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프 스케어 대신 분위기로 만들어낸 VR 공포


예상치 못한 순간 갑자기 무서운 장면이 등장하는 일명 점프 스케어는 공포심을 끌어올리는 데는 꽤 효과적인 장치일 겁니다. 한창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순간 등장한 무언가는 플레이어를 깜짝 놀라게 하죠. 그리고 직접 주인공의 시점으로 움직이는 VR 게임에서의 공포감은 정말.... 굳이 말이 더 필요할까요?

하지만 이런 '깜놀' 요소가 게임의 훌륭한 만듦새를 대변하는 건 아닙니다. 한창 이야기에 몰입해 있을 때 분위기를 깨기도 하고 뻔한 점프 스케어는 괜한 짜증만 불러오죠. '유전'이나 '더 위치'가 그저 남발하는 점프 스케어가 아니라 잘 짜인 이야기와 분위기, 연출 등 여러 고민을 통해 2010년대 최고의 공포, 스릴러 중 하나로 꼽힌다는 걸 영화팬이라면 더 잘 알 겁니다.

그래서 쉬운 길이 아니라 고된 길을 택한 이 게임의 선택에 눈이 더 갑니다. '귀신 괴물 갑자기 등장하면 무서워할 건 똑같은데'라는 선택 대신 저택이라는 한정된 요소를 탐험하고 숨겨진 이야기에 집중하도록 만들면서도 찬찬히 밀려오는 긴장감과 공포를 전하고자 했습니다. 바로 오큘러스로 먼저 출시된 VR 게임 '레이스 더 오블리비언 - 애프터 라이프(Wraith: The Oblivion - Afterlife, WTOA)'입니다.

게임명: 레이스 더 오블리비언 AL
장르명: 공포 / VR
출시일 : 2021.04.23.
개발사 : Fast Travel Games
서비스 : Fast Travel Games
플랫폼 : 오큘러스 / 스팀

관련 링크: '레이스 더 오블리비언 - 애프터 라이프' 오픈크리틱 페이지



물에 젖듯 올라오는 공포 분위기

먼저 WTOA가 주는 공포에 대해 말해보죠. 게임은 단순히 귀신이나 유령에 대한 두려움에 기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도 그럴게 주인공 자체가 망자거든요. 어느 저택에서 일어난 강령회에서 죽어버린 주인공이 그 비밀을 파헤치는 데 게임의 목적이 있습니다.

다만 주인공이 유령이니까 무서울 것 하나 없는 그런 상황은 아닙니다. 인간에 가까운 주인공보다는 괴물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리는 망령들이 저택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요. 사진기자의 플래시 같은 게임 중간 얻는 일부 아이템으로 잠시 머뭇거리게 만들 수는 있지만, 크게는 이 망령들을 마땅히 물리칠 방법이 없습니다.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주변에 있는 병을 집어 던져 시선을 끌고 도망가는 거죠. 일종의 은신, 스텔스 개념이 핵심 요소인 셈입니다. 제대로 걸리면 도망가기란 쉽지 않으니 그에 따른 긴장감도 더 높아지도록 만들어졌고요.


주인공의 목적과 이를 풀어나가는 전개. 여기에 맞는 전체적인 분위기도 종이가 먹물을 빨아들이듯 찬찬히 공포감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나라 부동산을 생각하면 갑부 순위 안에 들어야 겨우 건축 고민이나 좀 해볼까 싶은 거대한 규모의 저택이 게임 장소입니다. 멋진 조각상이나 그림, 조명 등이 시선을 사로잡지만, 시간이 밤이다 보니 조금만 어두운 곳에 조명이 없다면 금세 까마득한 어둠이 내리깔립니다.

인간이었던 것들의 과거 기억과 행동이 그림자가 되어 반복되는데 진행 힌트나 스토리도 여기서 유추할 수 있게 됩니다. 꽤 많은 등장인물의 죽음이나 그들의 암투어린 비밀에 점점 다가가게 되죠.


살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거대한 저택 곳곳에서 플레이어의 정신을 갉아먹고 심연으로 보내버리려는 악령과 갑자기 등장하는 유령들. 그리고 귀를 자극하는 속삭임과 기괴한 소리는 나도모르게 젖어든 공포에 쉽게 빠져들도록 합니다.

