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를 개발한 유비소프트는 전통적으로 진보와 혁신을 쫓는 개발사가 아닙니다. 시리즈가 거듭 출시되면서 프로듀서가 바뀌어도 누적된 경험에서 확인한 성공 공식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기본 골자는 언제나 유지되어 왔죠. 하지만, 게임 시장의 트렌드는 수학 공식의 답처럼 인풋이 동일하다 해서 아웃풋이 언제나 같지 않습니다.

게이머들이 향유하는 문화가 달라지고, 원하는 자극의 깊이와 종류가 달라지며, 추구하는 재미의 종류도 변합니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이전을 되돌려 보면,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유니티'가 출시되었을 때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블랙 플래그'에서 뛰어난 해상전 시스템을 보여주며 잠깐 환심을 샀지만, '유니티'와 '신디케이트'로 이어지는 시기 팬들은 너무 과한 마커의 남발과 배경만 바뀌었을 뿐 늘 비슷한 게임 디자인에 불평했습니다.

그에 대한 유비소프트의 해답이 '오리진'부터 '발할라'까지 이르는 3부작이었습니다. 완연한 오픈월드 액션 RPG가 되어버린 모습에 일부 팬들은 불평하기도 했지만, 시리즈 전체의 흐름으로 볼 때 필요한 변화였으며, 평가도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 3부작이 마무리되면서 '어쌔신 크리드 미라지'가 뒤를 이은 것이죠.

이 시점에 필요한 건 또 다른 혁신입니다. 오늘 리뷰할 '어쌔신 크리드 미라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블랙 플래그', '오리진'이라는 두 번의 지점을 지나 세 번째로 찾아온 체크포인트. 15년이 넘게 이어져 온 프렌차이즈의 미래를 유비소프트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타이틀이 바로 '어쌔신 크리드 미라지'인 셈이죠.

게임명: 어쌔신 크리드 미라지
장르명: 액션 어드벤처
출시일: 2023. 10. 5.
리뷰판: 리뷰 빌드
개발사: 유비소프트 보르도
서비스: 유비소프트
플랫폼: PC, XBOX, PS
플레이: PC


다시 '암살단'으로 돌아온 서사의 시작

게임은 여느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꽤 긴 볼륨의 도입부를 지니고 있습니다. 컷신과 함께 게임이 시작되고, 2~3시간 가량의 튜토리얼 겸 인트로 시퀀스를 지나 본 무대가 등장할 때쯤 게임 로고와 함께 'Ezio's Family'나 그 편곡이 BGM으로 깔리는게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전통 아닌 전통이죠.

▲ 특유의 도입부는 그대로다

이번 작품의 특징은, 주인공 개인의 서사에 집중했던 전작들의 도입부와 달리 주인공의 서사를 훑으면서도 '암살단(감추어진 존재)'이라는 집단 자체를 함께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는 고대부터 이어진 두 집단이 암중에서 다투며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음모를 꾸미고 이를 막는다는 기본 배경에서 출발하지만, 사실 이 설정은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점점 배경에 그칩니다. 초기 작품에서는 꽤 비중있게 다뤄지지만 최근 작품에 들어서는 그냥 언급만 되는 수준이죠.

예를 들어 최근 출시된 신화 3부작의 모든 주인공은 '암살단'과의 연계 서사가 무척 빈약합니다. '오리진'의 주인공 바예크는 암살단을 만든 장본인이지만 서사의 중심은 복수극이며, '오디세이'의 주인공은 암살단 소속도 아닌 그냥 용병입니다. 어쩌다 보니 나중에 엮이긴 하지만 작품의 내용은 그냥 오디세이의 재해석이죠. '발할라'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 최근엔 그냥 배경이 된 친구들...

하지만, '미라지'는 주인공 바심이 어떻게 암살단에 합류하게 되고, 암살단의 본거지는 어떻게 만들어져 있으며, 어떤 훈련과 체계를 갖추고 있는지를 비중있게 소개하며, 암살단의 양대 입단 의식인 단지의 의식도 실제 연출로 보여줍니다. 시리즈의 오랜 팬으로서, 이와 같은 도입부는 굉장히 반가운 부분입니다. 점점 고대 종족 판타지가 되어가는 시리즈의 중심을 다시 양대 집단으로 끌어온 느낌이라 해야 할까요?

