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실수였다. 같은 부족원이자 후배가 한손 칼이 필요하다고 해서 준비 중이었던, 합금과 열 처리를 마친 금속 덩어리로 '금속날'로 만들어버렸던 그 실수 말이다. 치명도와 정확도 증가가 붙은 '칼날'이 아니라 그냥 '금속날'로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곤 급조한 한손칼이나 쓸데없는 금속 작살 같은 것뿐이었다. 금속 가공을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은 시간을 놓친 불안정섬처럼 텅텅 비어버렸다.

열차에서 기술자를 고를 때만 하더라도, 희귀한 재료로 굉장한 옵션이 붙은 휘황찬란한 무기 같은 걸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워프 이후 지금까지 만들었던 무기보다 뼈작업칼과 수리키트가 훨씬 많았을 거다. 지금도 작업칼에 들어가는 손잡이를 만들면서 새끼줄을 꼬고 있지 않은가. 직장을 구하는 시기에 종종 들었던 '실제 업무는 상상하는 것과 다르다'는 말을 듀랑고에서 체감할 줄은 몰랐다.

그때였을까. 제작과 관련된 브레이크가 망가진 건. 어젯밤 옆자리에서 건물 수리키트를 만들던 건축가가 나에게 몰래 털어놓았던 이야기가 스쳐 지나갔다. "돌길을 만드는 데, 돌이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루비도 돌이에요. 그래서 루비로 돌길을 만들면 레드 카펫이 될 줄 알았어요.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요? 지금 밟고 있잖아요. 그냥 돌길이죠." 좋은 방향성이라 생각했다.

미리 밝힌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기록은 한밤에 부족 창고를 털어 이상한 걸 만든 바보의 바보짓이다. 부디 착한 개척자는 따라 하지 말고 그냥 읽고 넘기길 바란다.

- 듀랑고 워프 25일차, 도시섬 어딘가

▲ 보석 돌길이라니, 좋은 방향성이다.



기록 1. 마법을 쓸 수 있을 때를 대비한 보석검을 만들었다.
- 분명 보석이 들어갔으니까 나중에라도 INT나 WIS 같은 걸 올려줄 거다.

건축가가 썼다는 재료인 보석에 눈이 갔다. 보석의 '정상적인' 쓰임새는 무기에 능력치를 더하기 위한 상아장식 재료로 쓰거나, 장신구의 일종인 보석 목걸이의 재료로, 혹은 염색약을 만들기 위한 염료로 쓰는 것이다. 물론 보석의 '제작 가능한 아이템' 부분을 살펴보면 이외에 다양한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으나 그 한계가 '돌'이기에 당연히 성능은 기대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워프 전에 즐겼던 게임에서도, 보석으로 뭘 만들면 나름의 고유한 이유로 INT나 WIS가 올라서 마법사들이 좋아했다. 마침 듀랑고에서도 루비와 사파이어라는 보석이 있다. 심지어 붉은색과 파란색이다. 당장이라도 갈아서 주스로 만들면 HP와 MP 포션이 될 것 같은 색이잖은가. 버프를 201 이상 유지해야 할 것 같은 노란색은 없어서 다행이다. 사실 특별한 게 없어도 괜찮다.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다.

창고에서 사파이어와 루비를 가득 털었다. 가장 먼저 그냥 돌 속성으로 쉽게 만들 수 있는 돌날, 작업날, 돌톱을 만들었다. 보석의 색으로 예쁘게 반짝이긴 했지만, 속 빈 강정처럼 그냥 돌로 만든 무기였다. 그러던 도중 보석으로 만든 '큰 돌망치머리'가 '큰 돌덩어리' 속성을 갖게 된다는 것을 발견한 건 큰 수확이었다. 이걸로 큰 돌덩어리가 필요한 아이템을 만들 수 있고, 마법을 쓸 수 있을 때를 대비한 아이템을 더 많이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보석으로 돌창, 양손 돌칼, 양손 돌망치 같은 것도 만들었다. 요리사가 섭섭해할 것 같아서 루비로 만든 돌판과 사파이어로 만든 돌절구도 준비했다. 당연히 능력치는 별다른 것 없는 돌 무기, 도구였다. INT나 WIS 같은 건 당연히 없었다. 이런 걸 왜 만들 수 있게 했냐는 근본적인 질문이 떠올랐지만 그래도 괜찮다. 창이나 돌칼을 들어보니 사파이어색으로 빛나는 게 예뻤으니까.

