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게임 장르 중에서도 호불호가 크게 나뉘는 공포 게임이지만 유명세를 타면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게임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아웃라스트나 엘런 웨이크가 있죠. 그중에서도 프릭셔널 게임즈의 암네시아 시리즈는 분위기로 모든 것을 압도해 공포 게임의 정석을 보여주며, 명작으로 꼽혀왔습니다.

지난 6일 정식 출시된 '암네시아: 더 벙커(이하 더 벙커)'는 암네시아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쟁에 참여한 군인이 주인공인 만큼 시리즈 최초로 무기가 등장하죠. 도망칠 수 밖에 없는 미지의 적과의 대치로 인기를 얻었던 시리즈인 만큼 이번 작품의 설정은 파격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무기가 있어 공포가 희석되진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뿐, 무서워서 리뷰고 뭐고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한 작품이었습니다.

게임명: 암네시아: 더 벙커
장르명: 공포
출시일: 2023.6.6
리뷰판: 1.0.0
개발사: 프릭셔널 게임즈
서비스: 프릭셔널 게임즈
플랫폼: PC, PS, Xbox
플레이: PC


폐쇄된 벙커에서 펼쳐지는 아찔한 생존기
공포 게임의 근본은 공포에서 비롯됩니다. 당연한 소리지만 액션 게임에서 액션이 중요하듯 공포 게임에선 무서운 심리를 자극하는 게 중요합니다. 따라서 많은 공포 게임이 무서움을 연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장르의 본질이자 재미를 좌우하는 만큼 소홀할 수 없죠.

다양한 연출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쓰이는 기법을 하나 꼽자면 점프 스케어가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플레이어를 깜짝 놀래키는 방식이죠. 활용하기 쉽고 잘 쓰면 큰 효과를 볼 수 있어 대부분의 공포 게임에서 점프 스케어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를 너무 남발하면 오히려 게임의 재미가 반감되는데요. 처음 한 두 번은 깜짝 놀랄 수 있겠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거나 혹은 패턴을 예측할 수 있으면 이후에는 무서운 감정이 빠르게 식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점프 스케어는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뭔가 강제로 무서움을 주입하는 듯한 느낌에 거부감이 든다고 해야 할까요.

▲ 폐쇄된 지하 벙커는 환경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무섭다

암네시아 시리즈가 공포 게임계의 명작으로 남을 수 있던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점프 스케어에 크게 의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번에 훅 찾아왔다가 빠르게 식어버리는 인스턴트같은 공포가 아니라 게임을 하는 내내 플레이어를 옥죄어 오는 환경을 정말 잘 구현해뒀죠.

이는 더 벙커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이번 작품의 테마는 앞서 말했듯이 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프랑스군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퇴각하던 주인공은 동료를 구하려다 독일군의 포격에 당하고 이후 입구가 장해물에 막힌 벙커에 갇혀버립니다. 게임은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한 과정을 담고 있죠.

폐쇄된 지하 벙커에 홀로 남겨진 플레이어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쉽게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소리 그리고 주변 환경을 통해 간접적으로 무서운 상황을 연출하기 때문인데요. 이따금 폭격에 덜덜 떨리는 벙커와 그르렁거리는 울음 소리, 무언가 긁으면서 지나가는 소리가 플레이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죠.

▲ 뭔가 있을거야, 뭔가... 있네?

이러한 소리 탓에 "저 코너를 넘어가면 분명 뭔가 나타날 거야", "내 뒤에 뭔가 있는 것 같아" 등 무서운 생각을 계속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실제론 주변에 아무것도 없지만 내 스스로가 만들어낸 공포 때문에 저절로 움츠러들게 되고 이는 게임을 하는 내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맛있는 밥을 짓기 위해 잠시 뜸을 들이는 것처럼 플레이어가 상상력으로 어느 정도 움츠러들었다면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공포의 실체를 보여주는데요. 살짝 방심하려고 할 때마다 귀신같이 알고 찾아오니 하는 입장에선 정말 미칠 노릇입니다. 공포의 결을 따진다면 심리를 자극하는 공포로 유명한 영화 '컨저링'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듯 합니다.


