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대화 1

 

머나먼 길을 여행해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한 청년의 등에는 현실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었다. 사람을 보내 찾아온 손님을 마중한 뱅고몬트 보르이긴은 따듯한 화톳불을 중심에 피운 커다란 천막 안으로 그를 찾아온 성직자를 초청했다.

 

“여신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여행자여, 그리고 여신의 신실한 사역자여.”

 

“감사합니다. 먼 곳인지 알고 있었지만, 출발할 때 각오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먼 곳이군요.”

 

천막 안에 의자는 없었으나 메르겐 마스터는 엑소시스트 마스터에게 가장 좋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자리를 권했다. 화톳불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에게 이 지방 특유의 차가 제공되었다. 메르겐 마스터는 다른 사람들을 모두 물러가게 지시하였고, 30명이 들어가도 남을 큰 천막에는 단 두 사람만이 남았다. 그럼에도 화톳불만으로 내부는 충분히 따듯했다. 온도로나 분위기로나 따듯한 가운데 메르겐 마스터가 먼저 대화를 시작했다.

 

“우리 부족의 이 머나먼 땅에 나를 일부러 찾아온 왕국의 손님은 지금까지 내 마스터 임명장을 전달하러 왔던 왕국의 사절밖에 없었소. 본인은 귀한 마스터 성직자께서 무슨 일로 먼 걸음을 자처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시도우 메린블록이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알기로 이 땅을 가장 처음으로 방문한 여행자는 리디아 샤펜이었습니다. 별의 탑의 건설자이자 샤펜스타의 창설자 말입니다.”

 

“왕국에서나 우리 부족 사회에서나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를 꺼내시는 까닭은… 아마도 리디아 샤펜과 우리 조상 사이의 맹약의 내용을 알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신임 엑소시스트 마스터를 처음 뵈었고, 따라서 잘 모르기는 합니다만, 이제까지 그걸 궁금해오던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나 소위 학문적 관심을 지녔다는 자들과는 다른 이유를 지니고 그 질문을 하시려는 겁니까?”

 

“제 질문이 얼마나 정당성을 지니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누대의 메르겐 마스터의 역사에서 그 맹약의 내용을 궁금해하는 온갖 사람이 있었을 테고, 수백 년을 누설하지 않은 내용을 이제 와서 제게는 알려주리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엑소시스트 마스터로서 저는 반드시 확인하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엑소시스트 마스터의 지위를 강조하시는 것을 보니 그 내용의 일부를 이미 추측하고 계신 모양입니다?”

 

“추측이라기 보다는 확인을 받고 싶습니다. 맹약에 럼펠스틸스킨에 관련된 내용이 있습니까?”

 

메르겐 마스터는 찻잔을 비우고 다시 화톳불에 걸려있던 주전자를 내려 자신의 것을 채우고 시도우의 것도 다시 채웠다. 그러고도 오랜 시간을 고민하다가 따라놓고 마시지도 않은 찻잔을 쳐다만 보다가 시선을 들지 않은 채로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럼펠스틸스킨에 관한 많은 전설들을 믿지 않습니다. 또한 그걸 믿는 사람들은 그가 그저 재미있는 마족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확실히 그는 우리가 알아온 그리고 지금 시대에 상대하고 있는 마족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가 잔인한 마족사회에서 그렇게 자기 멋대로 살 수 있었는지 그 이치를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그 이치 즉, 그 이유는 그가 성격이 그러할 뿐 실은 길티네의 휘하의 여섯 마신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던 자유였고, 취미였습니다.” 시도우 메린블록이 메르겐 마스터의 말에 단호한 어조로 답변했다.

 

“심지어 성직자 마스터 가운데도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뭅니다. 아마도 메린블록 님도 엑소시스트 마스터가 아니었다면 몰랐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사실을 아는 유일한 궁사 역시 보르이긴 님뿐이리라 생각합니다만..”

 

“그래서 럼펠스틸스킨에 관련된 내용이 리디아 샤펜 님과 우리 메르겐 조상 사이에 있었다 가정한다면, 엑소시스트 마스터께선 뭐가 더 궁금하시오?”

 

“럼펠스틸스킨이 달에서 돌아오면 무슨 일이 생깁니까? 리디아 샤펜 님이 갚아야 할 빚은 무엇입니까?”

