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7일, 블리자드의 전(前) CEO이자 개발자였던 '마이크 모하임(Michael "Mike" Morhaime)'과 블리자드의 계약이 종료된다. CEO직을 내려놓을 때 고문으로서 활동하겠다 했으나 1선에서는 물러난 셈이니 사실상 은퇴로 보는 시각이 맞다. 그가 개발자로서 업계에 첫발을 디디고 27년 만이다.

마이크 모하임 대표가 게이머와 국내외 게임업계에 끼친 영향력은 상당하다. 지난 수십년 간 블리자드가 수많은 게이머에게 최고의 게임사이던 시절에 그는 꾸준히 블리자드의 CEO로서 자리했다. 블리자드의 전신인 '실리콘&시냅스'의 창립부터, 블리자드의 3대 타이틀인 워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 시리즈가 첫 발을 디딜 때도 그는 블리자드의 CEO였다.

일반적으로 게임은 즐겨도 개발사의 대표는 잘 모르는 게이머들도, 마이크 모하임은 알았다. 해외 게임사 대표가 국내 방송 뉴스룸에 들어와 인터뷰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겠는가. 지금에 이르러, 그는 살아있는 전설에 가깝다. 그는 비디오게임의 태동기에 게임을 접했고, PC게임의 전성기를 CEO로 보냈으며, 자신도 수준급의 개발자로서 기술공학 에미 상과 AIAS 공로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7년의 재임 시절 동안 추문 하나 없이 원만하게 경력을 마무리했다.

지금부터 이어질 내용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사랑받은 개발자 중 한 명이자, 27년간 개발자로서 1선에서 일해온 인간 '마이크 모하임'에 대한 내용이며 동시에 그가 함께 했던 시절의 '블리자드'에 관한 글이다.

▲ JTBC 뉴스룸에서의 마이크 모하임


창립
스물 다섯의 마이크 모하임, '실리콘&시냅스'를 세우다.

마이크 모하임은 1967년 11월,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백발이 성성한 이미지와는 달리 사회인으로서는 아직 젊은 나이이며, 동갑내기 유명인으로는 배우 설경구, 밴드 오아시스의 노엘 겔러거 등이 있다. 그가 어렸을 때는 비디오 게임이 본격적으로 태동하던 1970년대 말~ 1980년대로, 당시 어린 마이크 모하임은 제한적 프로그래밍이 가능했던 콘솔인 '발리 아스트로케이드(Bally Astrocade)'를 구입해 간단한 게임을 개발하곤 했다.

나이가 들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마이크 모하임은 UCLA에 진학해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그 시절 만나게 된 '앨런 애드햄'과 함께 게임 개발사를 차리기로 했다. 둘은 졸업반이 되어서야 알게 된 '서먹서먹한 동문'이었지만, 일련의 계기로 친해진 후, 앨런 애드햄이 마이크 모하임을 설득하면서 본격적인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WD(Western Digital)에서 일하던 마이크 모하임이 퇴사한 후 같은 대학 출신인 '프랭크 피어스'가 합류하면서 1991년, '실리콘&시냅스'가 설립되었고, 이들의 계획은 실현으로 바뀌었다.

▲ 실리콘&시냅스 설립 초기, 20대의 마이크 모하임

▲ 지금의 스타트업 소규모 개발사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 마이크 모하임과 공동 창업자 '앨런 애드햄'

▲ 최초의 '실리콘&시냅스' 사무실

▲ 두번째 사무실이라고 딱히 더 좋아지진 않았다.


마이크 모하임이 할머니에게 1만 5,000달러(약 1,700만 원, 현재 환율 기준)를 빌려 설립한 '실리콘&시냅스'는 보드 게임을 유통하고, 기존 비디오 게임을 코모도어의 '아미가' 컴퓨터나 닌텐도의 '슈퍼 패미컴'으로 이식하는 외주 작업을 맡아 하는 작은 회사로 시작했다. 이들의 업무 패턴은 외주 작업을 진행하며 동시에 '로스트 바이킹'과 '락앤롤 레이싱'의 자체 개발을 병행하는 형태였다. 하지만 성과는 영 좋지 못했다.

PC 플랫폼인 '아미가'는 메인스트림을 장악하지 못했고, 콘솔은 오히려 컴퓨터 시장보다 더 쇠퇴하던 시기였다. 개발이 완료된 '로스트 바이킹'과 '락앤롤 레이싱'도 평은 좋았지만, 상업적인 흥행은 실패했기 때문에 '실리콘&시냅스'는 만성 적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자금이 넉넉지 않으니 마이크 모하임과 앨런 애드햄이 신용 카드 돌려막기를 해가며 직원 월급을 채워주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마이크 모하임은 지속해서 유능한 개발 인력을 모집했고,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도 이름을 떨치는 블리자드의 개발진들(샘와이즈 디디에, 조이레이 홀, 크리스 멧젠 등)이 합류했다.

