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대로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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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겁과도 같았고 찰나와도 같았던 시간이 지나가고,

검은 여성은 양 손의 단도를 대충 털어, 허리 뒤에 X자로 포개진 검집에 돌려 넣었다.

그제서야 멍하니 여성을 바라보던 애나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자,

애나와 넬을 포위중이던 오크들 중 서 있는 오크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저 멀리 줄행랑을 치고 있는, 후속 부대인 걸로 보이는 오크 몇마리가 보였다.

검은 여성이 품에서 손가락 정도 길이의 짧은 피리를 꺼냈고, 입에 대었다.

삐이이──익!!

높은 음이 울려퍼지며, 사방에서 검은 무언가가 소리조차 없이 나타났다.

그 정체는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들로, 약 10명 남짓 되었다. 여성이 말했다.


「다시 한 번 내려올지 모르니, 다 없애버려」


하며 도망치는 오크들을 손짓하자, 그 검은 사람들은 홀연히 사라진 것 같이 보였고

멀리서 도망치던 오크들을 순식간에 포위하더니 한 손을 뻗으며, 영창을 시작했다.


「염옥의 사령, 태고의 마신 벨제뷔트여. 지금 여기에 당신의 영토를 조금 빌리나니. 네이팜 랜드Napalm Land」


순식간에 오크들이 서 있던 바닥이 시뻘겋게 물들며,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끄워어어어!!」

「크어어───억!」


저마다의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오크들은 작열하는 용암에 말려들어 맹렬히 타올랐고, 순식간에 재로 변해버렸다.

애나가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흐...흑마법사?!」

「틀려, 마녀들이다」


검은 여성이 정정하며 고개를 돌렸다. 애나가 본 적 없는 이국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예쁘다는 것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엄청난 미인이었다.

순간, 애나는 여성의 외모에 한 번 더 멍해질 뻔 한 마음을 다잡고 인사했다.


「아, 구...구해줘서 고맙습니다」

「애초에 널 찾으러 온 거였으니 그다지 고마워하진 않아도 돼. 난 로즈마리 폰 헤인스. 편하게 마리라고 불러」

「...」

「애너벨 아인스워드 3세, 맞지?」


애나가 풀 네임을 불리자 눈을 크게 떴다.


「네, 맞아요...어떻게? 아니, 그것보다...」


애나가 뒤의 넬을 바라보고는 마리의 코트를 부여잡고, 다급하게 말했다.


「언니가, 넬 언니가 다쳤어요! 치료를 해 주실 수 있나요?」


마리가 넬에게 다가가서 환부를 살펴보고는,


「잠시, 실례할께. 좀 아플 거야」


라는 말과 함께 손가락 두 개를 넬의 눈 아래에 찔러넣었다.

애나가 순간 비명을 지를 뻔 했으나, 넬이 입술을 깨물며 아픔을 참는 모습에 한번 더 놀라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마리가 재빠른 손놀림으로 자신의 단도를 꺼내 무언가를 자르고, 손가락을 뽑았다.

그녀의 손 위에는, 푸르죽죽하게 썩어가는 안구가 하나 들려 있었다.

그리고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품에서 연고 형태의 약을 꺼내, 한번 더 손가락을 넣어 눈 안쪽에 골고루 발랐다.

또한 젖은 수건을 가져오게 해 피를 정성스레 닦고, 얼굴 겉에도 연고를 펴 발랐다.


「일단 이걸로 안심인가...」

「뭐 하는 짓이예요?! 넬 언니, 괜찮아요?」


넬이 아픔을 참으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고, 마리가 부연설명을 했다.


「오크들의 무기에는 많은 사람이나 다른 몬스터의 피가 묻어 있지. 그 자체가 무기에 말라붙어서 독소를 생성한다」

「...」


애나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이 독소는 그 무기에 베인 순간부터 상처에 감염되어, 환부를 빠르게 부식시키지. 이 안구처럼 말이야」


하며 마리가 손에 들린, 넬의 눈이었던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이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썩어 문드러진 상태였다.


