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각종 시험공부에 알바에 기타등등 여러 요인 때문에 연재가 심히 늦어졌습니다.. 너무 오래 걸려서 연재 때려친 거 아닌가 하신 분들 그 걱정 다시 주머니에 넣어두시고 긴 말 필요없겠죠? 바로 들어가도록 하죠

(노래와 같이 감상해주십쇼!)

"레닌그라드 포위의 진행상황과 연계하여 보았을 때, 지금까지 진행된 남부 집단군 및 중부 집단군 사이에 있는 배후의 적을 성공적으로 일소한 결과로 중부 전선군의 티모셴코가 지휘하는 군을 향한 결정적인 작전의 수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일소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육군과 공군이 한 곳에 집중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각 집단군에 하달한다. (후략)"
- 아돌프 히틀러, 총통 지령 35호, 9월 6일

스몰렌스크에서의 전투는, 물론 러시아에게는 재앙이었습니다. 이미 민스크에서'만' 40만을 훌쩍 상회하는 병력을 잃었고, 스몰렌스크에서는 무려 75만 명에 가까운 인명 피해를 보았습니다. 전사 18만, 부상 27만, 그리고 포로가 30만. 민스크와 스몰렌스크 두 전투의 사상자만 합쳐서 벌써 백만이 넘어가고 있었고, 다른 두개의 전선(북부 집단군을 상대하는 북서 전선군, 남부 집단군을 상대하는 남서 전선군과 제9군)에서의 피해까지 생각해 보면 스몰렌스크가 함락된 시점에서 이미 병력의 피해는 2백만에 가깝다고 해도 농담이 아닐 정도가 됩니다. (참고로 3년동안 벌어진 한국전쟁 총 사망자가 이거랑 비슷합니다.)
그러나... 소련군이 정말 뒤집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피해를 전 전선에서 입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독일군의 진격 속도도 점차적으로 느려져 갔습니다. 브레스트 - 민스크 - 스몰렌스크간의 거리가 서로 대충 비슷한데, 전쟁 개시에서 민스크 점령까지 불과 열흘 가량이었는데 민스크에서 출발하여 스몰렌스크 점령까지 걸린 시간은 거의 한 달 가량. 애초부터 독일군의 작전이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는 철저한 반증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칼자루 자체는 독일군이 쥐고 있었습니다.

키예프로의 선회

스몰렌스크가 넘어간 게 8월 7일 전후의 일입니다. 구멍이니 포위망이니 그런 것 없이 전선이 깔끔하게 정리된 시기이기도 했죠. 같은 시기에 남부 집단군은 키예프를 위협하면서 고속 드라이브로 드네프르 방면으로 제1기갑집단군의 방향을 꺾어 우크라이나를 냅다 내달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네, 그 우만 전투죠.(추후에 남부집단군을 연재하면서 언급하도록 하죠.)

우만에서 포위망 내의 소련군이 전멸한 이후를 상정해볼 때, 남부 집단군의 그간의 전투력 손실이 상당히 커서
단독으로는 키예프를 삼킬 형편이 못 되자, 히틀러는 중부 집단군의 병력을 차출해서 남부 집단군을 도울 생각을 합니다. 물론 모스크바를 노리고 있던 구데리안과 호트는 문자 그대로 입에다 거품을 물고 반대했습니다만, 말씀드렸다시피 히틀러의 의견도 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적을 섬멸하면서 전략적 요충지라 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의 식량과 공업 지대를 가져간다는 것은 아주 매력적인 선택이었고, 안 가져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어차피 이야기했듯이 남부 집단군 단독으로 우크라이나를 죄다 접수할 능력은 애초에 되지도 않았구요. 그래서 제2기갑집단군을 남쪽으로 가게 만든 겁니다.

선회하기 전의 7월 25일경의 위치를 잠시 짚어 보자면, 제2기갑집단군의 좌익은 스몰렌스크 포위에 나서고 있었고, 좌익이 난장판이 되는 동안 제2기갑집단군의 우익은 스몰렌스크로 가는 보급을 끊고 포위망의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 스몰렌스크 동남쪽의 로슬라블(Roslavl, Рославль)이라는 소도시로 소련을 밀어붙였습니다. 밀어붙이기는 성공해서 스몰렌스크가 넘어가기 약간 전에 로슬라블이 독일군 손에 떨어집니다. 그리고 이럴 때 키예프로의 선회 명령이 떨어진 겁니다.

