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 현실에서 경험할 수 있는 여러 상호작용을 가상의 공간에 구현한 것을 뜻하는 신조어로, 2023년에 가장 뜨거웠던 화제의 단어다. 동시에 높았던 관심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지난 1년 사이에 정말 빠르게 식어버린 키워드이기도 하다.

기업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전개할 때 항상 부록처럼 덧붙였던 메타버스 관련 시도들은 어느샌가 주변에서도 뉴스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지 않는 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메타버스를 이야기하는 이들 뒤엔 언제나 '이도 저도 아닌 허무맹랑한 소리'라는 조소 섞인 비아냥이 뒤따르곤 한다. 이미 십몇년 전부터 컴퓨터로 즐기던 MMORPG에서 경험할 수 있었던 것들이 대부분이고, 그 어느 것 하나 새로운 것이 없는 재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메타버스는 이젠 언급하는 것조차 다소 조심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한물간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이지만, 지금도 메타버스를 활용하며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업계의 시선은 대중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지난 2023년은 물론 새롭게 밝아온 2024년에도, 메타버스의 가능성을 바라보며 다음 단계를 만들려는 개척자들의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질 전망이다.


2023년, '메타버스'가 보여준 가능성은?

메타버스의 가능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메타버스가 무엇인지, 또 메타버스라는 키워드를 활용하여 지금까지 어떤 일들이 이루어졌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일찍이 한국정보처리학회(KIPS)는 메타버스를 정의하며 세계관, 창작자, 디지털 통화, 일상의 연장, 그리고 연결이라는 다섯 개의 키워드를 언급한 바 있다. 일반적인 온라인 플랫폼이나 애플리케이션의 예와 달리, 이 다섯 개의 차별화된 특징을 모두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메타버스라는 것이다.

반면 에픽게임즈의 팀 스위니 대표는 "실시간 3D 설정의 온라인 소셜 엔터테인먼트 경험"이 모두 메타버스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처럼 키워드에 대한 해석이 저마다 다르고 정의도 제각각이었기에, 명확한 정의를 만들기 위한 논의가 계속해서 이루어졌고, 현재는 '별도의 디지털 통화와 콘텐츠 생산자가 존재하는 가상의 공간' 정도의 의미로 초반보다는 다소 넓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다.

처음 기준 자체가 다소 모호했기 때문인지, 그간 트렌드 자체에만 편승하려는 얄팍한 움직임도 적지 않았다. 이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헛발질을 반복하는 동안 '메타버스는 허상'이라는 부정적인 분위기가 먼저 조성되어 버렸지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자신들만의 확고한 방향성과 가치를 보여준 이들이 있었다.

첫 번째 예시는 현실에선 여러 여건들로 인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장소를 가상의 공간으로 대체하는, '연결'이라는 의미에 집중한 활용 예다. 전 세계의 프로야구 팬들을 위해 가상의 야구장을 개장한 MLB, 소니와 협업하여 가상의 에티하드 스타디움을 구현한 맨시티, 건담 IP를 사랑하는 팬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도록 가상의 놀이공간을 만든 반다이남코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언제 어디서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가상의 플랫폼을 활용하여 타인들과 실제로 한자리에 있는 것 같은 존재감을 구현해냈고, 같은 흥밋거리를 공유하고 있는 이들로부터 공감을 얻었다. 메타버스 기술을 활용하여 특정 집단의 수요에 맞는 공급을 제공하는 것이 새로운 사업 수단이 된다는 점이 주목받았고, 현재도 다양한 형태의 시도가 이어지고 있는 방식이다.

▲ 클럽 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축구를 한층 더 다양하게 즐길 수 있도록 한 '맨시티X소니'의 예시

▲ '건담' IP와 관련 콘텐츠를 한 자리에서 즐길 수 있도록 테마파크를 구상 중인 반다이남코

두 번째 예시는 여러 산업 현장에서 생산성 향상을 위해 '디지털 트윈(Digital Twin)' 기술을 활용한 예다. 디지털 트윈은 물리적인 물체를 정확히 반영하도록 설계된 가상의 모델로, 쉽게 말해 원본과 동일한 디지털 복사본을 만드는 기술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메타버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생산성'과 '일상의 연장' 면에 초점을 맞춘 셈이다.

