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구들과 가상화폐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시작할 땐 잃어도 되는 돈이라며 얘기하더니 2분마다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하는 녀석도 있고, 용돈벌이했다며 이 자리는 내가 사겠다는 친구까지. 나는 워낙 가상화폐에 관심이 없다 보니 자연스레 그래픽카드 대란 얘기를 꺼냈지만 친구들은 "그게 뭔데"라는 반응이었다.

역대 최대의 가격 상승률, 최장기 재고 부족을 나날이 갱신하고 있는 그래픽카드 대란. 이 사태 때문에 게이머 세상을 위한 내 기사 소재는 고갈되고 있으며 IT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곡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는데, 일반인은 정작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약간 괴리감이 오더라.

그래픽카드 대란은 코로나19로 인한 제품 생산 부족 혹은 글로벌 재택근무로 인한 PC 수요 급증 등이 원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큰 주범은 가상화폐의 종목 중 하나인 '이더리움 채굴'이라고 생각한다.

비트코인의 가격이 급작스레 상승함에 따라 이더리움을 포함한 대다수의 가상화폐의 가치가 폭등했으며, 이와 함께 RTX 30시리즈의 출시로 인해 이더리움 채굴 효율이 늘어났다. 작업장같이 큰 규모에서나 수지타산이 맞던 이더리움 채굴이 해당 가상화폐의 가치가 급상승함에 따라 가정용 전기로도 채굴 효율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 시점부터 모든 그래픽카드의 재고가 메마르기 시작했다.

▲ 가상화폐의 메인 격인 비트코인보다 인기 많은 종목, '이더리움'

▲ 가정용 6way 마이닝 케이스. 유명한 제품들은 없어서 못 팔 정도

▲ 채굴 전용 그래픽카드라 디스플레이 출력 단자가 없다. 제품은 '기가바이트 CMP 30HX'

그래픽카드 대란의 구원투수가 될 수 있었던 사건이 하나 있었다. 엔비디아에서는 올해 2월 말 RTX 3060를 발표하며 해당 제품은 이더리움 암호 화폐 채굴의 알고리즘의 속성을 감지하여 해시 속도를 줄이는 방법을 통해 채굴 효율을 50%까지 제한하도록 설계됐다고 얘기했다. 물론 IT 팬들은 의심 혹은 걱정 가득이었지만 가상화폐 채굴용 그래픽카드인 '엔비디아 CMP' 라인업을 발표하기까지 했으니 일단 믿어보자는 여론이 강했다.

하지만 점차 그래픽카드의 가격이 안정되리라고 생각한 게이머들의 기대는 무너졌다. 3060의 채굴 성능 제한을 풀어버리는 코드가 내부 부주의로 인해 유출되었다는 내용으로 말이다. 이후에도 다양한 문제점들이 해결되지 않았고 결국 3060도 온전한 채굴 성능을 자랑하는 제품으로 사용되고 있다.

RTX 30 시리즈에만 국한될 줄 알았던 그래픽카드 대란은 20시리즈를 넘어 이제는 무조건 2~3배의 웃돈을 주고 구해야 하는 상황이다. 메인스트림 라인업인 RTX 3070은 정가인 80만 원 대에서 현재 185만 원, 이전 세대인 2060S는 정가인 60만 원 대에서 현재 110만 원, 1660S는 정가인 32만 원대에서 현재 78만 원, 저사양 게임계의 가성비 제품이었던 RX 570은 정가인 19만 원 대에서 현재 50만 원대에 판매되고 있다. (21.05.26 기준)

▲ 2배를 넘어 공식 가격의 3배 이상에 판매되고 있는 그래픽카드. 이마저도 없어서 구하기 어렵다

이에 엔비디아에서 한 번 더 칼을 꺼내들었다. 게이머들을 위한 라인업, 'RTX 30 LHR(Lite Hash Rate)' 시리즈로 말이다. 3060 출시 당시에는 소프트웨어를 통한 채굴 성능 제한을 시도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이번엔 하드웨어적으로 채굴 성능을 제한하는 방식인 LHR 칩이 탑재된 그래픽카드를 판매할 예정이다. 공식 발표된 제품은 3070Ti, 3080Ti 모델이며, 5월 18일 제품 공개를 예고했었지만 해당 일정이 밀린 이유도 해시레이트 제한과 관련되어 있다는 루머가 있을 정도로 신빙성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래픽카드의 가격이 원래대로 돌아오려면 적어도 내년은 되어야 된다는 의견이 많으며, 일각에서는 채굴 성능이 반토막 나더라도 이더리움의 채굴 효율에 따라 채굴 그래픽카드로서의 가치는 유지할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소비자들은 LHR 그래픽카드의 공식 가격에 대해서도 걱정하고 있다. 현재 폭등한 그래픽카드 가격만큼은 아니겠지만, 작년 10월경에 출시된 가격으로 공급될지는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그래픽카드 가격 안정화가 되는 과정에서 쏟아지는 중고 그래픽카드에 대한 구입도 주의가 필요하다. 이더리움 채굴은 과부하가 큰 고사양의 작업이기 때문에, 만에 하나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중고 혹은 리퍼 제품을 생각하고 있다면 다시 생각해볼 문제다.

A/S 기간이 지난 중고 제품이 가장 위험하며, 그 외에 구입할 제품이 채굴에 사용되었는지 확인하는 방법도 모호하다. 외관의 스티커 훼손, 그을림, 묵은 먼지 등으로 파악하거나, PC에 연결하여 채굴롬 흔적을 확인하는 방법 정도가 전부이며 100% 판별이 가능한 방법은 아니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엔비디아에서는 5월 31일 채굴 성능이 제한된 LHR 라인업의 3070Ti와 3080Ti를 발표할 예정이다. 6월 2일에는 3080Ti, 6월 9일에는 3070Ti의 성능 리뷰를 IT 미디어를 통해 공개할 예정이다.

▲ 이번엔 정말 내 손에 들어올거니...? RTX 30 LHR 출시는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