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스타 단독 컨퍼런스로 진행된 'G-CON 2023' 행사의 둘째 날, 전세계적인 대히트를 기록한 만화 '드래곤볼'을 만든 전설의 편집장, 토리시마 카즈히코의 강연이 진행됐다.

토리시마 카즈히코는 1976년 슈에이샤 입사 후 '주간 소년 점프'의 편집부에 배치되어 여러 전설적인 만화가들을 양성한 베테랑 편집자로, '소년 점프'를 일본을 넘어 세계 최고의 만화잡지 반열에 올린 주역으로 평가 받는다. 현재는 슈에이샤의 전무이사, 하쿠센샤의 사장 겸 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는 만화가의 원고를 무자비하게 거부하는 악마 편집자로도 유명하며, '닥터 슬럼프'의 탁터 마시리토, '떴다! 럭키맨'의 토리시맨 등 점프 만화 시리즈 속 주요 인물들의 모델이기도 하다.

`드래곤볼, 두개의 핀치!`라는 주제로 발표를 진행한 그는 드래곤볼이라는 작품이 어떻게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드래곤볼 연재 중에 마주하게 된 두 번의 위기 상황을 어떻게 이겨냈는지에 관해 이야기했다.

▲ 슈에이샤 토리시마 카즈히코 전무이사

그의 발표는 토리야마 아키라 작가의 첫 번째 히트작, `닥터 슬럼프`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됐다. 닥터 슬럼프는 토리야마 작가와 토리시마 편집자가 장장 2년 가까이 토론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어렵게 만들어진 만화다. 그는 닥터 슬럼프의 원고를 처음 받았을 때 단번에 `이건 성공하겠다`라고 생각했고, 여자아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을 길게 이어가고 싶어 하지 않았던 토리야마 작가에게 `눈이 나쁜 로봇`이라는 신선한 설정은 히트할 것이 분명하니, 더 길게 이어가야 한다고 강하게 요구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닥터 슬럼프는 토리시마 편집자가 말한 것처럼 유저 앙케이트 순위 1위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고, 토리야마 작가는 울며 겨자 먹기의 심정으로 닥터 슬럼프를 계속 이어가야만 했다.


이후에도 소재 부족으로 힘들어하던 토리야마 작가에게 슈에이샤 편집부는 닥터 슬럼프 연재를 그만둘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을 내걸었다. 바로 `닥터 슬럼프보다 더 재미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토리시마 편집장은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작품보다 더 재미있는 만화를 만들라는 것은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었지만, 대히트작을 배출한 편집자와 작가가 힘을 합치면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판단했다며 당시의 상황을 회고했다.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후속작에 고민하고 있을 당시, 토리야마의 아내와 대화하던 토리시마 편집장은 결정적인 힌트를 얻게 된다. 바로 토리야마가 작업을 할 때, 뒤에 재미있는 영화를 틀어서 좋아하는 대사가 나올 때마다 뒤돌아보면서 작업을 이어간다는 이야기였다. 토리시마 편집장은 작가가 작업 중에 계속 쳐다보고 싶어질 정도로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만화로도 재미있게 그려낼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고, 토리야마 작가가 그토록 즐겨 봤던 `쿵후`를 소재로 만화를 그려보라고 조언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드래곤볼의 시초격인 `드래곤 보이`라는 작품이다.


야성적인 머리 스타일에 꼬리도 있는 오공이라는 캐릭터를 만들고, 7개의 드래곤볼을 모아서 신룡을 찾아간다는 스토리까지 덧붙여 순조로운 출발을 이어가는 듯했으나, 이때 드래곤볼의 첫 번째가 닥쳐오게 된다. 바로 오공이라는 캐릭터가 거북선인이나 부르마에게 끌려다니기만 할 뿐, 너무 수동적이었던 탓에 독자들이 점점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됐던 것이다.

토리시마 편집장은 이때 `강해지고 싶다`는 주제 의식을 담아 오공이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도록 했고, 착한 캐릭터인 오공과 대비되는 조금 나쁜 캐릭터 `크리링`을 추가하여 오공의 매력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오공이 조금씩 강해지는 수련 과정을 그리면 독자들이 지루함을 느낄 수 있으니 과감하게 생략했고, `천하제일 무도회`라는 자리를 통해 한 번에 강해진 모습을 담아냈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이러한 변화를 적용한 뒤 그간 하락세를 그리던 드래곤볼은 다시금 1위 자리를 탈환하며 반등에 성공하게 된다.

토리시마 편집장은 이외에도 당시 인기 1위였던 '북두의 권'과 차별화를 두기 위해 여러 앵글에서 액션을 보여주는 독특한 스타일을 도입했고, 다양한 앵글을 통해 그려지는 액션으로 북두의 권과 차별화되는 매력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토리시마 편집장은 독자와 대화하면서 스토리를 유동적으로 바꾸는 방식은 오직 일본에만 있다며, 일주일에 한 화씩 연재하며 유저 반응을 살펴야 했기 때문에 인기가 있는 부분은 늘리고, 반응이 없는 부분은 줄여버리며 연재를 이어갔다고 말했다. 처음 설정이었던 드래곤볼 수집은 방해가 되는 요소였기 때문에 단순하게 만들었고, 전투를 더 강조하려는 과정에서 '피콜로 대마왕'이라는 존재감 있는 악역을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피콜로 대마왕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한 후 드래곤볼이라는 작품이 한 단계 높은 단계로 올라갈 수 있었다며, 이후 드래곤볼이 약 7년 이상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작품으로 계속 인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실 드래곤볼이 마주한 위기는 하나 더 있었다. 바로 `TV 애니메이션`이다. 닥터 슬럼프 애니메이션 방영 이후 닥터 슬럼프를 제작한 스태프들이 그대로 드래곤볼의 애니메이션 작업으로 옮겨왔는데, 개그 만화를 작업하던 제작자들이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드래곤볼`을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토리시마 편집장은 어떻게든 잘 설명하면서 이끌면 될 것이라고 믿었으나 기대했던 피콜로 대마왕과의 마지막 전투 신 마저 허술하게 표현된 것을 본 뒤 큰 충격을 받았고, 결국 프로듀서와 스태프 모두를 바꾼다는 결단을 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그는 당시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던 '세인트세이야'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모리시타 코조 프로듀서와 각본가 코야마 타카오를 스카우트했고, 이들과 함께 어른이 된 오공의 모습을 그리는 새로운 애니메이션 시리즈, '드래곤볼Z'를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애니메이션의 타이틀은 '이 뒤는 없다'라는 각오를 담아 토리야마 아키라 작가가 직접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시작된 드래곤볼Z는 매력적인 애니메이션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토리시마 편집장은 보통 15%의 시청률이 나오면 성공했다고 말하는 편인데, 드래곤볼은 그간의 하락세를 모두 극복한 뒤 25%에 달하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완전한 부활을 이룰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지스타 강연을 통해 '처음부터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며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 작품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혼자서 만드는 것은 한계가 분명하고, 결국 집단의 힘으로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이 있어야 성공하는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반 대중들이 마주하는 것은 모든 문제가 수정된 최종 버전이기에 별다른 문제가 없어보일 수 있으나, 그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 매회, 매일, 매주 문제점을 찾고 계속 다시 만드는 작업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재미있는 작품은 결코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위기 상황들이 있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이 있었기에 드래곤볼Z 관계자 대부분이 현재 매우 큰 성공을 거두고 출세가도를 걸을 수 있게 됐다며, 이 모든 것이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의 결실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한 뒤 발표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