비 선형 구조의 레벨 디자인과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괴물
첫 작품이자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던 암네시아: 더 다크 디센트를 제외하면 이후 시리즈에선 여러 아쉬움이 나왔었습니다. 어 머신 포 피그스의 경우 공포의 비중이 줄었고 리버스 역시 공포보다 어드벤처에 집중했죠. 시리즈의 대중성을 위함인지 첫 작품에서 선보였던 제한된 상황을 완화하려는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반면, 더 벙커는 더 다크 디센트에서 보여줬던 공포와 어드벤쳐의 균형을 잡기 위해 여러 부분에서 신경 쓴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먼저, 게임의 진행 방식이 비 선형 구조의 오픈 월드로 바뀌었습니다. 전작들이 챕터별 정해진 퍼즐을 하나씩 풀면서 엔딩까지 나아갔다면 이번 작품은 랜덤으로 얻는 주요 아이템에 맞춰 맵 곳곳을 탐험하고 퍼즐을 풀어야 합니다.

게임에 주요 공간은 세이브와 발전기를 돌릴 수 있는 방과 주요 아이템이 담긴 캐비넷들이 자리 잡은 미션 저장소 두 곳입니다.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선 캐비넷을 열고 안에 들어 있는 주요 아이템을 얻어야 하며, 캐비넷의 암호는 이곳저곳에서 죽어 있는 사람들의 군번줄 등에 적혀 있죠.

▲ 지역 전체를 탐험하면서 필요한 아이템을 얻어야 하는 게 이번 작품의 주요 목표

각 맵에는 특정 도구가 있어야만 갈 수 있는 제한이 걸린 공간이 있으며, 어떤 아이템을 먼저 얻었는지에 따라 플레이어마다 조금씩 진행 방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즉, 같은 게임을 해도 플레이 경험에 차이가 있을 수 있는 셈입니다.

괴물도 환경에 맞춰 큰 변화가 이뤄졌습니다. 초자연적인 현상과 미지의 적을 무서움의 대상으로 내걸었던 전작처럼 이번 작품 역시 비슷한 느낌의 적이 등장합니다. 인간과 쥐를 믹서기에 넣고 갈아버린 뒤 적당히 주무른 듯한 비쥬얼은 보는 사람의 식욕을 싹 없애기 충분한데요.

앞서 작품은 특정 구역에 도달하면 정해진 곳에서 괴물이 생성되는 방식이었습니다. 개발자가 설계한 흐름에 맞춰 공포를 전해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패턴을 파악하고 나면 덜 무섭다는 단점이 있는 방식이죠.

▲ 소리에 반응해 찾아오는 서비스를 제공해준다

반면, 더 벙커에 등장하는 괴물은 실시간으로 존재하며, 플레이어를 찾기 위해 지역 곳곳을 돌아다닙니다. 주로 소음과 피에 반응하며, 폭발과 총기 격발음처럼 큰 소음이 들리면 거의 무조건 그 장소에 나타납니다.

게임을 하다 보면 소리를 안 내고 싶어도 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자주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새로운 아이템인 수동 손전등의 충전 소리가 있죠. 빛이 없으면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칠흑과 같은 상황이기 때문에 거의 필수적으로 손전등을 들고 다녀야 하는데요. 손전등의 빛을 충전하면 위잉거리는 소리가 들리게 됩니다.

이 밖에도 문을 강제로 부수기 위해 돌을 던지거나 함정 혹은 쥐 떼를 피하기 위해 달리기를 하면 소리가 납니다. 무조건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괴물을 자극할 수 있는 만큼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세이브를 할 수 있는 구역을 제외한다면 안전 구역 자체가 없다고 봐도 될 정도이며, 이 탓에 전작보다 더 긴장해야만 합니다.