작년엔 독일 최대의 엔지니어링 기업 지멘스(SIEMENS), 영국원자력공사(UKAEA), 그리고 한국의 현대자동차 등이 디지털 트윈 기술을 활용하여 부지 시설 확장 사업을 전개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바 있다. 실제 인프라를 구축하기에 앞서 디지털 트윈 기술로 시뮬레이션을 반복하고, 사전에 예상되는 결과값을 예측해보거나 더 견고한 설계를 만들어 예상되는 비용을 큰 폭으로 줄일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강점이다. 일반적인 대중의 인식 속 메타버스의 방향성과는 다소 다른 방향일 수 있지만, 산업 현장의 생산성을 큰 폭으로 키우기 위한 '맞춤형 활용법'으로 쓰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산업현장에서도 '디지털 트윈' 기술을 포함한 다양한 메타버스 기술이 활용되고 있다

세 번째는 가상 시뮬레이션, 또는 훈련 프로그램으로서의 활용이다. 실제로 미국 방위산업체 록히드 마틴에서 진행된 군사 훈련, 일상과 동떨어진 환경에서 활동하는 우주 비행사의 멘탈케어, 가상의 교실에서 수업을 받은 뒤 실제 자격 획득으로 연계할 수 있는 교육 커리큘럼, 일본 경시청에서 전개한 사이버 보안 강화 훈련 등 다양한 분야에서 메타버스 기술이 두루 활용됐다. 대부분 인재육성 부분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과 같은 혼합현실 장비를 활용하여 가상세계에의 몰입도를 끌어올린 것이 특징이다.

▲ 고가의 장비를 활용해야 하는 훈련이나, 위기 상황에 대처법을 배우는 훈련에 활용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예시는 사회복지 방면에서의 메타버스 활용이다. 지난 2023년에는 신체적, 정신적 제약으로 인해 외부 활동이 어려운 장애인들을 위한 취업상담회, 현대 사회에 만연한 젊은 층의 고독감과 외로움 문제를 달래줄 수 있는 전문가 상담, 최근 사회 이슈로 떠오른 유기견 문제에 더 많은 대중의 관심을 고취할 수 있도록 돕는 지원 프로젝트 등이 메타버스 플랫폼을 통해 전개된 바 있다.

사실 이러한 활동들은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아니라면 좀처럼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기에 큰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지원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는 점에서 앞서 소개한 여러 사례들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메타버스가 조금 더 긍정적인 형태로, 세간에 알려져있는 인식들보다 더 가치 있게 사용될 수 있음을 직접 증명한 사례가 아닐까.

▲ 외부 활동을 하기 어려운 장애인들에게 사회 활동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는가하면,

▲ 많은 이들의 관심이 필요한 이슈에 관심을 고취하는 역할로도 활용됐다.


메타버스, 가치 창출과 '이미지 쇄신'이 필요한 때

앞서 메타버스를 활용한 여러 긍정적인 사례들을 살펴보았지만, 이러한 사례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들의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편이다. 사용자들을 현혹하기 위한 헛소리, 여기서 더 나아가 '사기극' 취급까지 받고 있는 현재의 메타버스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메타버스 키워드 자체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져다 주었던 여러 선례들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겠다는 다짐일 것이다.

메타버스라는 키워드가 주류가 되었을 당시 너도나도 시대의 큰 흐름에 올라타려 했고, 이때 메타버스 플랫폼의 형태를 비교적 쉽게 만들 수 있도록 돕는 엔진, 또는 제작 툴이 시장에 배포됐다. 관련 콘텐츠를 직접 만들며 경험을 쌓아보고자 하는 이들에겐 구성 전체를 간편하게 접할 수 있는 좋은 교보재가 되어 주었지만, 동시에 내실을 다지지 않은 빈 껍데기의 무분별한 확산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때 메타버스를 이야기하던 이들 중 몇몇은 이것이 어떤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같은 가장 기본적인 목적성도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허울뿐인 가상의 틀을 하루빨리 선보이는 것에만 치중했다.

결국 조악한 완성도의 아바타, 부족한 콘텐츠를 얼기설기 엮어 둔 것 같은 급조된 월드, 그리고 이를 별개의 디지털 통화로 묶으려는 얄팍한 시도들까지, 대중들이 메타버스라는 키워드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연상하게 되는 전형적인 이미지가 완성되고야 말았다. 이때 메타버스 플랫폼을 표방하며 등장한 대다수의 서비스들은 이젠 하나둘씩 도태되어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이때 생겨난 키워드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불신은 여전히 사람들의 인식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 EU가 한화로 5억 원을 쏟아부었던 청소년을 위한 메타버스 파티. 현장은 찾는 이 하나 없이 한적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 망연자실하며 마냥 외면하는 것이 아닌, 이를 시행착오의 과정으로 인정하고 더 큰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는 태도다. 대중은 여전히 메타버스라는 키워드를 들을 때마다 실망스러운 감정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그럼에도 이를 반면교사 삼아 더 나은 방향성을 강구하려는 움직임이 분명히 필요한 시점이다. 벌써 2년가량 축적된 여러 사례가 차고 넘칠 정도이니, 충분한 사례 연구가 선행된다면 2024년에는 똑같은 과거의 답습에 그치는 일은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생각해볼 방법은 앞서 유의미한 가치를 창출한 몇 가지 우수한 사례에서 추가 개선 방향을 찾아내고, 더 큰 가치를 만들 수 있는 방향성을 고민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메타버스라는 개념이 활용될 수 있는 몇 가지 우수한 사례들을 접했고, 이들이 가까운 미래에 어떤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지 기대해볼 수 있게 됐다. 예를 들어 어떤 하나의 영역에 그치지 않고 현존하는 모든 종류의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영역에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는 통합된 가상 공간이라던가, 모든 분야의 교육, 훈련 프로그램을 하나의 장소에서 간편하게 수강할 수 있는 학습 플랫폼, 또는 AI 기술을 접목하여 각 분야의 전문가들부터 항상 도움과 조언을 받을 수 있는 큰 규모의 가상 커뮤니티와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현재의 기술로는 실현 불가능한 부분이 많이 남아있어 다소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분명한 목표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특정하는 것에 있다고 본다. 추구하는 방향, 그리고 목표가 분명하다면 향후 기술 발전에 따라 그 가능성이 마냥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게 되는 순간이 분명 도래할 것이라고 믿는다.

