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솔 또는 패키지 게임의 RPG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무엇일까. 일단 몬스터를 사냥해서 레벨을 올리고 강해진 다음에 보스를 쓰러뜨리고 엔딩을 본다는 공식이 생각날 것이다. 기본 장비로 몬스터를 잡고 돈을 모아서 상점에서 장비를 구입해 가면서 스토리를 따라가서 보스를 쓰러뜨린다가 정석에 가깝다.



그런 방향에서 생각해 본다면 니혼이치(日本一)사의 게임들은 뭔가 규격이나 규칙에서 벗어난 게임들이 많다. 속칭 폐인전기라고 불리는 마계전기 디스가이아 시리즈를 대표로,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난 것 같은 게임들을 자주 제작하는 게임사이다. 그런 니혼이치사의 또 하나의 상식 파괴 RPG가 10월 말 PSP용으로 발매되었다.



게임 안에 노래와 뮤지컬이 흐른다

안티포나의 성가공주~천사의 악보 Op.A~(アンティフォナの聖歌姫 ~天使の楽譜 Op.A~, 이하 안티포나)라는 이름의 이 게임은 제목에 들어 있는 악보나 Op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대로 음악 연주와 관계가 깊은 게임이다. 게임 내에 등장하는 캐릭터 이름이나 도시 이름 등 고유명사들을 전부 음악 연주에서 사용되는 단어를 이용했을 만큼 음악과 관계가 깊다.



좀 더 다르게 표현하자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동화책과 같은 RPG라고도 할 수도 있다. 동화같은 RPG에 뮤지컬이 흐른다고 하면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 게임은 PS1 시절의 마알왕국의 인형공주(マール王国の人形姫)라는 RPG로부터 시작된 시리즈 중 최신작이다.



인형공주 시리즈는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낮은 난이도를 바탕으로, 생산이나 탐색 등 복잡한 시스템 없이 일직선으로 동화책을 읽듯이 스토리를 진행하는 것이 특징인 RPG다. 또한 플레이 중간중간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듯이 노래를 집어넣어서 텍스트로만 진행되던 다른 RPG의 이벤트들과는 달리 더욱 게임의 캐릭터들이 친숙하게 느껴지는 게임이다.




[ 안티포나의 성가공주 프로모션 영상 ]



보통 마을청년 또는 귀족이나 왕족 출신의 용사가 잡혀간 미소녀 공주를 구출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던 일본의 초기 RPG의 공식에서, 마을처녀가 마법에 걸린 미소년 왕자를 동료 인형들과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서 마녀를 쓰러뜨리고 왕자를 구출한다는 정 반대의 구성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인형공주 시리즈의 게임 중간중간 중요한 장면에서는 자막이나 일러스트 등으로 표현되던 이벤트가 아니라, 캐릭터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풀보이스 이벤트 뮤지컬이 흘러나왔다. 그런 연출로 많은 게이머들에게 슈퍼패미콤 시절 발매되었던 파이널판타지6 중간에 삽입되어 호평을 받았던 오페라 장면 이상의 충격을 줬다.



한국에서 인형공주 시리즈는 정식 발매가 되지 않았기도 했지만, 당시 PS1 게임계는 셀 수 없이 많은 게임들이 봇물처럼 쏟아지던 시절이라 일부 게이머들에게만 알려진 비운의 게임이었다. 그렇지만 게임 내에서 폭력적인 부분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체스와 같은 보드게임 방식의 전투 등 기존 게임들과는 다른 특이한 요소들이 많아서 숨겨진 걸작 중 하나로도 불려왔다. 1편 발매 후 1편의 주인공이 왕자와 결혼하여 낳은 딸이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걷는 2편도 제작되었으며, 최근에는 NDS등으로 이식되기도 했다.




[ 안티포나의 성가공주 메인 일러스트 ]


그런 역사를 지닌 인형공주 시리즈의 정식 후속작이 안티포나의 성가공주다. 전작인 인형공주 시리즈는 마알 왕국의 왕가에 관련된 인물이 주인공이었지만, 안티포나는 마알 왕국의 이웃 나라인 안티포나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무대로 한다.



물론 스토리 진행에 따라 게임 중반에 전작의 배경인 마알 왕국을 방문하게 되기도 하지만, 이번 주인공인 미아벨이 안티포나 출신인 까닭에 인형공주 3이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제작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산 RPG의 공식을 따르는 듯 하며 부정하는 안티포나의 성가공주

80년대 패미컴 시절 울티마나 위저드리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드래곤퀘스트 이후 일본산 RPG는 대체적으로 큰 공식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했다.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강력한 적이 주인공의 마을을 때려 부순다던가 소꿉친구나 공주가 마왕에게 납치된다던가 하는 상황에서 게임이 시작된다. 또한 몬스터를 쓰러뜨리고 레벨업을 하며 무기나 방어구를 상점에서 구입하여 강해지고 최종 보스 몬스터를 쓰러뜨리며 엔딩을 본다.



