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DC 24시 1부: [GDC 24시] 퀘스트: 폭풍우를 뚫고 모스콘 센터에 도달하라

GDC 취재를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지도 나흘이 지났습니다.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생활 리듬 자체가 GDC에 맞춰져 버렸기에 실제 이상으로 오랜 기간이 지나간 느낌입니다. 아침 식사를 거르면 배고픔 때문에 집중을 못한다는 교훈은 첫 날에 이미 얻었죠. 밥 먹으면 졸리지 않냐고요? 굳이 밥을 먹지 않아도 졸린건 마찬가지더라구요.

셋이 한 끼를 때우면 60달러가 우습게 날아가는 물가이지만, 일단 살기 위해 먹을수밖에 없었습니다. "든든한 아침은 힘을 만들고, 난 힘찬 기분이 든다!"...라곤 하지만 모스콘 센터에서 파는 샌드위치는 일단 비싸기도 비쌀뿐더러(샌드위치 하나에 9달러, 만원이 넘는다!) 그리 훌륭한 맛도 아닙니다. 종이 씹는 맛의 거친 빵 사이에 소금 덩어리와 채소를 대충 박아둔 느낌이랄까요? 그냥 미국에 가면 흔히 먹는 간단 끼니용 샌드위치의 스탠다드 같은 모습입니다. 우리 나라로 치면 김밥 정도인데, 많이 비싸요.

▲ 거들떠도 안 보던 풀이 땡기기 시작한다

이번 GDC에서 가장 놀란 점은 'VR'이라는 코드가 보여준 '파급력'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국내에 있을때는 말처럼 잘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VR이 대세다!", "VR을 파야 한다!". 말이야 많았지만, 몸으로 느껴지진 않았다고 해야 하나? 나름 1선에서 VR을 체험해 왔고, 국내 한정으로 굉장히 다양한 체험을 해 보았다고 생각했으나, 다소 경직된 시장 분위기는 어쩔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VRDC'라는 이름으로 개설된 초반 2일간은 진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작년에도 인기 강연의 경우 한참 줄을 서야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맞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VRDC의 인기 강연은 그 수준이 달랐습니다. 홀을 돌고 돌아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을 겨우 찾아 "여기가 그 줄 맞나요?"라고 물어봐야 할 정도였죠. 물론 그러고도 못 들어가는 경우가 태반이었지만.

▲ 강연장에 들어가기라도 하려면 30분 전엔 가야 한다

결국 제대로 된 VRDC 강연을 들어갈라 치면 강연 시간 30분 전에는 도착해서 미리 가서 대기해야 안정적으로 입장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강연 간 간격이 20분이다 보니 결국 몇 개의 강연은 희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놀란건 다른 부분에서였죠. 적어도 샌프란시스코에서, VR은 더 이상 낯선 기술이 아니었거든요. 마치 도시 전체가 VR의 등장을 수용하고, 준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유니온 스퀘어 앞 길을 지나가다가 한 가죽 전문 매장에서 VR HMD를 쓰고 있는 마네킹을 봤습니다. 그리고 쇼윈도 앞으로 VR HMD 전용 가죽 스트랩 제품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죠. '아, 이미 이 사람들은 VR을 생활로 가져오고 있었구나.'

▲ 그냥 길거리 옷가게에도 VR이 녹아 있다

덕분에 기자들도 더 바빠졌습니다. 원래 GDC의 첫 두날은 비교적 한적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지곤 했는데, 올해는 정 반대였거든요. 사람 수가 미어터지다 보니 기사를 쓸 공간은 더욱 부족해졌고, 결국 자리를 잡지 못한 기자들은 그냥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작업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우리 뿐만이 아니라 비니를 쓴 백인 기자도, 하드코어한 아프로 머리의 흑인 기자도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키보드를 두드리느라 여념이 없었죠.

덕분인지, 세계 각국에서 온 기자들과 꽤 많은 대화를 나눌수 있었습니다. 대충 자리를 깔고 앉아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2-3미터 간격을 두고 앉아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죠. 그들도 가끔 주변을 둘러보고 피식거리던 걸 생각해보니 사람 생각하는게 다 거기서 거기인듯 싶네요.