▲ 넉넉하진 않았지만 늘 웃던 시절

▲ 잠에서 덜 깬 '빌 로퍼'가 보인다

▲ 인간 시절의 샘와이즈 디디에

▲ 점점 야성미 넘치게 변해간다

▲ 오늘날의 샘와이즈 디디에

▲ 시네마틱 엔지니어였던 닉 카펜터

▲ 시네마틱 부문 부사장을 역임한 후 본파이어 스튜디오로 이직했다.

경영난이 이어지자 '실리콘&시냅스'는 유럽의 사업 파트너인 '인터플레이' 산하의 스튜디오가 되는 것도 고려하게 되었다. 인터플레이의 창립자인 브라이언 파고(이 사람도 나름대로 전설적인 개발자로,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를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가 마이크 모하임과 개인적 친분이 있는 사이기도 했고, 꽤 큰 투자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플레이도 자금이 충분한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합병은 무산되었고, 94년에 이르러 교육 소프트웨어로 유명했던 '데이비슨&어소시에이츠'에 67만 5,000달러(약 7억 6,500만 원, 현재 환율 기준)를 받고 회사를 매각했다.

이어 사명을 '카오스 스튜디오'로 변경했으나, 같은 이름을 선점한 회사가 10만 달러(약 1억 1,300만 원, 현재 환율 기준)를 요구하자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로 또 한 번 이름을 바꿨다. 이 과정에서 마이크 모하임은 모회사가 된 '데이비슨&어소시에이츠'에 사내 문화를 존중할 것과 개발 과정의 독립성을 유지해 달라고 부탁했고, '데이비슨&어소시에이츠'의 밥 데이비슨, 잰 데이비슨 부부는 이를 수락했다. 덕분에 블리자드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초창기의 사내 문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카오스 스튜디오'라는 사명과 '블리자드'라는 사명에는 이들의 개발 철학이 어느정도 묻어난다. 앨런 애드햄과 마이크 모하임은 '카오스(혼돈)'라는 단어가 게임 개발이라는 과정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단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게임 개발 과정이 기본적으로 혼란스러우면서도, 이 모든 과정을 포용해야 한다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블리자드' 또한 같은 맥락이었다. 블리자드의 공동 창립자인 앨런 애드햄은 이렇게 말했다.


"'카오스'라는 이름은 게임 개발 과정이 기본적으로 혼란스럽고 이 과정을 포용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믿음을 대표했죠. 하지만 사용 정지 명령을 받아 이 이름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니, 동일한 기본 철학을 나타내는 눈보라, 즉 블리자드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죠. 눈보라는 강력함, 혼돈의 힘, 분노를 모두 담고 있지만, 사실 지나간 뒤 아름다운 자취를 남기는 꽤 아름다운 것이죠."
-Allen Adham (스타크래프트 개발 회고록 中)-



▲ 당시 입사자들의 첫 업무는 본인의 책상을 조립하는 것이었다.

▲ '카오스'의 의미는 혼돈을 수용해야 한다는 뜻

▲ 사내 분위기도 카오스

▲ 점심 시간에도 카오스(...)

▲ 세 번째 사무실. 전보다는 조금 더 커졌다.

▲ 네 번째 사무실. 이전이 꽤 잦은 편이었다.


성장
워크래프트, 디아블로, 스타크래프트. '블리자드 3대 기둥'의 완성

동시에, 92년부터 진행하던 프로젝트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992년, 마이크 모하임은 웨스트우드가 개발한 '듄2'에서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의 잠재력을 눈치챘다. 그래서 개발에 들어간 게임이 바로 '워크래프트: 오크와 인간'. 마이크 모하임은 '워크래프트'의 네트워크 프로그래머로 활동했고, 이 과정에서 '온라인 플레이'에 대한 이해를 쌓았다. 동시에 워크래프트가 개발되면서, 현재 블리자드의 간판이라 할 수 있는 '시네마틱 부서'도 함께 마련되었다.