그러나 히틀러가 아무리 머리는 좋았어도(솔직히 기분은 정말 더럽지만 이것만큼은 인정합시다. 이 양반은 의외로 나름대로 전략을 짤 때 굴릴 머리가 있는 양반이었습니다)군사 전문가들의 우려가 괜히 나오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군을 아래쪽으로 내리게 되면 두 가지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된다는 것이었죠.

첫째로 측방을 막아줄 병력이 없습니다. 이게 지금 로슬라블에서 그대로 정남쪽으로 드릴 뚫듯이 내려가는 건데, 그 진로상의 안쪽(오늘날의 벨라루스 동남쪽의 호멜(Gomel, Гомель)에 적이 없던 것도 아니었고, 얘들을 같이 밀어붙이면서 제2기갑집단군이 남쪽으로 쭉쭉 내려와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말이 쉽죠. 밀어붙이기가 가능하다 쳐도 결국 후방 안 찔리려면 돌파 과정에서 계속해서 부대를 조금씩 두고 오던가 해야 하는데, 차출할 병력이 어디에 있어서 측면을 보호한단 말입니까?

아 이게, 프랑스 전역과는 아예 이야기가 다른 게 말입니다... 
프랑스 전역의 경우는 독일군에게 있어서 두 가지 매우 큰 이점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측면을 노출한 상태기는 하지만 프랑스군은 아예 병력이 있음에도 반격할 의지가 없다는 것이 대서양으로의 돌파 중에 거의 확실히 드러났고, 둘째로 (이게 정말 큽니다) 독일군의 최종 목적지는 바다였거든요. 자연적으로 한 면에서 포위망을 알아서 완성해 준 격이니 그만큼 포위 섬멸하기가 쉬운 상황이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측면 위험의 공포에 그대로 노출된 히틀러가 고래고래 명령을 지르는 통에 됭케르크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만...

그러나 소련은? 자연적으로 포위망을 완성해 줄 바다도 없고, 소련군이 반격 의지가 꺾인 것은 더더더더더더더더욱 아니었으니, 불안불안하게 수직으로 뚫고 내려가면서 적이 측방을 안 치도록, 혹은 측방이 공격받아도 버텨내도록 속으로 빌어 가면서 아래로 내려가라는 말인데, 이게 현실적으로... 전쟁이 애초에 확률 게임이 아니잖습니까? 작전 잘못하면 몇십만 명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거 순식간이고, 그러면 나라가 망하는 게 전쟁입니다. 이걸 쉽게 결행한 히틀러가 미친 사람이었을 따름이죠. 하여간 이런 상황이니 측방 엄호가 신경이 안 쓰일래야 안 쓰일 수가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더 큰 문제였는데, 이러면 병력이 지속적으로 싸움에 노출되면서 전투력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병력이 줄어들고, 결과적으로 제때 충전이 되지 못해서 공세한계점에 도달할 판이었다는 겁니다. 이미 독일군은 첫 6주간 세 집단군에서 거의 18만 가량의 사상자를 냈는데, 보충된 건 고작 5만이 안 되는 병력이었습니다. 이러는 판이니 모스크바 진격에 반대하던 장군들조차 "얘들 못 쉬면 이러다 큰일이 날 텐데"라는 말만 되뇌일 수밖에 없었다는 거죠.

쓰고 보니 그 두 가지 이점을 가지고도 키예프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한 소련군이 더 황당하긴 하군요. 여하간, 이러한 측면들은 독일군의 전쟁 계획이 처음부터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매우 명확한 사례의 한 가지입니다. 제가 이 말을 몇 번이나 강조하는지 모르겠군요.