안티포나 역시 겉으로는 일본의 RPG답게 공식을 따라서 동료를 모아서 레벨을 올리고 주인공 미아벨의 언니인 리리의 목소리를 빼앗아간 마왕 아우로스를 쓰러뜨린다는 줄거리로 이루어져 있지만, RPG의 공식을 겉으로는 따라가는듯 하면서 게임 중간중간 뒤집거나 쓸모없게 만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단 상점과 아이템부터 시작해 보면 상점에서 파는 아이템은 무기/방어구/소모품이 기존의 RPG였다면 안티포나에서는 무기나 방어구를 아예 상점에서 판매하지 않는다. 그 대신 마법 역할을 하는 연주용 악보나 회복용 음식을 구입할 수 있는데, 악보는 사실상 게임 플레이중 재료를 모아서 악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구입할 필요성이 낮다. 심지어 전투 자체도 쉽기 때문에 소모품을 사용할 일도 별로 없어서 상점은 거의 구색맞추기에 가깝다.




[ 기본 전투장면 ]


전투와 레벨업이 스토리 진행에 필수인 일본산 RPG와는 달리, 안티포나에서 전투는 곁다리에 불과하다. 전투중 불리할 것 같으면 언제든지 도망을 칠 수 있다. 대부분의 RPG에서 전투중 도망을 치기 위해서는 운 수치가 높거나 상대방보다 민첩성이 높거나 하는 등 특별한 조건을 필요로 하지만, 안티포나에서는 그냥 사과하면서 버튼 연타만 하면 된다.



전투중 도망치기를 선택하면 파티원들이 몬스터에게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면서 몬스터의 인내심 게이지가 표시되고, 인내심이 폭발하기 전에 ○버튼을 연타해서 몬스터의 화를 가라앉히면 아무 문제 없이 전투에서 빠져나온다. 물론 중간중간 일정 이상의 레벨업이 필요한, 피해갈 수 없는 이벤트 전투가 있지만 한두 시간 정도만 몬스터 사냥을 하면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다. 심지어 최종 전투도 최고 레벨인 100에서 반도 채 안 되는 40 전후에서도 승리할 수 있을 정도이다.



레벨업 면에서는 일반적인 RPG의 레벨업 공식에서는 한 번 레벨업을 하면 다음 레벨업까지 필요한 경험치가 늘어나는 형태가 많은 것에 비해, 안티포나에서는 모든 레벨대에서 레벨업에 필요한 경험치는 100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전투 몇 번이면 쑥쑥 레벨업을 하므로 레벨 노가다라는 것이 거의 없는 편이나 마찬가지다.




[ 몬스터의 분노가 폭발하기 전에 ○버튼을 연타하여 사과한다 ]


안티포나의 흐름은 그저 게임의 스토리 진행하는 대로 따라가다가 중요한 장면에서 뮤지컬이나 노래 나오면 감상하고, 다시 다음 마을로 이동하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엔딩을 보는 단순한 구성이다. 복잡하게 꼬여있는 암시나 복선도 없고 동화책을 읽듯이 술술 플레이하면 어느새 엔딩이다.



전체적으로 일본산 RPG의 핵심 요소는 다 들어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을 구색 맞추기로 만들어 놓거나 간략화시키며, 일부는 대놓고 무시하는 식으로 만들어서 '손이 많이 가는 복잡한 시스템과 배신과 복선을 이중 삼중으로 깔아놓아야 대작'이라는 기존의 공식을 깨뜨리며 기승전결의 평이한 동화책 스토리로 만든 게임인 것이다.



