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이맘때면 내려오는 부산. 하지만 작년이나 그 전만큼 두근거리는 감정은 없었던 것 같다. '라인업' 자체가 PC보다는 모바일로, 대형 신작보다는 이미 발표한 작품들 위주로 흘러갔기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나를 계속 기대하게 만든건 따로 있었다. '바이브 VR'. 밸브와 HTC, 엔비디아가 함께 만들어낸 HMD(Head Mounted Display)다. 지난 6월 진행한 E3 당시 현장을 방문했던 기자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기술 면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HMD가 바이브에요." 그 말을 들었을 때부터 언젠가는 바이브를 꼭 해보겠다고 생각했었다. 지스타2015는 그 소중한 기회였다.

지스타2015의 두번째 날. 아침 10시부터 빠르게 엔비디아의 부스로 향했다. '바이브'의 위력에 대해서는 왕왕 들어왔지만, 초대 오큘러스 코리아 지사장을 지낸 서동일 대표의 말처럼 VR은 직접 해보지 않고는 절대 알수 없다. 부스 한켠에 마련된 암실.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가 HMD를 착용했다. 그리고 10분 후, 나는 서동일 대표의 그 말을 다시 떠올리며 심각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 경험을 어떻게 글로 옮겨야 할까...?"



외관은 평범 - 착용감은 무난

일단 외관을 보았다. 특별하지 않은 무난한 HMD의 생김새. 소니의 PS VR보다는 오큘러스 VR을 좀 더 닮은 모습이다. 각종 선들이 연결되는 접합부는 메인 바디의 상단에 위치하고, 헤어밴드를 이용해 머리에 고정하는 방식인데, 이 때문에 오큘러스와 동일한 문제점이 발생한다. 한번 착용하고 나면 머리가 눌려서 엉망이 되어버린다. 마치 땀받이 없는 방탄모를 착용하고 난 후의 머리가 된다고 해야 할까? 공룡이 밟고 지나간 발자국을 보는 느낌이다.


다른 점이라면 기계 자체가 아닌 외부의 환경인데, 오큘러스 VR의 경우 모션 트래킹을 위해 '카메라'를 이용한다. 전방에 위치한 카메라가 사용자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잡아내 모션 트래킹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반면 바이브는 두 개의 장대형 센서를 전방과 후방에 배치해 두었다. 오큘러스 VR의 단점은 카메라를 이용하기 때문에 카메라의 시야각(FOV)를 벗어날 경우 트래킹이 불가능해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바이브는 이런 단점이 전혀 없다. 적어도 VR을 지원하는 영역 안에서는 완벽한 수준의 모션 트래킹이 가능하다.

반면 치명적인 단점도 존재한다. 앞서 말했듯 바이브 VR은 바디 상단에 케이블 연결을 위한 각종 포트가 마련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움직임 도중 선이 굉장히 거치적거린다. 발에 선이 걸리는건 물론이거니와, 가끔은 어깨에도 걸리곤 하는데, 실제 현실에 대한 시야를 잃는 VR의 특성 상 이는 단순히 불편함의 문제가 아닌, 안전의 문제로 이어질수 있는 문제다. 이 부분은 상용화 시점에 어떻게든 개선이 될 것으로 보인다.

▲ 상단부에 몰린 케이블 포트는 좀 신경쓰이는 부분

양 손에 쥐는 컨트롤러는 굉장히 뛰어난 성능을 보여주었다. 바이브의 전용 컨트롤러는 마치 성화 봉송대를 보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스팀 컨트롤러에서 볼 수 있는 원형 터치 패드와 후방의 트리거가 달려 있었다. 이 컨트롤러는 HMD를 착용한 시점에서도 보이며, 내 움직임에 완벽하게 대응한다. 때문에 게임을 하는 동안에도 전혀 불편함 없이 사용 가능하며, 엄지와 검지만을 사용해 조작의 편의성 역시 뛰어나다. 단점이라면 손을 어딘가에 거치하는 것이 아니기에 장시간 사용하면 좀 피곤할 것 같달까? 하지만 장시간 사용이 불편한 것은 비단 컨트롤러의 문제가 아닌, VR 자체의 한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높은 해상도, 가득 차는 시야