아 근데... 기가 막히게도 소련의 측방 공격도 실패로 돌아갔고, 제2기갑집단군도 수직갱 뚫듯이 키예프 북쪽의 포위망을 닫으러 내려가는 데 성공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측방 공격의 실패, 이건 철저하게 소련의 문제입니다. 독일측이 잘 해서, 그러니까 전략이 뛰어나서 그런 게 아니라 명명백백한 스타브카(Stavka)의 실책입니다.

일단 내려가는 건 그런대로 대성공이었습니다. 제2기갑집단군의 남쪽에서 중부 집단군의 측방을 엄호하던 제2군이 성공적으로 제2기갑집단군과 함께 소련군을 밀어붙인 거죠. 이건 지도로 직접 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후방은 제4군이 차출되었음을 알 수 있죠. 거의 예비대까지 동원할 수 있는대로 동원해서 측방 및 후방의 위협을 막은 느낌이 강하기는 합니다만 어쨌든(실제로 민스크 및 스몰렌스크 전투 전황도를 보면 제4군은 참여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남쪽에 ∧자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부분 아래의 도시가 체르니고프(Черни́гов, 現 우크라이나의 체르니히우, Chernihiv, Чернігів)인데, 키예프 북북동쪽으로 140 km 가량밖에 안 떨어진 곳입니다(우리 나라야 인구 밀집지대가 많고 도시도 많고 산지와 구릉지는 셀 수도 없고 이래저래 대규모 병력이 이동하기 빡센 나라라서 140 km씩이나라고 해야 맞습니다만, 지금 여기는 우크라이나... 그것도 대평원이죠). 그러니까 키예프 북쪽과 남쪽에서 바이스가 철저하게 조여지고 있는 셈이었던 거죠.

지도의 붉은 화살표 보면 감이 오시겠지만, 저게 브랸스크 전선군에서 가하려던 반격입니다. 자, 앞서서 제가 이게 철저하게 소련의 실책이라 지적한 바 있는데, 이제 그 이유를 말할 때가 됐군요. 

가장 큰 이유는 저게 서류상의 병력이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아직 제대로 편성도 안 된 부대, 패잔병 잔당 떨거지들을 대충 긁어모아서 브랸스크 전선군이라 이름을 붙이고 제2기갑집단군의 측면을 치라고 쥐여준 건데... 아 삽질도 제대로 된 삽을 가져와야 땅을 파지, 자루는 썩어 있고 머리는 녹이 슨 삽으로 뭘 어쩌라는 겁니까?

 그걸 또 쥐여주면서 반격을 기대하는 스타브카가 판단을 잘못해도 한참 잘못한 거죠. 내줄 건 내주고 후방에서 재편성하면서 병력을 온존하기라도 하면 그나마 차기 방어전에 쓸 예비대라도 만들지 이건 뭐 그나마 남은 병력 다 꼴아박으라는 이야기밖에 더 됩니까? 그러고서 키예프를 지켰으면 또 모르겠으되, 키예프 포위 섬멸전은 그때까지 전례가 없었던 최악의 섬멸전이었다는 게 또 문제였죠.

더더욱 기가 막힌 건 병력의 운용 방식이었습니다. 스타크래프트할 때 앞마당 다 털리고 대충 닥닥 긁어모은 패잔병력으로 거의 막히면 GG친다는 심정으로 벌이는 마지막 한 방 러쉬를 할 때, 그거 둘로 나눠서 일부는 본진 일부는 멀티 치는 경우, 보신 적 있습니까? 지도를 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금 브랸스크 전선군에서 벌이는 러쉬가 바로 그런 꼴이었습니다. 

아, 이것도 물론 스타브카 책임. 브랸스크 전선군의 사령관으로 부임한 안드레이 예레멘코 상장은 상당히 유능한 군인이자, 독소전에서 세 번의 상처, 그것도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중상을 입었는데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아서 불같이 지휘한 희대의 용장입니다. 하여간 스타브카는 그 얼마 안 되는 병력을 나눠서 싸울 것을 명령, 아니 강요했죠.

그래서 그 결과는 뭐 말할 것도 없이...

(09/03)

(09/12)

차례대로 9월 3일과 9월 12일의 지도인데, 위의 8월 30일 지도와 비교해 보시면, 측면은 거의 변화가 없고 외려 제2기갑집단군이 더 아래로 파고들어가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런 반격은 문자 그대로 완벽한 실패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키예프의 포위망이 닫히면서......... 소련군은 또 한번 절망적인 포위섬멸을 당하게됩니다.

