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에 대한 관심은 일본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뜨거웠다고 해야 할까? 'Now Is the Time'이라는 슬로건의 주인공이 마치 VR 같았다. 여기를 봐도 VR, 저기를 봐도 VR. 행사장 구석구석이 모두 VR이라는 코드로 덮혀 있었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라 그런지 유독 더 돋보였다. 오죽하면 'VR is NOW'라는 이름으로 VR 강연을 모아 놓기까지 했다. PS VR의 본고장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데이브 레니아드' 박사의 강연도 그 맥락 안에 있었다. 'VR이 진짜 인류 상호작용의 미래인가'. 얼핏 어려워 보이는 제목이지만, 실은 심화보다 원론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VR과 관련된 기술이나, 그 미래보다는 VR 그 자체에 더 집중한 강연. VR이 인류의 미래에 어떻게 작용할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야기였다.

▲ 데이브 레니아드(Dave Ranyard) 박사

데이브 레니아드 박사는 17년 간 소니에서 일한 베테랑 프로그래머이자 AI 분야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PS2가 상용화되었던 시절에 다양한 타이틀을 개발했고, 최근엔 PS VR용 타이틀의 개발 과정에 참여했다. 자기 소개를 마친 후 잠시 숨을 고른 그는, '상호작용'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강연의 첫 막을 열었다.

'상호작용'

사실 어려운 말은 아니다. 말 그대로 대상과 서로 작용하는 것. 내가 어떤 작업을 했을 때, 대상이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보이면 그것이 곧 상호작용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키보드와 마우스, 그리고 게임 패드 등도 상호작용의 방법 중 하나다. 너무 당연해진 나머지 굳이 '상호작용'이라는 단어를 붙이기도 이상해진 개념들이지만, 엄연히 그 또한 상호작용의 하나다.

▲ '상호작용'은 사실상 모든 행동들

하지만 그럴만도 하다. 컴퓨터와의 상호작용의 시작은 인간이 어떤 것을 입력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마우스와 키보드는 입력 장치의 정석과도 같았다. 물론 이 '정도'에서 벗어난 수단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댄스 게임용 발판이나 슈팅 게임용 건 컨트롤러와 같은 수단들도 상호작용의 수단이다. 하지만 이 장비들은 그들이 필요한 그 특수한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물건들이었고, 그 외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데이브 레니아드 박사는 '입력 장치'의 발전사를 말하며 끝으로 'VR'을 말했다. 많은 이들이 VR을 '출력 장치'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엄연히 말해, VR HMD는 출력 장치이며, 동시에 입력 장치이다. 상호작용이라는 단어에 이렇게 어울리는 장치가 또 있을까?

▲ 결국 모든 것은 VR을 향한 주춧돌이 되었다.

기존의 틀을 부수는 혁신

이어 레니아드 박사는 VR 이전, 인류의 생활과 문화 수준을 바꾼 몇 가지 발명품들을 소개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연속으로 상영해 마치 움직이는 듯한 효과를 준 최초의 활동 사진, 작은 스크린을 겨우 보여주는 흑백 텔레비전, 그리고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까지. 내용은 끝나지 않았다. 워크맨과 인터넷, 그리고 스마트폰까지 이 모든 발명품들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기존의 틀을 부쉈다는 것, 그리고 나아가 인류의 삶을 바꿔 놓았다는 점이다.

의문은 여기서 나온다. VR이 과연 이 대열에 낄 정도로 의미 있는 발명품으로 인류의 역사에 남을 거냐는 궁금함이다.

▲ 인류의 삶을 바꾼 몇몇 발명품들

결론부터 말하자면, 레니아드 박사는 VR이 앞서 말한 '인류의 삶을 바꾼 발명품'의 대열에 상당히 근접해 있다고 말했다. VR은 다분히 고립된 장치이며, 동시에 그만큼의 몰입도를 보여주는 장치다. 범용성과 편의성을 희생하고, 대신 장치로서의 본질에 더 집중한 거다. 재미있는 점은, 이제 알만한 사람들은 다 VR이 어떤 장치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고 있다는 점이다. 어째서 VR이 이런 특징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의심을 갖는 사람이 거의 없다. VR이 인간의 삶에 그대로 진입해 왔고, VR에 대한 사항이 슬슬 '상식'의 대열에 오르고 있다는 뜻이다.

사실 VR, 아니 HMD는 생각보다 더 오래 전부터 존재해온 개념이다. 무려 50년 전인 1968년에, 헬기 조종사 용으로 첫 HMD가 등장했다. 이후 꾸준히 HMD는 등장해 왔으나, 단 한번도 앞서 말한 삶을 바꾸는 장치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2016년은 공공연히 'VR의 해'라고 불리곤 하며, 수없이 많은 VR HMD들이 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성공적인 '리부트'를 이뤄낸 거다.

▲ 생각 외로 오래 된 HMD의 역사

이제 인류는 준비가 되었다. VR HMD가 그간 받아들여지지 못한 이유는, 인류의 제반 기술이 이를 이뤄낼 만큼 뛰어나지 못했고, 동시에 VR이 제 기능을 할 수 없어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기술은 앞으로 더 발전할 것이고, VR 또한 이에 발맞춰 빠른 속도로 인류의 삶에 녹아들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을 희망적으로 바라보는 것 또한 옳은 시점은 아닐 테다. 빠르게 변화하는 생활의 모습만큼, 변수 또한 많으니까. 이제 레니아드 박사가 아닌, 우리가 물음에 대답해볼 차례다. VR은 진짜 인류의 미래에 한 축이 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