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브캣스튜디오 이봄 시나리오 라이터]

  • 주제: 스토리텔링으로 즐기는 콘서트- 시나리오 기획자를 위한 TRPG의 세계
  • 강연자 : 이봄 - 넥슨코리아 / NEXON KOREA
  • 발표분야 : 게임기획
  • 권장 대상 : 게임기획자, 시나리오 라이터, TRPG 플레이어, 개발자 전반
  • 난이도 : 사전지식 불필요 : 튜토리얼이나 개요 수준에서의 설명


  • [강연 주제] 3년 간 'M.O.E' 프로젝트에서 시나리오를 담당하면서 느꼈던 아쉬운 점을 보완하기 위해 그동안 고민하고 노력한 결과물을 가져왔습니다. 책이나 애니메이션, 영화와 달리 게임은 플레이어의 선택이 서사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나 준비된 선택지를 쥐어주고 그 결과를 확인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매력적인 시나리오가 되지 않습니다. 이 세션에서는 유저와 시나리오 간의 상호 작용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 장르인 TRPG의 작법을 통해 유저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선택지와 결과물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공유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길에 대해 '이 길이 맞는지' 한 번씩 고민하는 계기가 생기게 된다. 데브캣의 시나리오 라이터인 이봄 개발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게임 개발자로서 일하는 과정에서 '사춘기' 비슷한 것을 겪었던 적이 있다고 회상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이봄 라이터가 개발자의 사춘기를 겪을 당시의 고민은 '게임 개발을 통해 세상에 기여할 만한,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까'였다. 게임 개발에 지쳐서, 게임 개발이 싫어져서 생겼던 고민은 아니었다. 일은 즐거웠고, 개발자로서의 자부심도 갖고 싶었다. 하지만, 문득 세상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할 때면 어딘지 모를 자기비하적인 감정이 마음 한 공간을 차지했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한 고민을 하던 와중, 이봄 라이터는 TRPG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이 가졌던 고민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았다. 그것은 바로 게임이 무엇보다 좋은 의사소통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TRPG속 게임 마스터와 플레이어가 활발한 대화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듯, 실제 게임에서도 개발자가 유저들에게 의미 있는 선택을 제공하고, 또 그 선택에 대한 피드백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NDC 2019 마지막날 강단에 선 이봄 라이터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의미 있는 선택을 제공하기 위한 고민 - TRPG를 통해 이봄 라이터가 깨달은 것들

    ▲ 일반적인 TRPG의 모습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 中)

    강연을 시작하며 이봄 라이터는 개인적으로 TRPG에 대해 '스토리텔링으로 즐기는 콘서트'라고 생각한다고 전하며 TRPG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우리나라에서는 다소 생소한 느낌이 없지 않은 TRPG는 Table Top Role Playing Game의 약자로, 일반적으로 테이블에 다양한 소품을 펼쳐 놓고 즐기는 RPG를 일컫는다. TRPG를 즐기기 위해서는 세계관을 구성하고, 플레이어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게임을 이끌어나가는 '게임마스터'가 필요하며, 또 게임마스터가 구축한 세계관에 속해 이야기를 진행하는 '플레이어'가 필요하다.

    이렇게 게임 마스터와 플레이어가 모두 모이면, 기본적으로 TRPG는 게임마스터가 특정한 상황을 제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제시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하고, 이후 결정한 바를 게임 마스터에게 다시 알려준다. 다시 게임 마스터는 플레이어가 내린 결정에 대해 주사위와 같은 규칙으로 성공/실패 여부를 알려주는데, 이봄 라이터는 "이러한 과정의 반복을 통해 그 테이블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TRPG" 라고 전했다.

    또한 그는 "PC나 모바일로 게임을 할 때는 플레이어가 이미 준비된 커맨드 안에서 선택을 하는데, TRPG는 게임마스터와 의사소통이 이뤄지기에 더욱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다"며 TRPG의 매력을 설명했다.

    ▲ 게임마스터와 플레이어가 함께 만들어가는 TRPG

    "마치 콘서트에서 관객들이 공연하는 사람에게 응원을 보내듯, TRPG는 스토리텔링으로 하는 콘서트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그 과정을 접하면서 어쩌면 게임도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믿게 됐죠. 유저가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공감을 받았다고 느끼고, 또 다른 유저들과 소통하면서 나아가는 그런 매개로서의 게임이 될 수 있겠다고 말이에요"

    이봄 라이터는 이렇게 TRPG를 접하면서 얻은 느낌을 더욱 연구해서, 자신의 작업물에 가져오고 싶다고 생각했다. 게임이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소통의 장으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힌트를 얻게 된 것이다. 이어 그는 해당 분야에 대해 지금까지 이뤄진 연구를 참고하며 느낀 바를 설명해 나갔다.

    TRPG의 속성을 게임에 접목하기 위해서는, 먼저 TRPG와 CRPG(컴퓨터 또는 모바일로 즐기는 RPG의 총칭으로서)의 특징을 비교하는 것이 좋았다. 이 둘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대화를 누구와 하냐는 것이었는데, TRPG의 경우 위에서 언급했든 게임마스터를 맡은 사람과 대화가 이뤄지지만, CRPG의 경우에는 시스템에 준비된 커맨드를 통해 유저에게 선택지를 제공하고, 유저는 또 선택지를 입력하는 방식이다.