옐냐

그러나 소련군이 앉아서 깨지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거... 그게 바로 이 옐냐(Yelnya, Ельня) 교두보전입니다

옐냐 자체가 뭐 그렇게 크고 중요한 도시는 아닙니다. 그냥 마을이죠. 지금도 인구가 1만밖에 되지 않으니, 예전에는 훨씬 더 적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옐냐가, 스몰렌스크에서 모스크바로 가려면 넘어가야 하는 길목상에 있었다는 겁니다. 엄밀하고 정확하게 말하면 스몰렌스크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직통 도로와 철도는 옐냐를 거쳐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건 핀을 꽂듯이 스몰렌스크에서 모스크바로 이동할 때 이야기고, 앞선 글에서 밝혔듯이 그 길이가 거의 300 km 가량 되는데 그걸 측면 보호 없이 냅다 뚫어버리겠다구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결국 그렇게 주공으로 뚫고자 하면 양익에서 받쳐줘야 하는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별수없이 스몰렌스크 남쪽에서도 모스크바 방면으로 소련군을 밀어붙여야 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문제는 스몰렌스크 남동쪽으로는 정북-정남으로 1자형으로 세워진 것처럼 되어 있는 강이 여러 개가 있었다는 거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옐냐 교두보였다는 것이죠. 게다가 다른 지역이라면 그래도 상류 지역이라 약간만 우회하면 되는데 옐냐는 우회고 뭐고 씨도 안 먹힐 곳이라서 별수없이 교두보를 붙잡고 늘어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걸 스몰렌스크 전투 동안에 확보해둔 게 제2기갑집단군이었는데, 이야기했다시피 얘들이 단체로 남쪽으로 차출되는 통에 제4군이 이 일대의 방어를 맡게 됩니다.

옐냐를 노리고 들어오는 소련군도 사실 그닥 상황이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패잔병이 아니라 새로 편성된 부대였습니다만 일단 훈련이 덜 되어 있었고, 전차 같은 건 찾아보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것치고 꿈이 제법 크기는 했죠. 옐냐를 확보하고 남쪽으로 내친김에 내달려서 점령당한 로슬라블까지 탈환하는 게 목표였으니까요. 그래도 상황은 확실하게 소련군에게 웃어 주는 상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옐냐 교두보 남쪽이 죄다 세로 일직선의 강이었고, 그래서 옐냐가 튀어나온 모양이었으며, 그 남쪽의 돌출부를 밀어붙여야 할 부대는 죄다 키예프 쪽으로 차출되고 한 터라 여유가 없었거든요. 마치 뾰루지가 난 것처럼 톡 튀어나온 모양이라 다방면에서 공격당하기 딱 좋았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이게 현실화되면서, 이번에는 외려 독일군이 죽기 싫으면 빠져나와야 하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된 거죠.

여기에 동원된 소련군 사단이, 그러니까, 제102전차사단(제12전차사단의 오타가 아닙니다), 제303소총병사단(역시 제33소총병사단의 오타가 아닙니다), 제107소총병사단, 제100소총병사단, 제106기계화소총병사단, 제19소총병사단, 제309소총병사단, 제103차량화소총병사단, 그리고 제120소총병사단이었습니다. 꽤나 많은 병력이 투입된 셈이죠. 전차사단 하나, 소총병사단(=보병사단) 5개, 차량화소총병사단 하나, 기계화소총병사단 하나니까 총 사단만 8개. 군단도 아니고 거의 야전군 하나가 반격작전에 통째로 투입된 셈입니다. 그렇게 박살이 나고도 이 정도 되는 병력을 후방에서 동원할 능력이 된다는 게 충격과 공포죠. 애초에 이들의 소속 전선군 이름이 "예비 전선군"이었으니...

