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운드 디자인은 아직 일반인에게 낯선 개념이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급격히 떠오르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문화 콘텐츠에서 소리를 지배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일이다. 음악과 음향은 비주얼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우리 의식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빅밴드의 이동빈 프로젝트 매니저(PM)는 '3D 리얼 그래픽 모바일 야구게임을 위한 사운드 제작기'라는 제목의 KGC 2013 강연에서 이런 사운드 디자인의 세계를 안내했다. '빅밴드 사운드 디자인'은 국내 게임 및 애니메이션, 영화 등 영상 매체의 사운드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업체. 이동빈 매니저는 최근 사운드 디자인을 담당했던 게임 '이사만루 2013'의 제작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 빅밴드 사운드 디자인의 이동빈 작곡가 겸 프로젝트 매니저


"대기업에서도 사운드를 아웃소싱으로 돌리는 추세인데, 음악하는 사람은 그림보다 폐쇄적이라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개발자나 기획자와 소통 자체를 못 하는 사례를 많이 접했어요."

기기들이 워낙에 좋아져서 이제 웬만한 것은 거의 다 가능하다. 05~07년에 유행이 일던 MMORPG의 시스템이 다시 돌아왔는데, 그것이 모바일로 돌아온 추세다. 대형 개발사들은 2~30명의 유저가 모바일 서버에서 동시에 플레이할 수 있는 것도 생각하는 상황. 스마트폰이 들고 다니는 콘솔로 진화되어서 콘솔 타이틀이 모바일로 역이식되는 경우도 나오기 시작했다.


▲ 모바일 야구게임 중 뛰어난 그래픽을 자랑한 '이사만루 2013'


"'이사만루 2013'의 작업 의뢰를 받았을 때 데모 플레이를 해보고 상당히 놀랐습니다. PC게임의 그래픽과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죠. 보다 더 현실에 가깝게 만드는 것이 목표인 게임이었고, 그 속에서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었죠."

이렇게 현실감을 느낄 수 있는데 왜 실제 야구를 하러 나가지 않을까. 문득 깨달았다고 한다. 우리는 류현진이 될 수 없지만 류현진이 되어보고 싶은 심리. 능력은 없어도 대리만족을 느끼기 위해 현실과 같은 체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모바일 게임 '인피니티 블레이드'의 경우, 우리가 몇십 년을 익혀도 쓰기 힘든 검술을 체험할 수 있다. 게임을 하다 보면 수려한 비주얼 말고도 음악과 효과음에서 생동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비주얼과 사운드가 결합하는 것이 현실감의 필요 조건이다.




'이사만루 2013'의 제작 목표는 실제 프로야구 중계를 보거나 그라운드에서 플레이하는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처음 BGM은 개발사 공게임즈 측에서 MBC 스포츠플러스의 '공수교대송'과 같은 분위기로 만들어달라고 했단다. 찾아보니 영국에서 만든 곡이었고, 원래도 스포츠를 위해 만든 곡이었다고. 복싱 경기 중계방송을 위한 테마였다. 개발사에서는 한 번에 꽂힐 수 있는 후크(Hook) 테마를 원하고 있었다.

이동빈 매니저는 그런 목적으로 처음에 만들었던 곡을 들려주며 강연을 이어갔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30초로 줄였던 음악을 15초로 다시 줄였다. 그러던 차에 이건 아니다 싶어 영업 이익을 포기하면서 역제안을 냈다. 곡을 여러 개 쓰지 말고, 곡 하나의 템포를 길게 가져가자고 한 것.




거기서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었다. 당시 프로야구 중계 방송사마다 각자 경쟁적으로 주제가를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이동빈 대표는 긴 곡을 새로 만들고, 가사를 지어 직접 보컬까지 넣었다. 한밤중에 방 안에서 마이크를 잡고 혼자 노래를 부르자 어머니가 방문을 두드리며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냐'라고 물어보았다는 에피소드도 공개했다.

그 곡 자체는 쓰이지 않았지만, 보컬곡을 만드는 것 자체는 개발사에서 좋은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새로운 곡을 신경 써서 만든 뒤 제대로 믹싱을 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Full Swing'이라는 현재 '이사만루 2013' 테마곡이다.

▲ 밴드 '부활'의 보컬 정동하가 부른 주제곡 'Full Swing'


"테마곡에서 만족을 이끌어냈더니, 그전까지는 눈치를 보는 입장에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됐죠"라면서 그는 웃었다. 현실감 있는 소리를 위해 현장에 찾아가 야구심판아카데미 회장의 콜 사인을 녹음하기도 했다고. 각 구단별, 선수별 응원가도 직접 야구장에 가서 현장감 있게 녹음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이 게임은 프로야구 개막에 맞춰 발표할 예정이었다. '야구를 안 하는데, 응원가를 어떻게 녹음하지?'. 결정적인 난관이었다 시범경기 때는 응원단이 오지 않는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이동빈 매니저는 잠시 숨을 돌린 다음 대답했다. "대학생 아르바이트를 50명 고용했습니다"

온갖 곳에 모두 광고를 올려서 50명 숫자를 채우고, 동국대 측에 장소를 허가받는 데도 애를 먹었다. 그 결과 녹음은 성공했지만, 인원이 많지 않으니 역시 현장감이 부족했다. 그래서 믹싱에 믹싱을 거치고 여러 노하우를 동원해 더 많은 사람이 부르는 분위기를 끌어냈다. 물론 비용은 늘었다. "비용이 늘자 불안해지기 시작했어요. 반드시 성공해야 했거든요(웃음).

'게임성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냐, 실제를 재연하는 것이 중요하냐'. 이 균형을 잡는 일이 쉽지 않은 작업이었어요. 이런 식으로 어떤 제작의 순서가 흘러가는구나 하는 것을 안다면 게임 개발시 사운드 진행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원래 기획에서 많이 바뀌었지만, 개발사 측에서 이것이 최상이라고 받아들여주어서 굉장히 고마웠다"고 이동빈 매니저는 전했다. 사운드 제작을 외주 업체에 맡길 때는 보통 의구심 없이 전적으로 맡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이러저러해달라고 의뢰를 받으면 사운드는 시각적인 다른 것과 달리 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의뢰한 의도에 부합하는 결과물을 내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몬스터가 나오는데 '지옥의 심연에서 끓어오르듯이 해주세요' 라고 말하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죠"라고 실제 예를 든 이동빈 매니저는 "최초의 기획에서 완전히 바뀌어 완성된 '이사만루 2013'의 경우를 보듯이, 기획 단계에서부터 함께 자문을 받고 고쳐나가다 보면 확실한 사운드를 뽑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강연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