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강연자 : 리니지 이터널 '박일' 프로그래머 ]


■ 포스트모템이란?

부검(剖檢), 즉 시체를 해부해서 사망원인을 살펴보는 것이다. 개발 포스트모템에서는 프로젝트 개발을 끝낸 후 팀원들과 함께 개발과정을 되돌아보면서 어떤 점이 잘 되었는지, 어떤 점이 아쉬웠는지를 돌아보고 이를 기록한다. 이를 통해서 다음 프로젝트에서 좋았던 점을 좀 더 발전시키고 실수를 피할 수 있다.

KGC 2012 둘째날 강연자로 선 '리니지 이터널' 박일 프로그래머는 '포스트모템으로 살펴보는 위대한 게임 개발팀은 어떤 면이 다른가'에 대해 살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위대한 게임을 개발한 팀은 무수한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이날 강연은 그 중 대표적으로 꼽힌 몇 가지 단어를 사용해 그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가 꼽은 대표적 단어는 다음과 같다.



비전

"시간이 흐를수록 중요성이 강조되는 부분이다. 소위 AAA급 게임일 경우 개발인원 수는 100명을 훌쩍 넘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 같은 회사에서 일하지만 서로 얼굴조차 모르기에 커뮤니티에 문제가 생길 우려가 있다. 비전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빛을 발한다. 수많은 개발인원들을 한데 뭉칠 수 있도록 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박일 프로그래머는 비전의 경우, 게임의 제목부터 확실하게 정해놓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명확한 제목이 성립되는것만으로도 개발자들에게 커다란 동기부여가 된다는 것. 그는 그 예로 'Warloads Champions'에서 이름을 바꾼 'Puzzle Quest' 를 꼽았다. 뚜렷한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좋은 제목이라고 전했다.

'갓오브워'는 주인공 캐릭터 크레토스에게 적용되는 강렬한 규칙들을 사전에 설정해두었기에 여러 명의 애니메이터가 작업해도 마치 한 명이 만드는 것 같은 효과를 누렸다. 이와 함께 예로 든 '마비노기 영웅전'은 홍보물 같은 비전 핸드북을 별도로 제작하여 일상 속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도록 배치했다. 덕분에 신입사원조차도 자신이 어떤 게임을 만드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고.




프로토타이핑

"엔도어즈에서 만들던 '군주배틀'이라는 게임이 있다. 이 게임은 원래 '군주 온라인'에서 전투 콘텐츠만 뽑아서, 다듬어 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들다 보니 더 큰 잠재력이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예 완전히 갈아 엎고 독자적으로 개발, 출시한 게임이 바로 '아틀란티카'다"

프로토타이핑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 때 동기로 작용하는 일종의 매개체를 말한다. 멋진 작품들 중 다수가 위와 같이 우연 반 필연 반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그는 전했다. 하지만 위험한 부분도 있다.

"언차티드2가 프로토타이핑의 잘못된 예시다. 물론 언차티드2는 게임 역사에 기록될 명작이기에 장기적인 시각에서 보면 잘못이 아닐지 모르나, 개발자 입장에서 좋은 경우는 아니니까.

게임을 하다보면 건물이 포탄에 맞아 산에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고, 주인공이 그 건물 위에서 전투를 펼치고 있는 장면을 만나게 된다. 개발자들 이야기로는 멋스럽게 보여 만들었다고 하는데, 예상보다 어려운 알고리즘이 필요한 장면이었던 거다. 결과적으로 이 장면은 예상 개발시간의 10배 이상을 잡아먹었다"


또한, 그는 프로토타이핑이 그저 재미없어 보일 때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전했다.'월드 오브 구'의 개발자 카일 개블러의 사례를 예시로 든 그는 전작을 만들 당시 이것 저것 시도해봤지만 계속 재미가 느껴지지 않자 "똥에 아무리 금을 칠해도 똥이다"고 말해 청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이렇게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땐 개발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하드코딩을 진행하고, 스크립트까지 활용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전했다.





피드백, 포커스 그룹 테스트.

"개발자가 곧 유저인 게임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마인크래프트'인데, 개발자인 모장은 자신이 원하는 게임을 만들었기 때문에 유저들이 원하는 것을 가장 잘 알수 있었다고 말했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인정받고 있는 게임어스가 개발한 '히어로즈 인 더 스카이. 이 게임의 피드백 사례는 더욱 특별하다. 이 회사의 신입사원은 우선 입사 직후부터 일주일간은 해당 게임만 플레이하게 된다. 이후 느낀 점이나 개선 방안을 돌아가면서 발표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의욕이 넘치는 신입이거니와, 기존에 있던 개발자처럼 게임에 동화된 상태가 아니기에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다수 등장했다고.

물론 모든 피드백이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디너 대쉬'라는 게임은 대상 유저층을 40대 여성으로 잡았지만, 개발진에 40대 여성이 존재하지 않아 테스트를 진행하는 데 많은 고생을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개발자는 나이를 먹지만, 그들이 게임으로써 만나야 하는 유저들의 나이대는 고정되어 있기에 단순히 자신이 즐기고픈 게임만 만드는 것도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그 단점을 보완하는 것이 바로 포커스 그룹 테스트(이하 FGT)다.