 

메르겐 마스터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것을 말해줄 수 없습니다. 다만 럼펠스틸스킨과의 내기에 지신 리디아 샤펜 님께서는 그가 돌아올 일을 대비하셨고, 그 대비와 책임의 일부가 메르겐 마스터들에게 대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말씀 정도는 드릴 수 있습니다.”

 

“별의 탑에서는 누가 이 일을 알고 있습니까?”

 

“가이캉 메켄도 모를 겁니다. 별의 탑은 미래의 구원자가 나타날 때까지 계시를 숨기고 지켜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리디아 샤펜 님은 한 곳에 두 가지 중대한 임무를 담아놓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별의 탑의 비밀한 장소에 숨겨진 문서가 있을 가능성이나 역대 샤펜스타의 단장에게 전해지는 비밀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먼 길을 오셨는데 이 이상 자세한 답변을 드릴 수 없소 죄송하오이다.”

 

“아닙니다. 배움의 길을 걷는 성직자의 본분은 원래 순례의 길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보르이긴 님을 직접 만난 것만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얼마든지 우리 부족에 머물다 가셔도 좋습니다. 마스터.”

 

“오래 머물지는 않겠습니다. 여독이 풀리면 바로 또 찾아 뵐 분이 계십니다.”

 

“알겠습니다.”

 

화톳불 사이로 짙어지는 밤의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두 마스터의 대화는 그렇게 끝나갔다.

 

 

 

어떤 대화 2

 

대삼림지대의 어떤 인적도 없을 것 같은 길조차도 없는 곳에도 나무 사이의 공터는 있었다. 숲에 사는 동물 말고는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장소였지만,놀랍게도 두 남자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떻게 나를 찾아내셨소? 마스터 메린블록.”

 

“그건 별로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라클 마스터께 물어보았으니까요. 힘든 것은 다른 곳으로 떠나시기 전에 여기까지 오는 일이었습니다.”

 

“새로 엑소시스트 마스터가 되시자마자 수도를 비우시고 사방으로 돌아다닌다는 말은 들었소. 심지어 메르겐 마스터에게도 다녀오셨다고 들었는데 이제 나를 방문하시다니 무엇이 신임 엑소시스트 마스터에게 그런 떠돌이 생활을 하도록 만드는지 궁금하오.”

 

“유랑이라면 마스터 요가일라 앞에서 누가 감히 나설 수 있겠습니까? 저야 불민하여 고민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해 헤매고 다니고 있을 뿐입니다.”

 

“아마도 그 고민은 신학이나 신앙과 관련된 것일 텐데.. 비록 같은 마스터라 하지만, 학식과 실력을 동시에 갖춘 엑소시스트 마스터께 도움을 드릴 정도의 깊이가 내게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살아오시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수백 년의 세월을 지니셨습니다.”

 

“그런 것이라면 딥디르비 마스터 테슬라께서는 나 같은 방랑자 따위는 비교할 수도 없는 더 오랜 경험과 깊은 지혜와 신앙심을 지니셨으니 그분을 찾아가는 일이 낫지 않겠소?”

 

“그러나 프리미어 에미넌트에 관한 일이라면 다르지 않겠습니까?”

파이드 파이퍼 마스터는 잠시 침묵하며 메린블록을 한참 지켜보다다 이렇게 말했다.

 

“프리미어 에미넌트는 이미 죽었소. 살아서 그를 본 유일한 사람도 역시 테슬라 님밖에 없을 테고, 윈터스푼 님도 그보다 후시대의 사람이니 내가 그 자가 활동하던 시기를 경험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말씀을 가로막아 죄송하지만, 저는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이유는 그가 암지나스가 아니라 마족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생각이 옳다고 한다면 어쩔 생각이오?”

 

“유데이안 숲으로 가서 어떤 큐폴을 찾아 뵐 생각입니다.”

 

“그 말은 의외로군요. 엑소시스트로서 당장 에미넌트를 처치하러 간다면 모를까..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군..”