여성들을 위한 작고 귀여운 RPG

전작 인형공주는 RPG 레벨업 공식의 요소나 도감 채우기 및 숨겨진 콘텐츠 찾기가 강해서 플레이 타임이 긴 편이었지만, 안티포나에서는 게임의 스토리도 비교적 짧고 가볍게 즐기는 RPG로 제작되었다. 그래서 RPG는 복잡하고 길어서 싫다는 생각을 가진 여성들이 RPG 입문용으로 걸맞는 게임이다. 2D의 도트 그래픽으로 캐릭터 자체도 깜찍하고 귀엽게 그려져 있어서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 전투시 선택하는 메뉴도 몇 개 없을 정도로 간단하다 ]


안티포나는 너무나 가볍게 즐길 수 있는 탓에 지난 진여신전생 SJ로 하드코어 게이머의 혼을 불사른 기자에게는 너무나 허망할 정도였지만, 그 허망할 정도의 쉽고 가벼운 난이도로 인해 전작 인형공주 시리즈와 함께 여성용 RPG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여성용 게임이란 남성들이 즐기는 연애 어드벤처의 입장을 반대로 하여 소녀 주인공이 미소년 NPC들과 연애를 하는 연애 어드벤처가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여성향 게임이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안티포나에서는 스토리를 따라가는 어드벤처의 요소에 쉽게 즐기는 RPG 요소를 집어넣은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향 어드벤처를 주로 즐기던 여성들을 RPG로 끌어당길 수 있는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캐릭터의 개성을 살리고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 게임 내에 존재하는 모든 캐릭터의 대사가 풀보이스 처리가 되어 있다. 주인공들은 기본이요, 심지어 마을 처녀 A까지 모든 대사를 음성으로 말하는 점이 구연동화를 연상시킨다.



[ 게임 플레이중 중요 장면에서 볼 수 있는 뮤지컬 영상 ]



너무나 편하고 가벼운 것이 단점일지도

쉽고 편하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안티포나지만 일반적인 RPG를 기준으로 생각할 때는 부족한 점도 없지 않다. 어디까지나 기자 본인이 깊고 어렵고 길게 플레이하는 것을 즐기는 하드코어 게이머라는 관점에서 본 단점이다.



일단 게임이 너무 짧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풀보이스 음성으로 PSP의 대용량을 이용한 것은 좋지만 스토리 자체가 동화처럼 짧은 기승전결로 되어 있기 때문에 10~15시간이면 충분히 엔딩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플레이 타임이 짧다. 최근 콘솔용 RPG들이 너도나도 플레이 타임을 늘리고 기본이 40시간 정도인 추세에 비추어 보면 매우 짧은 것이다.



물론 게임 내의 각종 의뢰나 몬스터 도감 등을 모든 요소를 찾아낸다고 하면 40시간 이상으로 플레이 타임이 늘어나기는 하지만 게임의 컨셉 자체가 따뜻하고 편한 RPG인 탓에 게임구매 비용의 본전을 뽑는다는 각오로 모든 요소를 파헤치지 않는 한 20시간 이상 플레이하기 어렵다.




[ 어디서나 함께의 토로도 깜짝 출연 ]


두 번째 문제는 2회차 플레이를 해야 한다는 동기부여가 약하다는 점이다. 2회차 플레이에 들어서면 1회차에서 얻은 아이템들을 그대로 가지고 시작할 수 있고, 소니의 간판 캐릭터인 흰 고양이 토로와 검은 고양이 쿠로가 동료로 된다는 것 외에는 추가 요소가 없다. 1회차때 못 찾은 아이템이나 몬스터 도감 등록하기 정도가 2회차에서 할 수 있는 일이다.



정식 발매가 기다려진다

물론 위의 단점 외에도 게임 내의 언어나 캐릭터의 목소리 전부 일본어라는 강력한 언어적 장벽이 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일본어를 아는 사람들을 위한 게임이라는 점도 안티포나를 쉽게 즐길 수 없다는 문제점이다.



안티포나는 현재 게임물 등급 위원회에서 10월 21일부로 전체이용가 판정을 받고 심의에 통과된 상태로, 아직 발매 일정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올해 내로 정식 발매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정식 발매 방식이 밝혀지지 않아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게임의 스토리 자체가 길지 않은 만큼 메인 스토리 대사집과 뮤지컬 가사집 정도만이라도 추가되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이미 심의가 통과된 것을 알면서도 굳이 외국에 주문한 것은 전작인 인형공주 시리즈를 플레이하면서 폭력 없는 평화적인 RPG라는 점에서 충격을 받았고, 그 인형공주 시리즈의 후속작이 10여년 만에 PSP로 나왔기 때문에 누구보다 먼저 접해보고 싶었던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대와 욕심은 다시한 번 동화책과 같은 게임의 스토리로 보상을 받았다.




[ 소녀의 꿈은 왕자님과 만나는 것 ]



총과 칼 및 마법으로 몬스터를 박살내며 끝 없이 레벨업을 반복하는 폭력적인(?) RPG도 그 나름의 재미가 있지만, 잠시 칼부림에서 벗어나서 동료들과 왕자님을 구출하러 가는 노래하는 소녀의 동화를 PSP용 게임으로 즐겨보는 것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신선한 경험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