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을 뛰고 있는 한 선수가 있습니다. 30여 km쯤 달렸을까요? 묵묵히 달리고 있는 선수에게 마음속 누군가가 묻습니다. '이제 그만 달려도 되지 않을까? 네가 지금 그만둔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너에게 비난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그만 뛰는 게 어때?'

달리기를 멈추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카인' 장누리는 멈출 생각이 없습니다. 오르막길에 숨은 차오르지만, 아직 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이렇게 긴 코스에도 분명히 끝은 있고 분명히 그곳에 닿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2012년 5월 나진 소드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한 '카인' 장누리는 어느덧 3년째 프로게이머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LoL계의 맏형입니다. 함께했던 많은 선수가 해설자, 코치, 감독, 혹은 직장인으로 다른 길을 찾아 떠나갔지만, 그는 아직도 선수로 활동하며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함께 달리기를 시작했던 대부분의 사람이 발걸음을 멈춘 지금, 그가 아직도 걸음을 옮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e스포츠의 성지인 용산. 이곳은 전통 명문 게임단 나진 e엠파이어의 숙소가 위치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전처럼 춥지 않지만 봄 내음도 느껴지지 않는 어느 3월, 역 근처에서 '카인' 장누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 사진을 위해 깔끔하게 이발을 했다며 웃는 그의 턱에는 면도를 하지 않아 까끌까끌한 수염이 염치없이 삐뚤빼뚤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큰 형과 함께 인터뷰를 위해 근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1라운드 전반기 성적 어땠나요?" 무거운 질문이지만 장누리선수는 허심탄회하게 대답했습니다. "전반기 성적은 분명 좋지 않아요. 프리시즌 때 성적이 잘 나왔기 때문에 팬분들의 많은 기대를 받았는데 강팀과 중위권 팀을 상대로 결과가 좋지 않았어요. CJ 엔투스, GE 타이거즈, 진에어 그린윙스 모두 프리시즌과 비교해 실력이 일취월장했는데 이에 반해 우리는 제자리걸음이었던 듯해요"

예민한 질문에도 웃으며 대답하는 덕분에 용기를 내서 다음 질문을 이어갔습니다. "성적이 좋지 않으면 팀 분위기도 많이 가라앉을 것 같아요?" 팀 분위기를 걱정하는 질문에 장누리는 아쉬움을 삼키며 대답했습니다. "전반기 강팀들을 상대로 2:1로 아쉽게 진 경기가 많았어요. 분명히 이길 수 있다고 믿었던 경기이기 때문에 팀 분위기가 가라앉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팀 분위기가 좋을려면 이겨야죠(웃음). 동료들이 모두 기특해 보이고 든든하게 느껴지거든요"

넉넉하게 인상 좋은 얼굴로 대답하는 장누리를 바라봤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장누리만큼 뛰어난 커리어를 가진 LoL 프로게이머는 많지 않습니다. 롤챔스우승을 해본 경험도 있고 꿈의 무대인 롤드컵에도 두 번이나 출전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LoL 역사와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가 기억하는 영광의 순간은 언제였을까요?

▲ 영감님의 영광의 순간은 언제인가요?

"음.. 처음 롤드컵 진출을 확정 지었을 때가 기억에 남아요. 제가 속했던 나진 소드는 당시에 사실상 한국 최강 팀으로 불리던 아주부 블레이즈와 3, 4위전 경기를 치렀어요. 그리고 이 경기에서 이겨야만 롤드컵 선발전에 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죠. 모든 사람이 아주부 블레이즈의 승리를 점친 상황이었지만 우리는 준비한 전략을 그대로 실현하면서 2:0으로 이겼어요. 그렇게 진출한 롤드컵 선발전에서 아주부 블레이즈를 결승에서 다시 만나 2:3으로 역전승했어요"

잠시 생각하던 장누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롤드컵 진출을 확정 지었을 때 꿈을 이뤘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단순히 롤드컵 진출인데 너무 과장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당시엔 해외 팀들이 워낙 강세였기 때문에 출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었어요. 롤챔스 우승도 좋은 기억이지만 그때는 오히려 무덤덤했어요. 경기도 3:0으로 쉽게 이겼고요"

롤드컵 선발전에서 LG-IM, 제닉스 스톰을 꺾고 파이널에 오른 나진 소드는 다시 한 번 아주부 블레이즈를 만납니다. 그리고 첫 세트에는 '쏭' 김상수가 '육쏭'이 나온 날로 이블린으로 경기를 터트렸습니다. 그러나 2, 3세트를 연달아 내주고 위기를 맞이한 나진은 이어지는 경기에서 '이걸 나진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만큼 기적의 역전승을 해냅니다. 나진 e엠파이어 특유의 끈적한 경기력이 발현된 순간입니다.