첫 시연은 바닷 속에 가라앉은 침몰선의 뱃머리에 서서 바닷속을 들여다보는 어플리케이션이었다. 사실 상호작용보다는 관람용 어플리케이션에 가깝기 때문에 컨트롤러를 쓸 필요는 없었지만, 지나가는 물고기를 툭툭 쳐 놀래키는건 나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멋진 사실은, VR을 착용할 때 미묘하게 현실을 자각시켜 몰입을 방해하는 '시야의 공백'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 공백은 스크린이 시야를 완벽하게 덮지 못하는 경우 발생하곤 하는데, 내 눈이 아닌, 눈 모양의 창문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줘 몰입도를 저해하곤 한다. 그러나 바이브는 시야를 완전히 가려 공백을 최소화함으로서 이 단점을 덮어냈다. 마치 눈 앞에 진짜 바다가 펼쳐진 것 처럼 말이다.

동시에 그래픽 처리 또한 깔끔하다. 물론 어플리케이션을 만드는 개발사에 따라 그래픽의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말하는 건 '해상도'와 '주사율'의 차이다. 사실 어떤 HMD라 해도 현재 수준에서 완벽한 그래픽 수준을 보여주진 못한다. 오큘러스의 '크레센트 베이'도, PS VR도 화면이 자글자글 일그러지는 격자 현상은 당연하게 보인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여러 방식의 소프트웨어적 처리가 동반되긴 하지만 결국 그 또한 미봉책일 뿐, 순수한 하드웨어의 성능을 따라가는 보완책은 존재할수 없다.

▲ 저 뱃머리에 서게 되는데 작은 물고기들은 툭툭 쳐서 쫓아낼수 있다

하지만 '바이브'는 지금껏 공개된 그 어떤 HMD보다도 높은 해상도를 자랑한다. 때문에 확실히 그간 체험해본 HMD와는 다른 차원의 깔끔함을 볼 수 있었다. 4K 해상도의 소형 디스플레이가 개발된 이상, 이 이상의 화면을 볼 수 있는 날도 머지않아 올테지만 말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사실 '바이브'가 다른 HMD와 큰 수준의 해상도 차이를 보여주진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눈에 매우 가깝게 스크린을 가져다 대는 HMD의 경우, 이 작은 차이도 굉장히 크게 느껴진다. 나 역시 그 차이를 이번 기회에 놀라울 정도로 체감했다.


진짜 VR이 이런 거였구나

시연은 계속 이어졌다. 실제로 활을 쏴볼 수 있는 '롱보우'까지 플레이한 후, 정말 인상깊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틸트 브러쉬'라는 어플리케이션인데, 실제로 화가가 그러하듯, 왼손에는 파레트를, 오른 손으로는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놀라운 점은 그림을 그릴 캔버스가 평면이 아닌, 공간이라는 점이었다. 공기 중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 현실에서도 절대로 해볼 수 없는 경험 아니던가. 그림에 어떠한 조예도 없기 때문에 그저 허공에 페인트를 흩뿌릴 뿐이었지만, 이 때만큼은 드물에 '황홀함'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말로 표현하는 것이 힘들 정도로 말이다.

▲ 이걸 보면 느낌이 올 것이다.