 

“대지의 요새는 루클리스의 반란 이래 왕국의 명령으로 금지지역입니다. 마스터의 자격이 있다고 하더라도 진입할 명분을 만들 수 없으니 왕국 법령을 정면으로 거부하지 않고는 어차피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확실한 증거도 없이 심증과 추측으로는 시도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지금 제 처지에서는 다른 정보들을 마저 확인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파이드 파이퍼 마스터가 진지한 표정으로 메린블록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보르이긴에게 간 건 럼펠스틸스킨 때문일 테고, 에미넌트와 유데이안 숲의 큐폴이라.. 엑소시스트 마스터께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마족에 관련된 정보를 모두 점검하고 있구려.. 그리고 이들 세 가지는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정보고.. 흩어져 있을 때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조각이라도 천재라면 단 한 조각에서도 필요한 영감을 얻어내는 법이지. 아마도 이제 마스터께서는 어떤 큰 그림을 완성하기 직전인 것으로 보입니다.”

 

“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번개처럼 어떤 영감이 왔고, 그에 따라 엑소시스트에게 전해지는 모든 문헌과 왕립도서관과 세이지들의 모든 기록, 심지어 요나스 가문의 내부기록까지 사정사정해서 샅샅이 찾아내어 과연 제 생각이 맞는지 확인하고 있습니다.”

 

“내가 에미넌트를 만났고, 그가 마군주라는 사실을 알아낸 일까지 짐작해낸 것을 보니 새삼 신임 엑소시스트 마스터께서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을 것 같소. 그리고 에미넌트의 일이 이 그림의 일부에 불과하다면 지금 그대가 쫓고 있는 그림은 얼마나 큰 것이오?”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메린블록은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마군주였습니까? 에미넌트가?”

 

“이런, 거기까지는 모르셨나 보오.”

 

“네, 몰랐습니다. 그랬군요. 그렇다면 루클리스는 확실히 누명을 쓴 것이군요. 게다가 그 사건에는 분명히 더 파헤쳐야 할 중대한 이유가 있을 테고 말입니다. 거기까지 손댈 처지가 아니라는 점이 안타깝군요.”

 

“아직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소. 지금 마스터께서 쫓고 있는 별은 무엇이오?”

 

“흐음.. 어쩌면 이것은 성직자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될 불경한 언사가 될 수 있으나 저는…”

 

“저는?”

 

“저는 마족과 모든 여신들 사이에 일종의 협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칭 신마협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세운 가설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역사상의 신학적인 많은 난제가 한꺼번에 풀립니다. 작게는 엑소시스트들이 경험한 빙의 퇴치는 물론이고, 럼펠스틸스킨의 취미가 언제 어떻게는 몰라도 왜 시작되었는지 단순히 그것이 그의 성격 탓만은 아니었다는 그리고 록소나의 시민들에게 닥쳤던 석화의 저주와 또…”

 

“내게는 겨우 에미넌트가 마족임을 확인 받았는데 도대체 얼마나 많은 단편적인 사실을 하나하나 추적해서 검증했길래 그런 엄청난 일들의 이면을 모두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이오?”

 

“모든 것은 유데이안 숲에서 큐폴님을 만나야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제가 알아낸 모든 것을 알려드리고 묻는다면 이 전체적인 진상을 듣거나 최소한 부인은 아니 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마저도 마스터 메린블록이라면 레냐 님도 움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오.”

 

“역시 알고 계시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과연 몇몇 문헌을 통해 희미하게 파악한 자료와 추측대로 열쇠가 돼주실 큐폴 님이 거기 계셨고, 레냐 라는 이름을 지니셨군요.”

 

“내 입에서 그 이름이 실수로 나온 것은 비밀입니다. 마스터 메린블록.”

 

“네, 분명히 ‘실수’이셨습니다. 어쨌거나 감사합니다.”

 

“그런데 추측이 사실로 확인되면 그 뒤는 어쩔 생각이오?”

 

“알고 있는 바를 모두 말하지 않는 것이 성사의 책임을 진 성직자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질럿 교단 같은 성미 급한 사람도 있는 곳이 성직자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진리를 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세상에 비추는 일은 또 다른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문제는 천천히 고려할 생각입니다.”

 

파이드 파이퍼 마스터는 기분 좋게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내가 나이만 먹은 것이 아니라 사람 보는 눈은 조금 있는 편이지.”

메린블록이 그 말에 빙긋 마주 웃어주는 가운데 새로운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