마침 잘 됐다. 선배가 지난주에 자기가 좋아하는 빨간색 톱을 만들라고 했었다. 그땐 최대한 빨간색에 가까운 구리를 골라 톱을 만들어서 줬더니 욕만 먹고 손잡이를 만들어야 했다. 원하는 빨간색 루비 톱을 갖다 주면 좋아할 것 같다. 지금은 그냥 돌톱이지만, 마법을 쓸 수 있어지면 가치가 달라질 것이다. 마법은 언제 쓰냐고? 연애하지 않고 30년 정도 살면 된다고 들었다. 절대로 30년 동안 연애 못 하라고 바라는 건 아니다.

▲ 그냥 돌로 만든, 색이 예쁜 무기 도구다.

▲ 창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 이건 선배 거다. 시뻘건 색이 잘 어울릴 거 같다.



기록 2. 흡혈귀가 나타났을 때를 대비한 은제 무기를 만들었다.
- 야생은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른다. 우리처럼 흡혈귀가 워프해올 수도 있잖은가.

그러고 보니 후배가 칼을 만들어달라고 했었다. 부족에서 사냥을 도맡아 하는 친구니까, 좋은 칼을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녀석은 근접 전사니까 보석검은 안 된다. 곰곰이 생각하다 성스러운 느낌의 은으로 만든 칼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우리처럼 흡혈귀가 워프해올 수도 있고, 그때 나가서 싸울 동안 내가 도망갈 시간을 벌어줘야 하니까.

은, 얼마나 좋은 울림인가. 심지어 광석이라서 겉보기만 제대로 만들어도 평범한 금속 칼처럼 보일 것이다. 기왕 만드는 거 은만 골라 사용해서 만들기로 했다. 누군가 나중에 "그 칼, 은인가?"라고 물었을 때 "은은 예로부터 우리 부족의 수호신이었다" 같은 말은 하지 않도록 100% 은제로 만들어서 체면은 세워줘야 하지 않겠는가.

창고에서 은 광석만 털어서 제련을 시작했다. 다른 가공을 거치면 성스러운 힘이 약해질 것 같아서 제련만 마친 따끈따끈한 은을 바로 날로 만들었다. 절대로 귀찮아서가 아니다. 은으로 만든 제작품은 금속 칼과 창, 망치, 도끼, 그리고 작살이다. 흡혈귀의 심장에 박을 말뚝은 못 만드니, 비슷한 작살이라도 만들어서 모양을 냈다.

그렇게 만든 은제 무기는 예쁜 은색으로 반짝거렸다. 다른 광석으로 만든 것과 달리 좀 더 깔끔한 금속 느낌이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성능은 그냥 금속 무기 그대로였다. 흡혈귀가 나올 때는 가치가 좀 더 오를 것이다. 최소한 흡혈박쥐 같은 게 나오면 그때라도 쓸 수 있지 않을까?

▲ 은으로만 만든 칼. 당연히 은으로 만들었으니 은색이다.

▲ 말뚝 대신 만들어본 은제 작살. 흡혈박쥐는 언제 나오려나.

▲ 이후 부족원들에게 엉망진창으로 혼난 뒤에, 쓴 만큼 채워 넣었다.



제작 노트
- 그 어떠한 바보짓이라도, 기록은 남겨야 한다.

* 돌길의 재료로 보석을 사용할 수 있으나, 완성품은 그냥 돌길과 다르지 않음.
* 보석을 재료로 큰 돌망치머리를 제작하면 '큰 덩어리' 속성이 붙어 재료로 활용 가능.
* 보석으로 만든 아이템의 능력치는 다른 물품과 크게 다르지 않음.
* 보석으로 만든 아이템은 재료로 쓴 보석의 색이 겉으로 드러남.

※ 이 글은 실제 정보를 바탕으로 만든 픽션입니다. 실제 후배나 선배님과는 무관합니다. 진짜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