이후 마지막 순서로 '밸브'의 게임인 '포탈'에 등장하는 '피보디(P-Body)'를 수리하는 어플리케이션을 체험했다. 화면이 바뀌니 내가 있는 곳은 어퍼쳐 사이언스의 한 작업실. 내부를 조금 구경한 후 문을 열면 다 고장나 걸레짝이 되어버린 피보디가 들어온다. 이후 직접 피보디의 동체부를 분해할 수 있는데, 마치 아이언맨에서 토니 스타크가 손가락 컨트롤러를 이용해 홀로그램 청사진을 나열하듯, 순식간에 부품들이 볼트와 너트 단위로 분해되어 내 눈앞에 펼쳐진다. 이 때 나열되어 있는 부품을 자유자재로 돌려보고, 관련된 설명을 읽어볼수 있는데, 활자 하나하나까지 또렷하게 잘 보인다. 놀라운 경험이 아닐수 없었다. 사실 데모로 나온 어플리케이션인만큼, 수리라기보다는 분해 및 구경에 가까운 어플리케이션이지만, 바이브와 엔비디아의 합작이 어떤 위력을 보여주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놀라웠다. VR이라면 어디 가서도 '아는 척'좀 할수 있을 만큼 체험해 봤다고 생각하고 있었건만, 바이브를 통해 겪어본 바는 경험은 확실히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경험을 할수 있었다. 사실, 단순히 '그래픽'이라는 측면에서 바이브는 다른 VR과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 하드웨어 스펙의 차이 때문에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그 차이가 어마어마하지는 않다. 어쩌면 '바이브'가 나에게 엄청난 경험으로 다가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간의 어떤 VR보다도 다양한 '상호작용'을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 순간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해온 것들은 진짜 겉햝기에 불과했구나."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바이브'에서 느낀 경험은 특별했다.



'준비된 이들'을 위한 최고의 VR

반면 '바이브'는 치명적인 단점도 안고 있다. VR HMD라는 장치가 안고 있는 최악의 단점인 '밖이 안보인다'에서 오는 점이다. 때문에 VR을 원활히 즐기려면 부담없이 몸을 휘저을 수 있는 공간이 필수로 요구되기 마련인데, 바이브는 기본적으로 '선 채로'경험하는 사용자 경험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말은 곧 움직일만한 '공간'을 요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바이브 체험을 위해 준비되어 있던 암실의 경우 약 4-5평정도의 크기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방이었다. 체험 도중 자체적으로 가상의 펜스를 표시함으로서 사용자가 영역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다고 쳐도, 개인 단위의 게이머들이 부담 없이 마련하기 쉬운 공간은 아니다.

반면 '오큘러스'의 경우 최대한 좁은 공간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앉아서 체험하는' 상황에 걸맞는 장비다. 이 때 필요한 공간은 바이브에 비해 극도로 줄어들기 마련이다. 게다가 이 문제에 앞서 이야기한 '케이블'의 문제가 겹친다. 바이브를 사용하다 보면 360도 회전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경우 거의 100% 전선이 몸에 감긴다. '전선이 위험하니 항상 조심하라'는 명제는 VR이 추구하는 '최고의 현실감과 몰입감'과 완벽한 대척점에 서 있는 문장이기에 결코 바람직하다 할 수 없다.

결국 최고의 해결책은, 소형 배터리와 '블루투스' 기능을 통한 '원격화'밖에 없다. 하지만 이 역시 쉽지 않은 문제. 모바일 VR인 '기어 VR'만 해도 배터리 소모량이 엄청나다. 최적화 문제가 아니라 어쩔 수가 없는 거다. 그렇다고 보조 배터리를 주렁주렁 달자니 무게가 문제가 된다. 결국 이 문제가 생산 단계에서 해결되지 않는다면, 개인이 돈을 들여 모종의 안전장치를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다. 결국 이 모든 문제점을 타개하려면, 이용자 본인이 VR 경험에 어느정도 투자할 경제적 여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덤으로 구동에 필요한 PC도 고사양을 요구하니 말이다.

지금 단계의 '바이브'는 VR을 코어하게 즐기기 위한 유저들에게는 최고의 경험을 줄 수 있지만, 게임에 그만큼 투자할 여력이나 의사가 없는 게이머들에게는 턱없이 높은 문턱을 갖고 있다. PS4라는 공신력있고 저렴한 콘솔을 기반으로, 캐주얼한 보급을 기치로 삼은 PS VR과는 완벽하게 다른 노선을 타고 있는 것이다.

장담할수 있는건,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게이머들에게 '바이브'는 결코 후회를 주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하지만 다른 VR HMD 역시 자신들의 모든 모습을 아직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본격적인 경쟁은 내년이 되어야 볼 수 있을 것이다. 높은 보급력의 PS VR, 완벽에 가까운 VR 경험을 주는 바이브, 그리고 가장 소비자용 버전을 이미 공개한 '오큘러스'까지, 곧 펼쳐질 VR 업계의 격렬한 각축전에서, 어떤 장치를 고를 것인지 천천히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