▲ 바닥에 앉아있는 광경은 늘 보이는 풍경의 일각

유럽과 북미의 미디어가 가장 궁금해하는 것 중 하나가 '한국'에서 'VR'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가였습니다. 저는 가감없이 대답했고, 그러자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온 기자들 또한 자국과 유럽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죠. '대세'를 주제로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나니, 이젠 개인적인 질문들이 들어왔습니다. '페이커'는 만나 봤냐, 용산 e스포츠 스타디움이 진짜 그렇게 크냐... 다 큰 어른들이 해맑게 웃으며 서툰 영어로 대화하는 광경이 조금은 우스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스포츠 하니 '더스틴 벡'의 강연이 생각나네요. 4일차인 목요일, 라이엇 게임즈의 부사장인 '더스틴 벡'이 '리그오브레전드 e스포츠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제목으로 연단에 섰습니다. 사실 별로 특이한 일은 아니었죠. 라이엇 게임즈는 매년 e스포츠를 주제로 GDC에서 강연을 하곤 했고, e스포츠를 소재로 한 강연은 이번 GDC에서도 적잖이 보였거든요.

▲ 라이엇 게임즈 부사장 '더스틴 벡'

더스틴 벡은 강연에서 자신들이 어떻게 e스포츠에서 성공적인 사례를 만들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는데, 그가 준비한 ppt에는 유독 한국인의 모습과 한국의 모습이 담긴 장면이 많았습니다. e스포츠로는 세계에서 제일 잘 나가는 국가인만큼 이상할 일이 없음에도 영상과 사진을 보는 내내 가슴이 자꾸 울렸습니다. '내가 왜 이러나?'싶을 정도로 말이죠. 그리고 그 강연에서, 과거 스타디움에서 사진을 찍던 내 모습이 ppt에 있는 것을 보고 기절할 뻔 했습니다.

한편, 'GDC'라는 큰 행사를 맞이한 샌프란시스코 시 자체도 나름 분주해진 모습을 보였습니다. 곳곳에 놓인 커피숍의 'Current Event'란에는 'GDC'라는 세 글자가 당당히 박혀 있었고, 행사장인 '모스콘 센터' 근처의 식당들은 일상적인 대화가 아닌 '게임'을 소재로 한 대화로 가득찼습니다. 모스콘 센터에서 열리는 행사가 GDC만은 아닐 테니,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겠죠? 하지만 적어도 이 일주일만큼은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 전체가 '게임'이라는 코드와 함께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 이 도시에 흐르는 피가 잠시 '게임'이 된 것만 같았다

GDC가 열리는 모스콘 센터는 총 세 동의 건물로 이뤄져 있습니다. 대다수의 강연이 진행되는 '웨스트 홀', 지하에 엄청나게 큰 강연장들이 늘어선 '노스 홀', 그리고 기자실과 식당, 굿즈샵과 체험 부스들이 늘어선 '사우스 홀'로 이뤄져 있죠. 이중 '사우스 홀'과 '노스 홀'의 지하에는 'GDC EXPO'가 진행됩니다. GDC는 세계에서 가장 큰 컨퍼런스인 만큼 수많은 개발자들과 게임업계 종사자들이 이 자리에 모이죠. 비즈니스적인 부분이 빠질리가 없습니다.

전 '에픽'과 미팅이 예정되어 있어 다른 부스를 둘러볼 틈 없이 바로 에픽의 부스로 향했습니다. 작년에도 인터뷰를 진행했던 부사장 '제이 윌버'와 다시 악수를 나누고, 양껏 먹으라고 권하는 과일을 씹으며 천천히 부스 주변을 둘러봤습니다. 주 행사가 아닌 사이드로 열리는 행사임에도 지스타보다 더 크고, 활기차게 보였어요. 어쩔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은 들었네요.

▲ 에픽의 부사장 '제이 윌버', 작년부터 꾸준히 뵙고 있다

다음 강연을 위해 웨스트 홀로 걸어가는 와중, 스마트폰에 설치된 GDC 어플리케이션이 시끄럽게 울려댔습니다. 아이고 맙소사. 강연 시간은 10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참여 인원이 이미 300명을 넘어간다는 알림이었습니다. 빨리 들어가지 않으면 강연이고 뭐고 통째로 날리게 생겼어요.

가까스로 강연장에 들어와 맨 뒷자리에나마 앉아 마지막 기기 테스트를 하는 스탭들을 지켜봤습니다. 게임업계의 거장들, 어려운 강연, '게임'을 둘러싼 각종 코드와 흐름. 생각이 꼬리를 물고, 한국에서 열리는 컨퍼런스 행사들까지 생각이 났죠. NDC, KGC, IGC, 그리고 게릴라성으로 열리는 몇몇 행사들... 아쉬운 기분과 함께 다시 의욕이 생겼습니다. 한국에서도 이런 행사를 열려면 일단 나라도 열심히 해야 할 테니까.

노트북을 열고, 생각을 닫았습니다. 지금은 이 순간에 충실할 때고, 아직도 일정은 이틀이나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