3년의 프로게이머 생활 동안 많은 선수를 만나 경기를 치러본 장누리가 꼽는 '최강의 봇듀오'는 누구일까요? "단연 '마타' 조세형, '임프' 구승빈을 꼽아야죠. 라인전도 정말 강했고 정글과 호흡도 좋아서 시야가 없을 때는 항상 갱킹이 올 것만 같아 쉽게 싸우지도 못했어요. 조세형은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서포터라고 생각해요. 라인전이 끝난 상황에서는 정글러와 함께 경기 전체를 장악했어요"

조세형을 이야기하던 장누리가 허리가 아팠는지 갑자기 자세를 바로잡으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습니다. 수염도 깎지 않고 왠지 모를 연륜이 느껴저서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세계 최고령 원거리 딜러 '제파' 이재민과 친할 것 같아요. 혹시, 황충-엄안 듀오라는 이야기 들어봤어요?" 질문을 듣자마자 웃음이 빵 터진 장누리가 억울하다는 듯 말을 곧바로 이어갔습니다.

"들어봤죠. 제가 황충인건가요?(웃음) 아직 서른도 넘지 않았는데 별명이 너무한 것 같아요. 방송 인터뷰에서 우스갯소리로 허리도 아프고 눈도 침침하다고 말했지만 '황충' 이야기를 들을 만큼 나이가 많지는 않아요. 아! 좋은 점도 있어요. 나이가 많다는 생각을 다들 해서 솔로랭크에서 모르는 사람도 많이 존중해줘요. 실수한다 하더라도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어요'라고 말해주는데 기분이 참 오묘해요(웃음)."

"솔로랭크에서는 어느 라인을 주로 가나요?" 서른에 가까운 나이에도 챌린저티어에 오를 만큼 뛰어난 피지컬을 자랑하는 장누리의 비법이 궁금했습니다. "당연히 서포터로 가요. 다른 라인을 가면 민폐인 것 같아요(웃음). 그래도 다른 라인을 가야 하는 경우에는 모르가나로 탑과 미드를 가요. 이 챔피언을 하면 이상하게 다른 라인이 이겨줘요. 서른 판 넘게 했는데 승률도 70%가 넘어요. 그리고 정글도 자주 가는 편이에요"

정글을 자주 간다는 말이 약간 의아했습니다다. 메타가 바뀌고 힘들어졌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 정글을 좋아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서포터로 데뷔하지 않았다면 정글러가 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할 만큼 정글이 재미있어요. 요즘은 전과 비교해서 카정이 많이 오는 편도 아니고 '누르반 4세'로 불릴 만큼 자르반 4세를 많이 했어요. 지금도 (조)재걸이보다 '강타'를 잘 쓸 자신 있어요"

▲ (조)재걸이 강타는 정말..

얌전히 앉아있다가 뜬금없이 갱킹을 당한 '와치' 조재걸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습니다. '강타' 이야기는 노림수였는지 장누리는 즐거운 듯 말을 이어갔습니다. "요즘은 (조)재걸이가 '강타'를 그렇게까지 못 쓰지는 않아요. 그런데 가끔 정말 어이없게 뺏길 때가 있어요. 그래서 (오)규민이에게 칼리스타를 쥐여주는 편이에요. 칼리스타가 정글 몹을 잘 잡기 때문에 빼앗길 염려가 없거나 아예 상대 정글을 몰아내 주니까요"

오규민의 칼리스타 픽에 숨겨진 의미가 드러나 크게 웃었습니다. 이런 농담을 할 수 있는 것도 팀의 맏형이기에 할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때로는 농담으로 팀 분위기를 풀어주고 때로는 분위기를 쇄신해서 함께 힘을 내도록 이끌어가는 역할을 해야 하는 장누리. 그래서 나진 e엠파이어의 다른 선수들은 느끼지 않는 맏형의 부담감을 느끼진 않을까요?