▲ 스토리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면서 조금씩 알아가는 것도 나름 재밌는 편

한편, 폐쇄된 환경에 맞춰 게임 내에서 획득할 수 있는 자원은 한계가 정해져 있습니다. 구역 자체가 다채롭고 이곳저곳을 뒤져보면 여러 소모품을 획득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정해진 것 이상을 얻을 수 없는데요.

멘탈 시스템의 삭제와 함께 자동 체력 재생을 지원했던 앞선 두 작품과 달리 이번 작품은 체력도 자동 회복이 되지 않습니다. 체력이 떨어지면 몸에서 피를 흘리면서 시야가 붉어지고 걸음걸이가 느려지기도 하죠. 문제는 피가 괴물을 자극해 움직이지 않아도 괴물이 플레이어를 찾아낼 확률이 높아집니다. 결국 시간을 끌수록 서서히 말라갈 수 밖에 없는 것이죠.


▲ 곳곳에 퍼져있는 쥐 떼도 골칫거리 중 하나

시리즈 최초로 총기가 등장하지만 이걸로 괴물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는 것도 결국 자원에 제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괴물에게 총을 쏘면 일시적으로 물러나게 할 수는 있습니다. 사실 시리즈를 쭉 해봤다면 이것만 해도 정말 파격적인 변화라고 할 정도인데요.

다만, 총알을 단순히 생존용으로 소모해버리면 이후 특정 지역으로 갈 때 편하게 갈 수 있는 방법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가령, 잠긴 문을 열기 위해 주변에 있는 폭탄을 끌고 와서 총으로 터트리면 한 번에 쉽고 빠르게 갈 수 있지만, 총알이 없다면 빙빙 돌아서 아주 힘들게 가야만 하죠.

따라서 무기를 쓸 수 있지만 이것 때문에 덜 무섭고 든든하다는 느낌은 딱히 들지 않았습니다. 대응할 수단이 아예 없는 것보단 낫지만 그래도 괴물 소리가 들리는 순간 주변 사물함 안으로 숨어버리는 게 더 안전했으니까요.


가볍지만 충분히 무서운 공포 게임
종합하자면 더 벙커는 암네시아 시리즈의 큰 변화와 함께 초심을 되짚어보는 작품이었습니다. 자칫 공포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부분은 과감하게 쳐내고 최대한 무섭게 느껴질 수 있도록 시스템 전반적으로 설계가 이뤄졌는데요. 덕분에 실시간으로 플레이어를 찾아내는 적과 폐쇄된 벙커라는 환경 속에서 플레이어는 엄청난 공포를 마주하게 됩니다.

시리즈 내내 호평을 받았던 소리는 이번에도 여전한 감동을 선사해줬습니다. 지하라는 환경 특유의 떨림은 굳이 괴물 소리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무섭게 느껴졌으니까요. 거의 공포의 70% 이상이 소리에서 나오는 만큼 가급적이면 헤드셋을 끼고 게임을 즐기는 것을 권장하고 싶습니다. 그것도 늦은 밤 불 다 끄고요.

▲ 영어를 모른다면 스토리는 물론이고 기본적인 힌트도 알기 힘들다

더 벙커에서 몇 가지 아쉬움을 찾는다면 한국 한정으로 언어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점과 전작과 비교해서 아쉬운 스토리 비중, 다소 불친절한 퍼즐, 익숙해진다면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는 폐쇄된 공간의 한계와 숨바꼭질 방식의 괴물 패턴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특히, 퍼즐은 언어의 한계 때문도 있지만 아이템마다 사용법을 플레이어가 스스로 알아내야만 했습니다. 특히, 랜덤으로 아이템을 얻게 되니 더더욱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요. 어디에 쓰이는지 맵 전체를 돌아다녀야 하는데 그 과정이 반복되면 자칫 흥미를 잃고 지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올해는 특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예정이라고 하죠. 더운 여름에 시원한 지하 벙커에서 괴물과 오손도손 시간을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요. 암네시아 시리즈의 명성을 잘 알고 있다면 이번 작품은 꽤 신선하게 느껴질 것이고 처음 입문한다면 한 편의 재밌는 공포 게임으로 즐길 수 있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