점프 스케어만으로 채운 공포가 아주 잠깐의 '놀람'으로 만들어졌다면 WTOA는 긴장감 있게 꾸준히 유지되는 셈입니다. 미스터리와 스릴러의 성격이 한 스푼 더 담겼다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막연히 공포 게임은 무서워서 못한다는 플레이어도 조금은 쉽게 도전해볼 수 있고요.

물론 점프 스케어가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다만, 초반에는 그런 부분을 최소화했고 게임에 적응해나간 중 후반부 분위기에 맞춰 만날 수 있으니 나름대로 공포에 적응한 후라 그 부담감이 덜하기도 합니다.




VR 게임에 대한 고민이 담긴 시스템

그냥 공포 게임도 공포감과 긴장감을 전달하면서도 스토리 전개에 신경 쓰는 건 쉽지 않습니다. VR 공포게임이라면 여기에 생각할 요소가 더 많아지죠. VR 멀미에 아무리 편안하게 만들었다고 자신하는 기기라도 오래 착용하고 있으면 힘들게 마련이니까요.

그런 부분에서 WTOA는 유저 편의에 고민을 많이 한 모습입니다. 이동부터 화면 전환 시 시선을 집중, 멀미 효과를 줄일 수 있는 주변부 페이드를 직접 조절할 수 있도록 했죠. 화면 전환 속도 같은 것도 여러 단계로 나눠 설정할 수 있습니다. 원한다면 멀미 현상은 좀 심해도 자연스럽게 이동하도록 설정하는 것도 가능하죠.

세세한 설정으로 게임에 더 자연스럽게 몰입하거나, 더 오래 즐길 수 있거나 선택할 수 있는 셈입니다. 아무리 좋은 옵션과 시스템도 누군가에게는 편하지 않을 수 있는데, 이걸 선택 가능한 영역 안에 넣어놓은 거죠.


'하프라이프: 알릭스'에서 중력 장갑을 가지고 멀리 있는 물체를 튕기듯 손으로 가져오는 시스템은 이동이 일반 게임만큼 쉽지 않은 VR의 불편함을 덜어주는 주요 방식이 되었습니다. 다만, 이걸 별다른 능력도 없는 일반 사람이 쓴다면 게임의 세계관과 쉽게 맞아떨어지지 않고 몰입감도 떨어지겠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유령. 이거 참 편리한 설정입니다. '영적 능력으로 했음'으로 다 설명이 되거든요. 멀리 있는 물건을 손으로 튕겨 가져오는 것도 가능하고 컨트롤러의 진동을 통해 다음 진행 방향을 알려주는 것도 영능력이 있기에 가능했다는 설정이 더해졌습니다.

여기에 별도의 인벤토리 메뉴를 대신해 상황에 맞는 능동적인 인벤토리 창이 화면에 표시되는데요. 사진가라는 설정에 맞게 빈 프레임 안에 획득한 장비를 넣어둘 수 있고 이 아이템을 사용할 상황이 되면 그에 맞는 창이 뜨니 따로 인벤토리 관리를 할 필요가 없죠.

물론 그 전에 획득한 문서 등을 다시 읽을 수 있는 장소를 따로 마련해두고 있기도 하고요. 별도의 다양한 메뉴를 사용하기보다는 기본적으로 내가 쓸 수 있는 두 손으로 마법처럼 그 상황에 필요한 조작을 바로바로 할 수 있게 만든 겁니다.

VR 좀 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매번 메뉴창 켜서 옮겨 다니고 아이템 정리하고 이러는 거. 일반 게임에서도 귀찮지만, 정말 VR에서는 수백 배는 더 귀찮고 불편하게 느껴지니까요.

▲ 필요할 때만 나오는 인벤토리

▲ 사용도 그에 맞게 쓰기만 하면 된다



길 찾기만 하다 끝날 셈이냐

WTOA는 앞서 설명했듯 자연스러운 공포 분위기와 이걸 받쳐주는 시스템 자체는 충실하게 구현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이 제대로 만들어져있다 보니 정작 이걸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게임 디자인이 더욱 아쉽게 느껴집니다.