"팀에 마음이 여린 친구들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실수를 해도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요. 나이 차이가 많아서 저를 어려워할까 봐 걱정이 많이 돼요. 특히, 경기를 대비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피드백하는데 저에게 말을 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면 문제가 돼요. 편한 형이 되어서 이런 부분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한편으로는 저를 전혀 어려워하지 않는 선수도 있어요. '피넛' 윤왕호나 오규민 같은 경우가 특히 그래요(웃음)"

맏형으로써 그가 가진 생각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서로 모르는 다섯 명, 열 명이 모여서 게임을 하고 서로 다른 생각과 세대 차이가 있는 사람들이 한팀이 되어 경기를 치러요. 예의 없이 구는 것에 대해서는 따끔하게 말하는 편이지만 그 외에 것에 대해서는 크게 뭐라 하지 않아요. 그저 성적만 잘 나온다면.."

지난 2라운드, SKT T1과의 첫 경기에 두 명의 신인이 데뷔하며 인상 깊은 활약을 보였습니다. 강팀인 SKT T1과의 첫 세트에 주도적인 갱킹을 선보인 '피넛' 윤왕호와 데뷔전에 펜타킬을 해낸 '탱크' 박단원입니다. 나이 어린 신인 선수들의 활약을 지켜본 장누리가 느낀 감정은 어땠을까요?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거죠" 장누리는 잠시동안 말을 하지 않았고 생각을 정리한 후 운을 띄웠습니다. "(윤)왕호의 경우에는 유명한 아마추어였고 촉망받는 선수였어요. (박)단원은 티어가 높지 않아 유명하진 않지만 정말 잘하는 선수에요. 새로운 나진이라고 불리는데 경험이 많지 않아 아직은 부족해요. 그 친구들이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길 바래요. 연습도 많이 하고 연구도 많이 해서 지금에 만족하지 말고 더 잘해나갔으면 좋겠어요. 잘하는 친구들이니 우승도 할 수 있을 거예요. 해봐야죠!"

힘차게 말을 이어간 장누리지만 '세대교체'라는 단어를 말할 때는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습니다. 혹시 지금 많은 고민을 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습니다.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순서예요. 아무리 잘하는 팀이라도 그 기량을 꾸준히 유지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SKT T1이 대단했지만, 삼성 화이트에게 그 자리를 내줘야 했고 무시무시하던 삼성 화이트도 삼성 블루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였어요. 팀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고 그에 맞춰 새로운 선수들이 계속 데뷔하면서 자연스레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것 같아요"

"혹시 은퇴를 생각하고 있나요?" 침착하게 말을 이어가는 장누리를 보면서 불편하지만 궁금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저는 아직 이루지 못한 게 많아요. 우승도 경험했고 롤드컵에도 두 번이나 나가봤지만 롤드컵 우승을 해내진 못했어요. 마지막으로 해내지 못한 꿈을 이루기 위해 신인 선수들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할 생각이에요. 당장 나진 e엠파이어가 성적은 좋지 않지만 롤드컵에 갈 것이라고 확신해요. 이번에 롤드컵에 가서 우승해야지만 선수생활에 미련이 없을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듯한 장누리를 바라봤습니다. 함께 자리를 지키던 친구들이 대부분 자리를 떠난 지금, 그 빈자리를 채우는 신인 선수들에게서 말 없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장누리에게서 무력감을 찾아볼 순 없었습니다. 아직 뛰고 싶다는 열망,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이 그의 얼굴에 맴돌 뿐입니다.

"장누리 선수를 응원하는 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세요?"

"항상 응원해주는 팬분들께 정말 감사해요. 서른이 넘어서도 선수 생활을 이어나가길 바라시는 분들이 많아요. 저는 아직 은퇴할 생각이 없어요. 할 수 있는 데까지 열심히 뛸 겁니다. 그리고 올 한해 팬분들께 보답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할 겁니다. 지금 우리 팀의 성적이 좋지 않지만 나진e엠파이어는 항상 쉽게 간 적이 없었어요. 끝까지 끝을 알 수 없는 팀이기 때문에 결과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롤드컵에 진출, 우승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앞으로도 선수로 좋은 활약 보여주실 '카인' 장누리 선수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