뭐 이런 판이었으니 철수 안 하고 배깁니까? 그래서 별수없이 히틀러의 허가를 받아(이게 또 기막힌 사실입니다 이렇게 쿨하게 해주면서 정작 대전 후반기엔....)돌출부에서 빠져나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고, 9월 6일에는 옐냐가 소련군에게 떨어집니다. 로스토프만큼 큰 도시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점령당한 소련군의 지역이 탈환된 몇 안되는 사례 중 하나였지요... 어차피 얼마 못 가서 곧 뺏기기는 합니다만.

하여간 이 교두보 탈환은 소련군에게 있어서는 몇 안되는 낭보요 그것도 승전보였던지라 대단히 의미가 컸습니다. 게다가 옐냐가 그냥 교두보 정도가 아니라 모스크바로 통하는 교두보였던 만큼 스탈린의 기쁨도 컸겠죠. 괜히 여기에 참여한 사단들이 "근위사단"(Guards Division, гвардейская дивизия)으로 개칭된 게 아닙니다. 제100소총병사단이 제1근위소총병사단이 되었죠. 제127소총병사단이 제2근위소총병사단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위키피디아에 써 있는데 대체 옐냐의 어디에서 전투를 했다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여하간 그리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이어 제107소총병사단이 제5근위소총병사단, 제120소총병사단이 제6근위소총병사단이 되었죠. 이게 당시 붉은 군대, 즉 소련군의 근위사단의 유래가 됩니다.

지금까지의 전반적인 상황 정리

갑자기 왠 요약이냐구요?
이 글을 처음부터 보신 분들은 눈치채실지도 모르지만 1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엄청나게 전장이 난잡하다는 것이죠. 분명히 각종 전장 지도는 날짜별로 잘 나와 있기는 한데, 이걸 뭐 어떻게 정리하라는 건지 감이 안 잡힐 정도로 여저기서 전선이 밀고 밀리고를 반복하다 보니 시작부터 끝까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어디서 풀어나가야 할지 상당히 골치가 아팠죠. 그래서 정리를 한 차례 하고 지나가는 겁니다.

이럴 때는 날짜를 딱 하나 잡고, 전체 전황을 살펴보는 쪽이 정리하기 빠릅니다. 일단 9월 19일, 그러니까 키예프가 독일군의 손에 떨어진 시점을 기점으로 이야기해 봅시다. 사실 이렇게 되면 몇 가지 건너뛰게 되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그 이야기들도 간단하게 곁들여가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이미 언급했다시피 제2기갑집단군은 키예프 포위전에 참가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한창 키예프에서 탈출하려는 전력을 소탕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추후에 다시 연재하겠지만 남부 집단군의 주력부대 역시 말할 것도 없이 키예프 포위전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오데사에서는 한창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만, 키예프 포위 이전에 제1기갑집단군이 드네프르 드라이브를 고속으로 걸어버린 덕분에 드네프르 강 서안은 죄다 남부 집단군이 접수하고 있었습니다.

스몰렌스크는 독일이 접수하고 있었고, 이들의 방어는 제2기갑집단군이 아닌 제4군이 대신했다는 것 역시 앞에서 밝혔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방어였지 공격이 아니었고, 공격할 상황도 못 되었던지라 일단 스몰렌스크 - 키예프 일대에서 전선이 크게 움직이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여기라고 전투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고... 스몰렌스크가 독일군 손에 떨어진 게 8월 7일인데 스몰렌스크 방면에서 반격작전이 없었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죠. 그게 언급이 안 되는 이유는 손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반격작전이 철저하게 실패했다는 것이죠. 이렇게 말입니다...

8월 11일이 되자, 스몰렌스크 외곽으로 쫓겨난 소련군은 도시를 탈환하기 위해 서부 집단군이 단체로 스몰렌스크를 공격, 포위 섬멸하기 위해 일련의 가열찬 공세를 가합니다. 날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조금 된 이야기죠? 이걸 언급하지 않으면 다음 이야기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안 넣을 수 없겠더군요. 

거는 그렇고, 스몰렌스크 위쪽의 화살표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공교롭게도 바로 제9군의 공세가 그 때 개시된 겁니다. 마치 회전문을 돌리듯이 말이죠.