▲ 꽤 즐겁게 플레이한 초반부

그렇게 도입부를 거치면서 플레이어는 주인공 바심이 암살단의 일원이 되고 게임의 주 무대가 되는 바그다드로 향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그다드에 거의 다 갔을 때쯤 모래먼지가 개면서 '어쌔신 크리드 미라지'의 로고가 페이드 인으로 나타나죠. 편곡된 'Ezio's Family'도 여전합니다. 시리즈 팬들로서는 싫어할 수가 없는 연출입니다.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암살단이 되고, 바그다드로 향하는 과정까지의 이야기가 꽤 흥미로웠다면, 바그다드에 도착한 이후의 '어쌔신 크리드 미라지'는 거짓말처럼 지루함의 저 밑바닥으로 내려가버립니다. 이제부터 그 이유에 대해 말해보려 합니다.

▲ 제대로 연출된 단지 의식


아무튼 근본으로 돌아왔다

바그다드에 도착한 플레이어를 반기는 건 여느 때와 같은 광경입니다. 대충 쉽게 올라갈 수 있을것같은 저층 건물들이 깔린 흙 도시에 누가 봐도 뷰포인트라는 걸 알 수 있게끔 드물게 보이는 높은 탑. 그리고 드문드문 배치된 몇 종 안되는 상인들과 하나둘 맵의 빈자리를 채워가는 마커까지 말이죠. 단순히 이전의 게임들과 구도가 비슷한 게 문제가 아닙니다. 이 광경을 보면서, 게이머가 너무나 쉽게 이 게임에서 보여주는 대부분의 플레이를 상상할 수 있다는게 문제죠.

▲ 바그다드가 열리자마자 보이는 '모을거리'들

그리고, 의심의 여지 없이 게임은 상상한 그대로 흘러갑니다. 이동하고, 벽을 타고, 맵을 밝히고, 미션에 따라 암살과 전투를 벌이죠. 이렇게 말하면 다양해 보이지만, 올드 팬들은 이 모든 걸 전작에서 질리도록 해온 과정들입니다. 그리고 그 어디서도 어쌔신 크리드 미라지만의 새로운 부분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 구작의 시스템이 묘하게 융합되다 보니 혁신보단 퇴보가 어울리는 결과물이 나와버렸죠.

개발진은 이를 두고 '근본으로의 회귀'라 말했습니다. 지난 3부작에서 중심이 되던 샌드박스형 액션 RPG의 느낌을 빼고, 암살과 잠입, 파쿠르를 중심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이죠. 그리고 이들이 생각하는 시리즈의 근본은 '에지오 사가'였던 것 같습니다.

▲ 에지오 사가때 쓰던 묻어가기 테크닉이나

▲ 유니티에서 보던 암살 계획 수립이 게임 곳곳에 묻어있다.

그 정도로, 게임 내에서는 에지오 사가에서 볼 수 있었던 모습들을 다수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공격을 튕겨내고 적을 즉사시키는 패턴의 전투라던가, 경계도와 지명수배 포스터가 대표적입니다. 여기에 신화 3부작에서 등장한 장비 루팅 및 업그레이드 시스템과 버드 컨트롤 등이 더해지면서 미라지의 게임 플레이 중심을 이루고 있죠.

문제는 '에지오 사가' 당시와 지금은 너무나 다르다는 겁니다. '어쌔신 크리드2'가 시리즈 사상 최고의 평가를 받은 이유는 매우 복합적입니다. 3편에 걸친 장대한 이야기의 시작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서사를 잘 다졌고,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라는 시대적, 공간적 배경을 훌륭하게 표현했으며, 무엇보다 '에지오 아디토레'라는 주인공이 너무나 매력적으로 조형된 캐릭터였습니다. 게다가 2009년 출시작인만큼, 게임이 요구하는 수준도 지금과 비교하면 무척 낮았죠.

▲ 2편 기준으로도 튕겨내기 후 즉사는 너무 세다 싶었는데...

하지만, '미라지'는 이와 거의 모든 부분에서 다릅니다. 먼저 '바심'이라는 주인공은 매력적이긴 하지만 이미 전작에서 정체와 행보가 모두 드러난 캐릭터이며, 앞날도 명확한 만큼 더 이상 기대할 무언가가 있는 캐릭터가 아닙니다. 주 무대인 바그다드는 무척 유서깊고 대단한 도시이지만, 글로벌 인지도 면에서 로마나 피렌체, 이스탄불만큼은 아닙니다. 앞서 도입부 서사를 칭찬하긴 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비교군이 신화 3부작일때 훌륭할 뿐, 에지오 사가에 비하면 그다지 대단한 수준은 못 됩니다.

그러다 보니 '어쌔신 크리드 미라지'가 줄 수 있는 재미의 한계는 구작들의 그것을 넘어서질 못합니다. 바로 전작에서 양손검 두개, 혹은 방패 두개를 양손에 차고 휘두르던 게이머는 이제 감질나는 칼과 단검만 써야 하며, 온갖 변조가 가능했던 스킬 트리는 너무나 간소화되었습니다. 수틀리면 다 박살내면 그만이던 그때와 달리 2010년마냥 지명수배 포스터를 떼고 다녀야 하고, 전투는 미지근하게 이어지죠.