"FGT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게임을 전문 매체나 유저를 소수만 초청해 테스트를 진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통해 플레이어가 게임의 어떤 부분에서 막히는지와 같은 다수의 문제점을 사전에 찾아낼 수 있다. '언차티드'의 경우 정규 포커싱그룹만 15개를 운영하며 게임의 완성도를 다졌고, '하프라이프2'는 최종 개발기간 2년을 외부 플레이 테스트만 한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 마계촌과 같은 최신 개발 타이틀 대부분 FGT를 채용하고 있는 추세다"




사람

"개발자는 필요 이상으로 뽑아야 한다. 업무가 빡빡하면 급한 불 끄느라 정신이 없어 시스템 개선에 애를 먹게 된다. 이럴게 되면 야근이 잦아지고 이직률도 높아지게 된다. 또한 괜찮은 개발자는 필요할 때 찾으면 항상 없기 때문에, 미리 뽑아두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함께 짚고 넘어갈 부분은 '중간 관리자'의 필요성이다. 이 직책은 회사에서 어떠한 결정을 내렸을 때 제대로 전파됐는지에 대한 여부 확인 및 의사결정 통일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의사소통

"프로야구 매니저 개발사 좌석 배치도를 보면, 사업팀과 개발팀이 바로 옆에 위치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대화가 상시로 오가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즉, 서로의 고충을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다. 게임을 개발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회사 내부에 의사소통이 활발하게 진행되도록 문화를 형성하는 것이다.



일정, 크런치

"일정은 언제나 밀리기 마련이다. 개발자는 갈수록 나이를 먹고, 이는 체력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그렇기 때문에 개발자에 대한 배려가 없으면 재미있는 게임은 나올 수 없다. 명심해야 할 것은 개발자부터 즐거워야 즐거운 게임이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느 때이건, 개발자에게 충분한 휴식을 보장해야 한다"

사업, 퍼블리셔, 해외진출

"리그 오브 레전드의 경우, 한국에서 인기 순위 1위를 차지하고 있고, 중국 역시 동시접속자 100만 명을 달성할 정도로 성황리에 서비스 중이다. 하지만 연 글로벌 매출은 735억 원 대로 의외로 적은 편이다. 이는 리그 오브 레전드 특유의 화끈한 무료화 정책이 유저에게는 좋게 받아들여지지만, 사업적 부분에서는 평가절하되는 요소로 작용한다. 한국인 입장에서 보면 실패한 사업모델로 비춰질 가능성도 있다"

사업 모델 구성 실패는 상품화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따라주지 않을 때 발생한다고 말한 박일 프로그래머. 이어 예시로 든 마작게임 '작룡문'은 프로 마작사 두 명의 손 모양을 본따 모델링을 진행, 게임 내에 적용했다고 한다. 이후 고양이 손 스킨 같은 상품화를 구현해 큰 수익을 내는데 성공했다고. 사업적 부분으로만 보면, 저 비용으로 고 효율을 이끌어낸 좋은 사례라고 설명했다.

'테일즈런너'는 좋은 퍼블리셔 덕분에 성공한 대표적 사례다. 이 게임은 총 12년간 나우콤과 퍼블리싱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한국 게임 역사상 최장 기록이다. 하지만 첫 클로즈 베타 때 동시접속자는 겨우 100여 명 뿐이었고, 오픈 베타 테스트 때는 1,000명에 불과했다. 개발자도, 퍼블리셔도 내심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우콤 측은 끝까지 믿어줬고, 그 결과 일 년 만에 동시 접속자 5만, 2012년 3월에는 동시 접속자 15만 명을 돌파했다고 설명했다.

"실크로드 온라인의 성공 이유는 두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각 나라를 문화재를 충실히 구현한 던전 디자인 덕분이고, 다른 이유로는 단순한 퀘스트 구조를 들 수 있다. 보통 퀘스트가 단순하면 노가다 성이라 치부해 깍아내리기 마련이지만, 터키와 같은 비영어권 국가에서는 '무엇을 몇 마리만' 정도만 알아 들어도 게임 진행이 되는 게 오히려 플러스로 작용한 것이다"

박일 프로그래머는 마지막 예로 든 '크로스파이어' 역시 한국 시장 실패가 오히려 중국 시장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고, 그 덕분에 더욱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해석했다.





욕심

"롤링콩즈라는 작품은 800개 중에 절반 가까이 되는 게임 레벨을 과감히 삭제한 후 출시했다. 이는 게임 전체의 완성도를 위해 미비한 부분을 버린 것이다. 월드 오브 구 역시 완성된 레벨 중 2/3를 삭제했다"

이는 완성도에 대한 개발자의 욕심이 반영된 것으로, 양보다는 질이 중요한 게임의 기준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리프트(RIFT)를 예로 들며, 핵심 콘텐츠인 리프트 시스템을 제외한 나머지는 일반적인 MMORPG의 틀에 맞춰 개발되었다고 설명했다. 이는 불필요한 부분에 투자할 시간을 아끼고, 가능한 유저들에게 빨리 완성된 게임을 선보이기 위해 선택된 것이라고.




결론 - 위대한 게임 개발팀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그는 강연을 마무리하며 김택진 사장의 말을 인용했다. '게임은 인류의 뇌에게 주는 선물'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게임을 개발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이 시대의 모든 게임 개발자들은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