그리고 한 달이 조금 못 된 9월 9일... 스몰렌스크 동남쪽의 전선이 약간 밀려나긴 했습니다. 거기가 옐냐니까요. 헌데 스몰렌스크와 그 북쪽의 전선의 변화는 그렇게 크지 않은데, 제9군에 의해서 개시된 진격으로 인해 소련군의 우익이 엄청나게 뒤쪽으로 확 밀려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련의 아주 오래 된 도시 중 하나인 벨리키예 루키(Velikiye Luki, Великие Луки)가 바로 이 때(8월 25일)독일군 손에 떨어집니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아예 거의 100 km 가량을 더 밀려나야 했죠. 이 시점에서의 전선은 이 정도로 형성됩니다.

한편, 북부 집단군은 이 시기에 거의 레닌그라드에 다다랐었고, 9월 8일이 되자 레닌그라드가 포위되었습니다. 8월 30일에 이미 레닌그라드로 통하는 마지막 철로가 독일군에게 끊겨버린 상황이었죠. 

헌데... 옐냐를 생각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무리 라도가 호수가 지형상의 이점을 공격자에게 가져다주고 있다고 해도 돌출부가 있는 것 자체가 독일군에게 찜찜한 건 확실한 상황이었죠. 그래서 레닌그라드를 포위하면서 그 남쪽으로 소련군을 좀 밀어내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북부 집단군이 레닌그라드 남쪽의 전선을 밀어내야 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헌데 레닌그라드가 뭐 어디 보통 대도시입니까? 게다가 북부 집단군 자체가 이전 글에서 이야기했다시피 가장 '약체'였고, 바로 이 때문에 제3기갑집단군의 일부가 북부 집단군에 차출됩니다.

 흔히들 중부 집단군의 차출 하면 제2기갑집단군만 생각하게 마련인데, 북부 집단군의 케이스에서도 보듯이 다른 사례도 있었다는 겁니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는 제가 지금까지 아주 귀에, 아니 눈인가요? 여하간 못이 박히도록 설명해 드린 바 있으니 자세한 설명은 패스하겠습니다. 답만 말씀드리면 바르바로사 작전상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이 지도입니다. 데미안스크(Demyansk, Демянск)를 점령하기 위해 제3기갑집단군의 일부가 북부 집단군으로 차출된 겁니다. 이 때가 9월 6일입니다. 현재도 인구 5천 명(5만 명이 아닙니다)에 불과한 작은 도시인 데미안스크 점령은 꽤나 성공적이었습니다마는...

9월 16일. 보시다시피 역시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반격이 개시됩니다. 남은 게 별로 없던 북서 전선군에 의해서 말이죠. 영웅적이기는 했습니다만 이들의 전력은 계속해서 떨어진 상태였고, 그러다 보니 반격이 성공으로 돌아가기는 좀 어려웠습니다. 이건 열흘 후의 지도를 보면 좀더 명확해집니다.

열흘 후의 지도입니다. 위의 지도와 비교해볼 때 전선이 별 차이가 없습니다. 양군 다 공세로 나서기는 좀 어려운 측면이 있었죠. 서두에서 총통 지령 떨어진 거 이야기했습니다만, 주공은 러시아의 서부 전선군을 향해 집중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전선이 여기에서 고착화됩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없는 반격 작전과는 달리 이 곳의 반격은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습니다. 독일군의 발목을 여기서 잡아버리는 데 성공한 것이죠.

지도를 퍼 오려고 했는데 뒤에서 이야기할 중요 지점의 상당수가 조그만 마을들이라, 지도 앱 등으로 직접 검색해 가면서 보시는 편을 추천하고 싶네요. 지도 없이는 한눈에 들어오기는 어려운 이야기이니 말입니다. 일단 되는 대로 대충 이 일대의 지도를 퍼오자면 이렇습니다.

(출저-Openstreetmap)
검은색 선은 철도를 의미합니다. 지도 최남단의 빨간색 포인트가 데미안스크입니다. 그 동쪽의 갈색 큰 네모가 볼로고예(Bologoye, Бологое)입니다. 그 서북쪽으로 있는 파란 네모가 오쿨로프카(Okulovka, Оку́ловка)입니다. 그 북쪽의 녹색 네모가 네볼치(Nebolchi, Неболчи)입니다. 네볼치 서쪽의 보라색 네모는 부도고쉬(Budogoshch, Будогощь)입니다. 그 동북쪽의 짙은 파란색 네모는 티흐빈(Tikhvin, Ти́хвин)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서쪽의 주황색은 볼호프(Volkhov, Волхов)입니다.