「안구를 절제한 건 미안하지만, 그렇지 않았으면 시신경을 타고 독소가 뇌까지 들어가 버렸을 거야」

「...」

「마지막에 바른 건, 힐링 포션을 농축해서 굳힌 연고야. 순식간에 상처가 아물지」

「...감, 사합니다」


넬이 힘겹게 대답했고, 마리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당치도 않아. 우리가 찾던 사람을 구해준 은인인걸. 내가 감사해야지」


그때서야 애나가 뭔가의 위화감을 느끼고 마리에게 물었다.


「잠시만요. 마리 님, 아까부터 말씀하셨던 절 찾으셨다는 건 둘째치고, 풀 네임이 어떻게 되신다고 하셨었죠?」

「나? 로즈마리 폰 헤인스. 왜?」


애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헤인스. 우리 왕국 이름이다.

그렇다는 건...

애나가 즉시 부복하며 말했다.


「애너벨 아인스워드 3세가 공주님을 뵙습니다!」


현재의 왕, 지그 버나드 폰 헤인스에게는 두 아들과 배다른 딸 하나가 있었다.

그중 딸은 동쪽 먼 땅에서 흘러들어온, 한(Han)씨 왕조의 피가 섞여 있다고 했다.

동양적인 외모, 성씨에 들어가는 왕국의 이름. 틀림없는 공주였다.

하지만 마리는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그런 식으로 불리는 거, 싫어해. 어서 일어나. 애나라고 부르면 될까?」

「아, 네...공주님」

「마리 언니! 면 돼. 알았지?」


나름 무섭게, 눈을 치켜뜨고 손가락 하나를 세우며 마리가 말했지만

애나의 눈에는 예쁘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네, 마리 언니」

「좋아! ...잠깐. 너희, 노예로 끌려왔어?」


마리가 애나와 넬의 옷차림을 보며 말했다.

그들은 노예였기에, 옷가지라고는 다 해진 양모 원피스만을 입고 있었다.


「...네? 네」

「여자는, 너희 둘 뿐이고?」


끄덕.

애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흐음~ 하며 뭔가를 생각하던 마리가 갑자기 원피스의 치마를 들추었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이쪽은 괜찮고...」


라는 독백과 함께 넬에게 다가가, 똑같이 옷을 들추어 보고는, 표정이 굳었다.


「...어떤 놈이야?」


다짜고짜 넬에게 묻는다.


「...」


넬은 대답하지 못했고, 마리가 다시한번 넬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물었다.


「괜찮으니까 말 해 봐. 너에겐 아무런 해를 가하지 못할 거야」

「...저희를 산, 여기 채석장 주인이예요...」


애나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몰라 눈만 꿈뻑이고 있는데, 마리가 이를 으득 하고 갈며 외쳤다.


「이 채석장의 주인이라는 놈, 당장 잡아서 내 앞에 데려와!」


외침과 함께, 사라진 줄 알았던 검은 로브의 사람들이 다시 나타났다가 그대로 사라졌다.

그리고 채 5분도 되지 않아,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 둘이 채석장 주인을 데리고 나타났다.

채석장 주인은 마리 앞에 인도되어, 마주보고 선 상태가 되었다.


「당신이, 이 채석장의 주인인가」

「네, 그렇습니다요, 나리.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 아이를 저렇게 만든것도 당신이고?」


하며 넬을 가리키자, 채석장 주인은 상처에 대한 걸 말하는 줄 알고 아니라며 부정했다.


「아뇨, 아닙니다요. 저런 상처는 제가 낼 수가 없습니다요...」


마리는 이를 으드득 하고 갈며 낮은 어조로 재차 말했다.


「얼굴의 상처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건,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소인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요, 나리」

「마음의 상처를, 말하고 있는 거다」

「...!」


채석장 주인의 말이 없어졌다. 마리가 말했다.


「나이는 지긋하게 먹은 양반이,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아이를 상대로...」

「...자,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의 그 한 번의 잘못으로, 저 아이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어」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더 이상 듣고 싶지도 않군. 데리고 가라.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잘라버려」


채석장 주인을 끌고 온 두 사람이 그대로 그를 데리고 사라졌다.

곧이어,


「끄아아아아아악!!!!」


채석장 주인의 비명이 블랙 마운틴을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