▲ 논란이 많았지만 나름 이 게임의 몇 안되는 새로운 점인 순간이동 암살

차라리 신화 3부작에서 유비소프트가 너무나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조종 가능한 유도 화살과 투척 도끼 난사, 무기에 불붙이기와 스파르탄 킥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많은 경험들을 한 게이머들에게 있어 미라지의 게임 플레이는 심심하다 못해 지루할 정도입니다. 온갖 메뉴를 다 팔던 김밥천국이 리뉴얼 이후 원조김밥만 파는 느낌이랄까요.

이쯤되면,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너무 올드팬의 시각에서 바라본게 아닐까 하는 의문 말이죠.


신규 게이머들에겐 괜찮을 지도 몰라

그게 또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쌔신 크리드 미라지'는 애초에 올드 팬들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게임입니다. 주인공으로 새로운 캐릭터를 내세우지 않고 전작의 흑막 중 하나였던 '바심'을 그대로 쓴 것 부터가 그렇죠. 게임의 전체 서사에 대해 말하진 않겠지만, 후반부에 이르면 전작의 바심을 알아야 좀 더 쉽게 이해되는 부분도 있을 정도입니다.

주인공인 '바심'을 빼도, 게임의 전체적인 조형이 신규 팬들에게 쉽게 와닿지는 않습니다. 게임의 무대인 바그다드는 이슬람의 대표 도시 중 하나인데, 현 시대의 이슬람 문화권부터가 다른 문화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게임 씬과 그리 가깝지 않습니다. 게임 내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대사가 '앗샬람 알레이쿰'인데, 출시 이틀 후 이팔전쟁이 터진 것도 나름 악재라면 악재일 겁니다.

▲ 기대치만 빼고 보면 수많은 구작들의 메들리같은 게임이긴 한데

그리고 근본으로 회귀한 게임 디자인도 오늘날 등장하는 게임과는 많이 다릅니다. 게임 내에서 '불편한 경험'을 최대한 없애려 하는 트렌드와 달리 어쌔신 크리드 미라지는 암살과 잠입을 다시 내세우면서 전체적으로 이전에 비해 귀찮아졌으며, 구작 플레이 경험이 없다면 쉽게 적응하지 못할 요소들도 곳곳에 등장합니다.

정리하자면, '어쌔신 크리드 미라지'는 '임시 방편'과 같은 게임입니다. 신화 3부작 이후, 시리즈에 또 다른 혁신이 필요하다는 건 비단 게이머들만의 감상이 아니었을 겁니다. 오히려 개발사 내부에서는 그 필요도를 더 강하게 느끼고 있었겠죠. 하지만, 이 작업이 쉽지 않으니 어쩔수 없이 공백이 생길테고, 이 공백을 채워넣기 위해 적당적당한 수준에서 만든 작품이라는 생각만 듭니다.

▲ 기대 대비 너무 평이하다 보니 좋은점들도 묻힌다

제가 리뷰에서 전체적으로 게임을 혹평한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유비소프트는 이번 작품에서 신화 3부작의 다음을 보여주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시기상으로 필요했기에 당연히 가졌음직한 기대가 게임에 높은 잣대를 들이민 이유인 셈입니다. 이 기대를 떼놓고 보면, '어쌔신 크리드 미라지'는 특별히 뛰어나진 않지만, 그렇다고 망할 게임도 아닌, 언제나 그렇듯 유비소프트다운 평이한 게임입니다.

옛 것과 요즘 것이 적당히 섞여 이도 저도 아닌 퓨전 궁중요리같은 결과물만 나와서 근본으로 돌아간다고 말하고 있는 느낌이지만, 그 맛이 코를 막고 먹어야 하는 수준까지는 아닙니다. 색다른 무언가를 기대했다면 실망하겠지만, 그냥 끼니를 해결한다는 느낌에서는 씹어넘길 수 있는 수준이죠.

하지만, 유비소프트가 알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미라지'로 시간을 벌긴 했지만, 팬들의 기대치는 더 높아졌다는 것을요. 유비소프트가 발표한 어쌔신 크리드의 신작 중 새로운 사가는 일본 에도 시대를 바탕으로 하는 '코드네임 레드'와 신성 로마 제국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코드네임 헤세' 두 작품입니다. 언젠가 본모습을 보일 그 두 작품에서, 팬들은 지금보다 더 높은 잣대를 가져올 겁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려면, 웬만한 혁신으로는 부족할 거란 사실을 알아야 할 겁니다.

▲ 그렇게 팬들은 다시 기다림의 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