    이봄 라이터는 "이런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에 TRPG 요소를 접목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며, "그래도 TRPG 또한 게임이다 보니 규칙과 제한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적용시킬 수 있을 방법이 있다고 믿었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TRPG를 즐기며 플레이어가 받는 '세계와 소통하는 느낌'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봄 라이터는 TRPG의 의사소통 메커니즘에 대해 '플레이어가 개인적인 선택지를 세계에 전달하고, 세계는 다시 플레이어에게 개인적인 피드백'을 주는 것에 있다고 전했다.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해당 세계에 대한 개인적인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직접 그 세계와 소통하는 느낌을 받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어서 그는 이러한 느낌을 전달하기 위한 노력은 CRPG에서도 많이 이루어졌다고 설명하며, 그 예로 '메타 픽션'과 '오픈 월드'의 메커니즘을 꼽았다. 메타 픽션은 작품 속 세계가 픽션이라고 인지되는 설정을 한 작품으로, 플레이어가 아닌 캐릭터에 초점을 맞춰 플레어가 자신의 의지대로 게임을 진행하는 느낌을 전달한다. 오픈월드의 경우 게임 내에 수많은 선택지를 제공하고, 플레이어가 이를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하면서 세계관의 영향을 준다는 느낌을 전달한다.

    ▲ 개인적인 경험을 제공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왔다

    하지만, 이봄 라이터가 신작을 맡기 전에 작업했던 M.O.E는 주기적인 업데이트를 통해 시나리오를 추가하는 모바일게임이었고, 이러한 방식의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일방적인 스토리를 제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게임 유형에서는 TRPG의 느낌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이봄 라이터는 "TRPG를 접한 뒤 그동안 배워온 점을 토대로 신작에서 도전해보고 싶은 요소들"이라며 그동안 고민했던 결과들을 설명해 나갔다. 그 방법은 바로 유저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개인적인 선택지'를 주는 것과, 유저들의 선택지에 따라 '개인적인 피드백'을 주는 것이었다.

    물론, 세상의 유저는 제각각이고, 그만큼 많은 선택지와 피드백을 게임 내에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이봄 라이터는 "관점을 다르게 본다면 간단한 질문을 통해서도 개인적인 답변을 유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바로 선택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질문 자체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2+5라는 질문에는 7이라는 답 밖에 없어요. 오직 숫자 7만이 의미를 가지죠. 하지만 "고양이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예 또는 아니오 밖에 없을 수 있지만, 그조차도 어떻게 보면 상당히 개인적인 답변이 됩니다"

    이러한 선택지의 좋은 예가 바로 인터랙티브 드라마 '블랙미러: 밴더스내치'에 등장하는 좋아하는 시리얼을 물어보는 장면이다. 어떤 시리얼을 선택해도 정답은 없고, 이후 드라마의 줄거리가 달라지지도 않지만, 시청자는 자신이 선택한 시리얼이 이후 장면의 소품으로 활용되는 것을 보고 자신이 선택한 답변이 세계의 영향을 준다는 피드백을 받는다. 이봄 라이터는 "두 질문의 결과가 동등할 때, 플레이어의 선택 자체에 무게가 실린다"고 덧붙였다.

    ▲ 두 질문의 결과가 동등할 때, 플레이어의 선택 자체에 무게가 실린다

    그렇다면 제각각인 플레이어들에게 개인적인 피드백은 어떻게 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자신이 한 선택이 유의미하다고 느끼도록 해줄 수 있을까?

    이봄 라이터는 이에 대해서도 관점을 바꿔 생각해볼 수 있다고 조언했다. 플레이어에게 주는 피드백이라고 해서 꼭 말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때로는 플레이어의 이야기를 '듣는' 것 또한 좋은 피드백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 선택지에 정답이 없으면, 모든 분기를 다 만들어야 한다?

    사실, A를 선택하면 좋은 엔딩을 보게 되고, B를 선택하면 나쁜 엔딩을 보게 되는 것은 개발자에게 있어서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정답'이 없다면 모든 선택지에 따른 분기를 모두 만들어야 한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온라인 게임이 위주인 국내 시장에서는 비현실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봄 라이터는 선택지에 대해 정확하고 구체적인 피드백을 주게 된다면, 굳이 엔딩이 바뀌는 정도가 아니더라도 유저의 선택이 세계에 영향을 주었다는 느낌은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선택지를 통해 쿠키를 먹었을 때와 케이크를 먹을 때, 서로 다른 스토리 요소들이 진행될 수는 있지만 엔딩에는 변화가 없다. 이 정도라도 플레이어들은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피드백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 의미 있는 결정을 보여주기 위해 엔딩이 많을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게임 속에 선택지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유저들이 세계에 대해 어떤 선택을 내릴수도, 또 게임이 유저의 선택에 대해 피드백도 전달할 수 없다면, 정말로 유저가 그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감정이입할 요소를 넣는 것이 불가능할까?

    이봄 라이터는 "어쩌면 유저가 그 게임을 플레이하기 결정한 것 부터가 큰 선택"이라며, "유저가 게임을 계속 플레이하기 선택했을 때 세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피드백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전했다.

    그는 한가지 사례로 일본의 애니메이션 '메이드 인 어비스'를 들었다. 해당 애니메이션의 줄거리는 계속 지하로 내려가는 일직선의 진행이지만, 주인공 일행이 계속 지하로 내려갈수록 세계는 지옥과 같은 모습으로 변한다. 즉, 시청자들이 다음화를 보기로 선택하는 순간 애니메이션은 달라지는 세계의 모습으로 시청자에게 피드백을 준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봄 라이터는 "TRPG를 통해 유저가 세계로부터 '이해받았다', '소통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며, "선택 자체에 무게가 실릴 수 있는 문제를 제시하는 데서 시작하고, 유저의 선택에 대해서는 정확하고 구체적인 피드백을 주는 것, 그 과정에서 유저들은 개인적인 영향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게임을 함께 만들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강연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