비슷한 장르의 게임이 퍼즐 요소를 통해 게임적인 플레이 요소를 만들어내고자 하지만, WTOA에는 이런 특징을 찾기 어렵습니다. 보통은 전에 획득한 문서들만 잘, 아니 대충 읽어보기만 하면 해결되는 정도입니다. 다양한 퍼즐보다는 길 찾기가 게임의 중심이 되죠.

거대한 저택은 다양한 문과 통로들로 연결되어있지만, 이들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지는 않습니다. 대개 가지 못하는 문은 자물쇠 형태의 아이콘으로 막혀있고, 지금 플레이어가 가야 하는 길은 대개 하나로 정해져 있죠. 또 별도의 맵이나 내비게이터가 없어 지금 가야 할 장소를 두 발로 뛰어다니며 찾아야 합니다.

▲ 넌 못 지나간다

게임을 진행할수록 흥미로운 퍼즐 요소 대신 직접 몸으로 정해진 루트를 찾아내는 길 찾기 게임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횡으로, 종으로, 나선형의 계단을 빙글빙글 오르기까지. 길 찾기 자체가 플레이어에게 어지러움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멀미를 막기 위한 시스템은 잘 마련해놓고 이러기라니 참.

잘 만든 VR 게임이 위아래 움직임은 최소화하고 좌우로 게임을 넓게 쓰며 게임 진행 방향을 정면으로 집중시키고자 한 것을 조금은 생각해보면 어땠을까 하네요.

▲ 위냐, 아래냐, 모르면 다 가봐야 한다

퍼즐이 없으니 게임의 긴장감을 높이는 주요 요소는 바로 악령인데요. 여기서는 잠입 게임의 기초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게임에서 플레이어를 찾아다니는 적들의 핵심은 일정 패턴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건 공포 게임뿐만 아니라 잠입 액션이나 코만도스 같은 시뮬레이션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게 현실적이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가 이 적의 시야를 피해 도망갈 여지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WTOA의 적들은 마땅한 패턴을 찾기 어렵습니다. 마냥 기다리며 적의 움직임을 봐도 도무지 어떤 생각으로 저렇게 움직이는지 감이 오질 않습니다. 그렇다고 무시하고 달려가며 피하기엔 주인공의 이동 속도가 처참합니다.

VR 게임에서 어지러움을 방지하기 위해 흔히 이런 느린 이동속도를 고집하는데 이에 맞게 적도 느리게 만들던가, 아니면 마땅히 대처할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플래시 등으로 적의 움직임을 잠시 멎게 하는 정도가 있을 뿐 능동적으로 제압하는 건 어렵죠.

그저 달려가다간 속 터지는 이동 속도에 열이 오를지도 모르겠는데요. 이런 이동 속도는 길 찾기, 물건 찾기라는 게임의 주요 목표를 달성하는 데도 방해가 됩니다.

▲ 문을 열였는데 괴물이 있다? 못 본척하고 바로 닫자

문이 쉽게 열리지 않는 것도 큰 단점입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컨트롤러와 팔을 움직여 직접 문고리를 잡아 문을 열어야 하는데 적당한 거리다 싶으면 팔이 짧아 손잡이에 팔이 닿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가까이 가면 몸에 바짝 붙은 손잡이를 잡기 어렵죠. 또 손잡이를 잡고 문을 활짝 여는 것도 몸에 막혀 잘 되지 않습니다.

수많은 문이 있는 거대 저택에서 시원하게 문 열고 들어간 적이 몇 번인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대개는 대충 문을 열기만 하고 몸으로 밀고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 상호작용이 가능하다는 점은 다행이라고 할까요?

▲ 답답해서 먼저 죽을 듯



크게 다루진 않았지만, WTOA는 어반 판타지의 전설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TRPG 시리즈 '월드 오브 다크니스'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굳이 이 세계관을 이해하고 있지 않더라도 게임을 즐기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요.

어쨌든 이런 탄탄한 월드를 공유하고 있으니 제작진도 단순히 공포 하나에 기댄 게임을 만들고 싶진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어려운 방향성을 가진 게임이 나온 걸 테고요.

만약 평소 공포 게임이라면 눈도 못 뜨는 게이머라면 공포 끝판왕 VR로 이야기를 즐기며 나름 적응해볼 기회가 될 겁니다. 약간은 허술한 게임플레이 시스템에 대해 하나하나 따지고 들지 않는다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