도.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장점 중 하나가 고지대에서 바라보는 원경이 굉장히 뛰어나다는 것인데, 사이버펑크의 원경은 그 이상의 퀄리티를 보여준다. 엄청난 크기의 건물들과 대기권을 뚫고 솟아오르는 홀로그램 광고가 어우러진 모습은 다른 게임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압도적인 시각적 쾌감을 준다.

    ▲ 멀리 보이는 도시가 배경이 아닌 나이트 시티. 실제 거리는 그리 멀지 않지만 시각적 트릭 덕분에 굉장히 멀어 보인다.

    '사운드'와 음악을 보면, 모두 만족스러운 수준에서 총기 발포음이 유독 더 좋게 다가온다. 대물 저격총의 경우 쏘는 사람조차 깜짝 놀랄 정도인데, 흔히 게임에서 들을 수 있는 가공된 소음이 아닌, 예비군 훈련때나 듣는 실제 총기의 발포음에 굉장히 유사하다. 개인적으로는 이 발포음에 반해 한동안 대물 저격총을 들고 다녔는데, 격전 중에도 계속 쏘다 보니 동료 NPC가 아예 대포를 들고 오지 그랬냐고 핀잔을 주곤 했다.

    '배경 음악'은 무난하게 좋은 정도. 게임을 뚫고 나와 흥얼거리게 될 정도로 중독성 높은 음악은 찾기 어려웠으나, 상황에 따라 적절한 음악 배치가 이뤄져 있어 게임에 집중하기엔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준다. 첨언하자면, 게임 내에 음악이 주가 되는 콘텐츠가 꽤 많이 준비되어 있다. '조니 실버핸드'의 락 음악은 물론이고, 일본 아이돌이 자신의 곡을 커버하는 상황에 분노를 드러내는 옛 락의 전설까지, 이 콘텐츠 내에서 쓰인 음악들은 '배경' 이상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배경 음악보다는 더 도드라지는 편이다.

    ▲ 배경 음악은 두드러지지 않지만, 음악 자체가 콘텐츠의 소재로 쓰이는 경우는 꽤 있는 편이다.

    전체적으로, 앞서 CDPR이 공개한 사양에서도 게임은 무리 없이 구동될 것으로 추측된다. 엄청나게 많은 광원과 도시에 드글거리는 NPC들이 컴퓨터 리소스를 갉아먹지만, 이 모든 것을 옵션을 통해 타협할 수 있다. 또한, 최저옵의 경우도 게임을 플레이하지 못할 정도로 대책없이 게임이 무너져 내리지 않으며, 오히려 어지간한 게임보다 나은 그래픽을 자랑한다.

    약간 아쉬운 점을 꼽자면 두 가지가 있다. 일단 저사양 컴퓨터에서의 구동을 실제로 확인하지 못했다. 리뷰 빌드의 경우 보안이 걸려 있어 컴퓨터를 옮겨 재설치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구동 환경을 조절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를 확신할 수 없었기에 추측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유는, 성우들의 연기가 매우 좋은 점은 인정하지만, 성우들의 욕설이 비교적 어설프다는 점 때문이다. 아무래도 국내 성우들은 리미터를 해제하고 욕설을 뱉을 일이 워낙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었으리라 생각되긴 하지만, '지금부터 나는 욕을 할 것이다'라는 성우분의 심리 상태가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연기 자체는 충분히 훌륭했다. 그저 욕설에 약간의 구성진 감성이 포함되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정도의 아쉬움이다.

    ▲ 욕설이 정말 많이 나온다. 매우 뚜렷한 발음으로



    총평: 앞으로 수 년은 '기준'이 될 게임

    말미에서 말하자면, 이번 리뷰는 그 어떤 게임의 리뷰보다 작성이 힘들었다. 여러 게임의 리뷰를 써오면서 때때로 쓸 내용이 너무 없어 억지로 내용을 쥐어짠 적도 있고, 분노에 가득차 키보드를 휘갈긴 적도 없지 않지만, 사이버펑크의 리뷰는 성격이 약간 다르다. 쓰고 싶은 내용이 너무 많아 잔뜩 풀었던 내용을 스스로 돌아보며 지우고 절제했건만, 아직도 엄청난 양의 텍스트가 남아 있다는 것도 고민이며, 이렇게 썼음에도 이 게임의 좋은 점을 모두 드러내지 못했다는 불만족이 두 번째 고민이다.

    ▲ 플레이를 거듭할수록 감탄만 나온다.

    너무나 좋은 게임이고, 훌륭한 게임이지만 리뷰어에게는 이보다 더한 폭탄이 없다. '어떤 게임도 모든 게이머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명제의 절대성과 '도대체 이 게임이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 사람이 있을까?'라는 의문의 갈등을 만들었으며, 코드 수령 후 엠바고가 풀리는 순간까지 게임을 파고들었음에도 '어딘가 내가 발견하지 못한 중대한 결함이 있는데 내가 모르고 리뷰를 쓰게 되는게 아닐까?'라는 불안감을 싹틔웠다. 차라리 딱 단점이 보이면 나으련만, 아쉽게도 나는 단점을 발견하지 못했고, 단점이 아닌 부분을 억지로 깎아내릴 수도 없었다.

    초반 단점이라 여겼던 차량 조작감은 차량 종류와 노면 상태에 따라 조작의 무게감과 스티어링 감각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을 깨달으며 오히려 장점이 되었고, '신화 아이템'에 대한 무지로 해당 아이템을 몽땅 갈고 나서 '왜 이런 설명은 넣어주지 않았을까?'라는 불만은 2회차 플레이 때 충분히 설명했지만 내가 그냥 대충 넘겼다는걸 깨닫고 쑥 들어가 버렸다.

    게임에 대한 CDPR의 끝없는 자신감과 과한 기대심리에 대한 게이머들의 의심. 대치되지만 승패는 공유하는 이 기묘한 대립에서, 내가 심판이 될 수 있다면 나는 CDPR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그만큼 만족했고, 그만큼 감탄했으며, 앞으로 수 년은 새로운 게임이 등장할 때, '사이버펑크보다 나을까?'라는 기준이 될 정도로 대단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망설일 필요가 없다. 2일만 기다리면 된다. 일단 사고 게임을 시작하면, 어느 순간 과거의 망설임이 우습게 느껴지는 때가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