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부남 게임 기자로 산다는 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아내도 게임 좋아한다면 모를까. 모바일 퍼즐 게임 몇 개만 아는 정도라면, 정말 눈치 보고 살 각오 해야 한다. 내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게임 기자를 남편으로 둔 아내의 삶도 고달프긴 마찬가지다. 철없는 남편은 저녁 식사 끝내자마자 컴퓨터를 켠다. 게임 할 거면 그냥 얌전하게라도 하던가, 몇 판 졌다고 나라 잃은 표정 나온다. "아니, 즐겁자고 게임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화낼 거면 게임은 왜 하는 거야?" 다시 말하지만, 난 절대 이런 말을 아내에게 들어본 적 없다.

저게 내 이야긴 아니지만, 또 한 명의 유부남 게이머로서 기자 역시 게임 라이프를 지키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당연히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아내는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겜알못이었고, 누구라도 깰 거라 예상한 '슈퍼마리오 갤럭시' 연습 스테이지에서 9번쯤 죽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한껏 찌푸린 아내의 미간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나는 조용히 게임을 끌 수밖에 없었고, '게임은 혼자 해야 제맛'이라며 애써 자위했다. 그렇게 나의 게임 라이프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아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유지되어왔다.

1월 21일, 괴혼 한국어판이 스위치로 나온다는 얘길 듣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04년 출시작인 괴혼에 뭘 기대하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이 게임, 해본 사람은 안다. '접착 액션'이라는 장르명부터 그래픽, 심지어 조작법까지 어디 하나 평범한 구석이 없다. 대학생 시절, 내가 처음 괴혼을 하면서 들었던 그 감정이 지금도 든다면? 그래, 게이머보단 일반인에 가까운 아내에게 맞는 게임은 오히려 이쪽일지도 모른다.



괴혼을 모른다고? 간단히 말해 '쫀드기 공에 점점 큰 거 붙이는 게임'이다. 눈사람 만들 때 작은 눈덩이 굴리고 굴려서 키워나가는 거 생각하면 된다. 뭐 이리 성의가 없냐고 되물을 수 있겠으나, 정말 괴혼은 저게 전부다. 범상치 않은 캐릭터 디자인, 아스트랄한 스토리, 달달하게 중독되는 배경 음악까지 갖출 거 다 갖췄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 괴혼은 게임플레이 그 자체가 핵심이며, 나머지는 괴혼의 신묘한 게임플레이를 더 돋보이게 해주는 조연일 뿐이니까.

핵심 기획 한 줄만 놓고 보면 하이퍼 캐주얼에 가까운 단순한 구조. 여기에 '쫀드기 공보다 큰 건 붙일 수 없다'는 전제와 의외성 다분한 조작감이 어우러지며 괴혼만의 레벨 디자인이 완성됐다. 공의 크기에 따라 같은 스테이지라도 갈 수 있는 곳과 못 가는 곳이 구분되며, 풍성하면서도 입체적으로 배치된 오브젝트 덕분에 로그라이크 게임 못지않은 변수로 가득하다.

기다란 칫솔을 붙였다고 해보자. 칫솔 막대 부분이 바닥에 걸릴 때마다 공이 툭툭 튀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평지에선 잘 조작도 안 되고 불편한 게 사실이나, 이게 평소 올라갈 수 없었던 계단이나 문턱을 오르는 데 생각지 못한 도움이 된다. "그럼 시작과 동시에 칫솔 먹어야겠네!" 라고 할 수 있는데, 칫솔이 걸려서 좁은 책상 틈새나 서랍장 사이에 들어갈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예시만 보면 무슨 RTS 빌드 업하는 것처럼 칼같이 계산하고 플레이하는 게임처럼 보일 수 있으나,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외형에서 알 수 있듯, 애초에 그런 빌드 업까지 계산해가며 오브젝트 깐깐하게 배치한 게임이 아니다. 아울러 패드 양쪽 아날로그 스틱을 모두 활용하는 괴혼만의 조작법은, 액션 게임 생초보나 마니아 모두에게 비슷한 수준의 '불편함'을 제공한다.

쉽게 말해, 공이 내 맘대로 잘 안 굴러간다. 뭘 먼저 붙여야겠다는 생각에 앞서 이미 쫀드기 공에 이것저것 덕지덕지 붙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니 그냥 편하게 하면 된다. 아까도 말했듯, 괴혼의 재미는 공 굴려서 뭘 붙인다는 것에 있지, 이러한 빌드 업 과정에 있는 게 아니다. 작은 공 시절, 감히 처다볼 수조차 없었던 자동차, 건물 등을 철썩철썩 붙여나갈 때 느껴지는 쾌감이야말로 이 게임의 전부이자 정체성이다.

어쨌든, 내 아내는 '공격력 120에 방어 관통 40, 치명타 확률 15% 증가한 검' 같은 것보다는, '굴리고 붙이는 쫀드기 공'을 더 좋아했다. 나름 액션 게임 많이 해본 기자도 적응이 쉽지 않았던 아날로그 스틱 조작법 또한, 콘솔 게임을 해본 적 없는 아내에겐 오히려 직관적으로 다가간 것 같았다. 내가 잘 쓰지 않았던 몇몇 기술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모습을 보면서 살짝 놀라기도 했다.

처음 게임을 설명할 때만 해도 뚱한 표정으로 "이 게임, 망했지?"라며 온몸으로 심드렁함을 표현했던 아내는, 어제 TV 앞에서 꼼짝 않고 2시간 가까이 괴혼을 했다. 내 아내를 이렇게 만들 정도라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2004년 출시된 괴혼의 게임플레이가 2021년에도 충분히 통할 수 있고 특히 플레이어가 일반인이라면, 우리가 예상치 못한 효과도 줄 수 있다는 것을.

괴혼은 개발사 반다이남코조차 성공을 기대하지 않았을 정도로 비범했던 탓에 이렇다 할 아류작도 없었다. 대체재가 없으니 괴혼의 재미는 오직 '괴혼'에서만 느낄 수 있다는 의미다. 그 맛을 오롯이 유지한 시리즈 1편이 3만원 대라는 비교적 착한 가격에 출시되었다는 점은 칭찬할 만 하다.

시대를 불문하고 재밌고 신선한 게임을 찾는 유저에게 추천한다. 게임 잘 모르는 여자친구와 함께 할 게임을 찾는 유저에게도 추천한다. 기자가 눈치 덜 보고 게임할 수 있게 도와준 괴혼이 고마워서 쓰는 글이 아니다.

▲ 고. 맙.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