본론으로 돌아와... 이게 왜 중요하냐면, 만약 여기에서 더 밀려버리게 될 경우 가뜩이나 북쪽의 노브고로드(Novgorod, Новгород, 모스크바에서 시베리아 방면에 있는 대도시인 니즈니노브고로드(Nizhny Novgorod)와 구별하기 위해 벨리키 노브고로드(Veliky Novgorod, Великий Новгород)라 하기도 합니다)가 점령당한 상태인 소련군은 볼로고예까지 쭉쭉 밀렸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죠. 

설령 볼로고예가 손에 떨어지지 않더라도 독일군 입장에서는 그 근방에 전선을 유지하면서 북쪽의 전선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볼로고예가 하필이면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잇는 중요 철도지점이었던 것이죠.

좀더 설명드리자면, 사실 이미 8월 말에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를 잇는 직통철도의 상당 부분은 독일군 손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볼로고예에서 서북쪽으로 70 km 떨어진 오쿨로프카에서 북쪽의 네볼치로 빠지는 우회철로가 아직 점령되지 않은 채로 있었고, 이 우회철로가 소련군의 최전방에서 물자와 병력 수송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여기서 네볼치에서 북쪽으로 부도고쉬를 거쳐 티흐빈까지 이어지는 철도가 또 있는데, 이 역시 최전방의 철도였습니다. 독일군에 의해 1941년에 일시적으로 부도고쉬가 점령당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만 한 달간의 전투 끝에 부도고쉬를 탈환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탈환하자마자 소련군이 깔기 시작한 것은 바로 레닌그라드로 물자를 어떻게든 수송할 생명의 길이었으니, 이들 마을이 날아갔다면 레닌그라드의 운명은 장담하기 힘든 것이었을 터였다는 말입니다.

좀 더 간단히 설명드리자면 도미노 생각하시면 됩니다. 툭 치면 쪼르르륵 밀려나는 그거 말이죠. 

저 데미얀스크의 전선이 뒤로 더 밀려나면 볼로고예의 안위가 위협받게 되며, 이 경우 볼로고예에서 서북쪽으로 가는 철로가 차단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거의 99%라 봐도 되겠네요. 그렇게 되면 오쿨로프카와 네볼치는 독일군의 손에 떨어지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며, 이 경우 병력과 물자를 최전방에 제대로 수송하기 어려워지는 소련군은 북쪽에서 연쇄적으로 더 뒤로 밀려날 가능성이 매우 커집니다. 그렇게 되면 라도가 호수에 바짝 붙어있는 볼호프와 티흐빈이 동시에 위험해지며, 그렇게 되면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생명선을 깔기 매우 힘들어지고, 그렇다면 그 결과는... 레닌그라드의 전멸이죠.

물론 가정의 영역입니다만, 전선이 여기서 고착화되지 않았을 경우 벌어질 최악의 사태를 상정해보았을 때 전선의 고착화는 분명히 나름대로의 큰 의미를 갖는다 하겠습니다.

여하튼간에 이 정도로 전 전선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짚어봤습니다.

바로 태풍 작전을 말씀드리려 했으나 이미지수가.... 엄청난 관계로;;태풍작전은 다음에 언급하는걸로 하고 이만 글을 줄여야할 것 같습니다. 이번엔 저번처럼 오래걸리지 않을겁니다.. 내일 바로 작성하도록 하죠.. 그럼 모두 좋은하루 보내시길....

p.s.아 참 지난 글 링크를 이전처럼 하면 추후 감당이 안될 것 같아 조만간 링크만 있는 글을 1개 작성하도록하겠습니다.(혹시나 제 글을 처음 보는데 어 재밌네? 한번 정독해볼까 하시는 고마운 은인분들은 제 닉넴으로 검색하셔서 보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