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Diversity)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게임업계에 종사하는 여러 업계인의 강연을 들을 수 있는 NDC 2016이 시작되었다. 그 슬로건에 걸맞게, 올해에는 게임 개발과 기획을 물론 VR에 대한 강연도 심심찮게 찾을 수 있었는데, 그 중 가장 눈에 띈 강연의 제목은 역시 '현실 도피'였다.

현실 도피는 보통 긍정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는 아니다. 특히, 게임과 관련되어 이 단어가 나올 때는 십중팔구 부정적인 이야기로 흘러가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연 주제를 현실 도피로 정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모뉴먼트 밸리'를 개발한 어스투게임즈(UsTwo Games)의 개발자 다니엘 그레이(Daniel Grey)의 강연이라는 것과는 별개로 개인적인 호기심이 먼저 앞섰다.

현실 도피를 주제로 들여다보는 VR의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다소 민감해 보이는 주제로 강단에 선 그는, 자신의 어릴 적 경험을 함께 공유하며 앞으로 VR기기의 발전과 함께 다가올 '현실 도피'에 대한 미래를 이야기해나갔다.


▲ 다니엘 그레이(Daniel Gray) 어스투게임즈 대표

■ 현실 도피(escapism), 그리고 '게임'

다니엘 그레이는 '현실 도피(escapism)'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설명하는 것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현실 도피라는 단어에 대해 '불쾌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특히 환상 속에서 위안을 찾는 행위'라고 설명한 그는, 이 단어가 비디오게임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조금 다른 세상에서의 경험을 추구하는 것 또한 그는 현실 도피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15에서 20여 년 전, 이곳에 모여있는 우리는 모두 게임 컨트롤러를 가지고 스크린 속 세상에 빠져드는 듯한 경험을 해봤을 겁니다. 당시에는 컨트롤러를 눌러야만 게임 속 캐릭터들이 점프 같은 동작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우리들은 어느 순간 손에 컨트롤러가 들려있다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스크린 속에 집중하기도 했죠"

다니엘 그레이는 이 '컨트롤러가 들려있다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가상의 세계에 집중하게 되는 그 순간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이 과거 가장 처음 게임에 강렬하게 몰입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파이널 판타지 7'의 사진을 화면에 띄우고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 다니엘 그레이가 처음 게임에 몰입을 하게 된 계기인 '파이널 판타지 7'

파이널 판타지 7은 그가 11살에 즐긴 게임이며, 생애 처음 '게임에 몰입할 수 있다'는 경험을 심어준 게임이었다. 다니엘 그레이는 파이널 판타지 7이 그토록 몰입감을 갖게 할 수 있었던 이유로 '실제로 존재할 것 같은 캐릭터'와 '캐릭터들이 정말로 살아갈 것처럼 진짜 같은 세계관'을 꼽았다. 그는 캐릭터들의 배경과 다양한 개성이 그들의 감정에 쉽게 공감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덧붙였다.

이와 같은 '현실 도피'가 모뉴먼트 밸리에는 어떻게 적용되었을까? 그는 모뉴먼트 밸리를 개발하게 된 배경에 대해 모든 사람들에게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일종의 탈출구를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게임을 개발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일상생활에서 마주할 수 없는 모뉴먼트 밸리의 독특한 기하학을 활용한 공간이나, 몽환적인 배경음악 등도 모두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졌다. 모두가 지친 일상생활에서 잠시만이라도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현실의 걱정거리를 잊게 해주는 것이 '현실 도피'와 관련한 모뉴먼트 밸리의 목표였다.

▲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게임'은 가장 좋은 현실 도피 수단이 된다.


■ 현실 도피와 가상 현실(VR)

강연의 주제인 '가상현실(VR)'과 '현실 도피'로 돌아가서, 다니엘 그레이는 시각과 청각을 차단한다는 점에서 VR기기가 현실 도피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설명했다. VR기기를 통해 접하는 가상 현실에서는 고개를 돌린다고 해서 그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청각 또한 마찬가지다.

어스투게임즈는 이러한 VR기기의 속성에 더해, 컨트롤러가 없이도 가상의 세계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 다니엘 그레이는 강연 초반 자신의 어릴적 이야기를 다시 상기시키며, '버튼을 눌러야만 캐릭터가 움직이는 것'은 가상 세계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라고 설명해 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어스투 게임즈가 출시한 기어VR 전용 게임 'Land's End'가 만들어졌다.

Land's End는 컨트롤러를 사용하지 않는 게임이다. 초현실적인 세상에서 플레이어는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만으로 게임 속 세상과 상호작용을 하고, 퍼즐을 풀어나가게 된다.

"아무리 현실성 있는 장소를 VR속에서 접해도, 뇌는 일상생활의 환경에 너무 친숙해져 있기 때문에 가상 세계와 현실 간의 괴리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다소 초현실적인 세상을 VR속에서 접하게 된다면 그 경험과 상상력이 접목해 초현실적인 세상을 더욱 '믿을만한 것'으로 인지하게 되죠"라고 다니엘 그레이는 설명하며, "'Land's End'를 플레이할 때 현실 세계를 잊어버릴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습니다. 때문에 게임 속에는 자신 외의 다른 캐릭터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덧붙였다.


▲ 'Land's End'는 컨트롤러를 없애고 가상 현실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 '현실 도피'와 VR의 미래


다니엘 그레이는 자신 또한 현실 도피가 갖고 있는 부정적인 인식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언급하며, 자신이 17살에 겪었던 이야기를 설명해 나갔다.

"저는 17살 즈음, 네 달이 넘도록 병원 신세를 질 만큼 많이 아팠던 적이 있습니다. 오랜 병원 생활을 통해 정신적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다리를 많이 쓸 일이 없어 움직이는 것조차 불편했죠. 어느 날, 저는 아버지를 보며 '한 시간이라도 좋으니 딱 한 번만 병원 밖을 나가게 해 달라고 울며 부탁한 적도 있습니다. 그 날 아버지는 저를 휠체어에 싣고 이불을 덮어 몰래 병원 밖 주차장에 데려다 주었죠. "

그는 당시 주차장에서 아버지와 함께했던 불과 한 시간 남짓한 '일탈'이, 병원 안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위안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많은 환자들을 위해 VR기기가 보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비슷한 맥락에서, 그는 일본 애니메이션인 '소드 아트 온라인'을 한 예를 들며, 현실 도피에 대해 마냥 나쁘게만 생각할 수는 없다고 이야기했다.

"이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는 죽을 병에 걸려 있습니다. 현실은 아프고 우울한 상황이지만, 그 탈출구로써 신경망을 가상 현실과 연결해 생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죠. 가상 현실에서 그녀는 아주 뛰어난 검사일뿐더러, 병원에만 있지 않고 모험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의 현실이 너무 외롭고 너무 고통스럽다면, 반대로 가상 세계 속에서는 친구를 사귈 수도 있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면, 그중 어느 것을 진짜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당사자만이 알 수 있다. 그는 VR 기술과 가상현실의 발전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게임 플랫폼의 하나일 뿐일 수도 있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며 강연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