▲ 크래프팅, 슈팅, 리듬 액션, 레이싱까지. 포트나이트는 분명 게임 메타버스로서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


"2024년은 메타버스의 해" 새로운 흐름 만들 수 있을까?
▲ (이미지출처: CES 2024 공식 홈페이지)

2024년이 밝았고, 글로벌 IT 업계 전문가들은 올해를 대표하는 세 개의 IT 트렌드로 AI와 블록체인, 그리고 '메타버스'를 꼽았다. 2023년 한 해 동안 다소 시들했던 메타버스 산업이 애플의 신형 공간 컴퓨터인 비전 프로, LG전자와 메타가 준비 중인 하이엔드 MR 헤드셋, 그리고 삼성이 퀄컴의 프로세서와 구글의 OS를 동시에 활용하여 준비 중인 XR 헤드셋 등 여러 차세대 기기들의 경쟁에 힘입어 다시금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지난 9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막한 국제전자제품박람회 'CES 2024'에는 VR, AR, XR 관련 기술을 전시한 기업이 총 300여 개에 달했다. 독일 최대의 엔지니어링 기업 지멘스가 소니와 협업하여 XR HMD를 만들고 있다는 소식이 깜짝 발표됐고, 챗GPT를 탑재한 AI 헤드셋이나 선글라스처럼 편하게 쓸 수 있는 MR 글래스, 컨트롤러 없이 앱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AR 스마트안경 등 저마다의 강점을 내세운 다양한 XR 기기들이 앞다투어 소개됐다. 글로벌 IT 시장 전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기업들이 총출동하여 전면전을 준비하는 상황이니, XR 기기 생태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메타버스 산업 역시 지금보다 배 이상 커지리라는 것은 어찌 보면 자명한 사실이다.

▲ 메타버스 산업에 대한 기대는 메타의 주가에도 영향을 끼쳤다

물론 향상된 기술이 충분히 잘 활용될 수 있도록, 그에 걸맞은 다양한 콘텐츠 역시 함께 제공되어야만 한다. 포켓몬 고 이후에도 다양한 증강현실 콘텐츠를 제작 중인 나이언틱의 매리엄 사부르 비즈니스 총괄은 높은 해상도와 사양을 갖춘 신형 기기들과 함께 '얼마나 매력적인 콘텐츠들이 나올 것인지가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스트리밍 엔터테인먼트 기업 넷플릭스도 CES 2024에서 자신들의 부스를 마련하고, MR HMD을 활용하여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몰입형 콘텐츠들을 소개하며 발 빠르게 앞서 나가려는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물론 국내 기업들도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데브시스터즈는 자사의 쿠키런 IP를 활용한 최초의 VR 게임 '쿠키런: 더 다키스트 나이트'를 지난 12월에 선보였고, 스코넥 엔터테인먼트는 메타와 함께 개발 중인 XR 팀 대전 FPS 신작 '스트라이크 러시'를 준비 중이며, 롯데정보통신은 CES를 통해 메타버스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도 쉽게 초현실적 콘텐츠를 만날 수 있는 새로운 메타버스 플랫폼 '칼리버스'를 선보이며 현지 관람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시장에 새로운 활기를 가져다줄 차세대 XR 기기들과 이를 뒷받침해줄 여러 콘텐츠의 등장이 예고됐고, 메타버스는 이로써 두 번째 기회를 얻게 됐다. 다시 또 돌아오리라고 장담할 수 없는 아주 소중한 기회다. 산업의 성장과 발전은 충분한 대중의 기대가 뒷받침되어야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키워드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부정적인 여론이 대다수를 차지했던 지금까지의 인식이 계속된다면, 혁신과 발전이 담긴 메타버스를 만나는 것은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이번 2024년이 메타버스 산업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석연치 않은 시선을 바꾸고, 기존의 이미지를 크게 쇄신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한 해가 되기를 응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