90년대 초-중반은 이제야 막 '멀티 플레이'라는 개념이 도입될 때였다. 이를 크게 부흥시켰던 게임은 '이드 소프트웨어'의 '둠'이었고, 블리자드는 이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오늘날에 이르러, 블리자드가 다양한 온라인 게임을 서비스할 수 있는 노하우가 이 시점부터 쌓였다. 워크래프트 개발 과정에서 네트워크 게임에 눈을 뜬 마이크 모하임은 다음 프로젝트인 '디아블로'에서 이를 폭발시켰다.

디아블로는 '콘도르 스튜디오'를 합병해 '블리자드 노스'로 개명한 후 개발되었다. '콘도르 스튜디오'와의 합병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콘도르 스튜디오는 '데이비드 브레빅'과 '막스, 에릭 셰퍼' 형제가 1993년 창업한 개발사로 '저스티스 리그 태스크포스'의 콘솔 이식판을 개발해 게임쇼에 출품했다. 그리고 거기서, 똑같은 게임을 똑같이 이식한 '실리콘&시냅스'를 만나 안면을 트게 되었다. 이후 콘도르는 디아블로를 개발하고자 했으나 개발비 투자를 받지 못해 난항을 겪던 상황에서 블리자드가 손을 내밀었고, 디아블로를 '실시간 액션'으로 바꾸는 대격변을 이뤄내며 게임을 만들어냈다.

마이크 모하임은 디아블로에 클라이언트 프로그래머로 참여했고, 네트워크 게이밍을 더욱 파고들어 '배틀넷'을 만들어냈다. 종전의 네트워크 게이밍 방식은 IP를 직접 입력해야 했으나, 이를 인터페이스화해 접근성을 대폭 높인 것이다. 문제는 이 '배틀넷'을 서비스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자금난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배틀넷은 기본적으로 무료 서비스였고, 블리자드는 배틀넷의 유지 보수에 필요한 인력을 추가로 유지해야 했다. 이와 같은 프로세스는 적자로 이어졌고, 블리자드는 더 큰 자금을 지닌 회사인 '비벤디'의 자회사로 편입되었다. 차후 비벤디 게임즈는 2007년에 이르러 '액티비전'과 합병했고, 오늘날의 게임업계 공룡인 '액티비전-블리자드'는 그 때부터 만들어졌다.

▲ 최초의 시네마틱 부서와 '조이레이 홀(Joeyray Hall)'

▲ '콘도르 스튜디오'가 주축이 된 '블리자드 노스'의 인원들

▲ 콘도르 스튜디오의 공동 창립자이자 '디아블로'를 최초로 구상한 '데이비드 브레빅'

▲ 오늘날의 데이비드 브레빅은 연륜이 엄청나게 묻었다.

▲ 블리자드의 다섯 번째 사무실

워크래프트에서 디아블로까지, 블리자드는 2타석 연속 홈런을 터뜨렸다. 하지만 당시 게임계에는 블리자드보다 명성이 높은 개발사들도 존재했다. 그 중 하나가 '웨스트우드'였다. 지금은 EA에 인수당한 후 사라졌지만, 당시 웨스트우드는 RTS 분야에서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내는 개발사였는데, 당장 워크래프트의 모티브가 되었던 '듄2'를 비롯해 '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로 주가를 올리던 상황이었다.

95년 출시된 '워크래프트2'에서 듄2의 아류작이란 이야기가 쏙 들어갈 정도로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블리자드는 웨스트우드와 정면 대결을 하기는 힘들었다. '스타크래프트'는 그런 상황에 따라 기획되었다. 초기에는 워크래프트의 개념을 그대로 우주로 가져가는 기획이었고, 96년도 E3에 첫 선을 보였지만, '워크래프트'와 다르지 않다는 혹평만을 들었다.

1996년 E3에서 블리자드가 스타크래프트를 대중에 처음 선보였을 때... (중략) 기자들은 그다지 감명을 받지 않았고, 스타크래프트의 초기 빌드가 워크래프트2와 비슷하다고 빈정대며 "우주 오크"라는 딱지를 붙였습니다. -Samwise Didier (스타크래프트 개발 회고록 中)-

E3의 충격 때문인지 스타크래프트는 블리자드의 프로젝트 중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되었다. 당시 기술 감독이었던 밥 피치는 "한 명 한 명 스타크래프트 팀에서 디아블로 팀으로 이동했죠. 저만 남을 때까지 모두요."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덕분에 시간이 여유있었던 스타크래프트 프로젝트는 전체 게임 엔진을 처음부터 다시 구축했으며 3D 그래픽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블리자드는 모델을 한 픽셀 한 픽셀 손으로 그리던 시절이었다. 디디에와 다른 아티스트들이 3D를 활용하는 실험을 하면서 스타크래프트의 모습이 점점 갖춰지기 시작했다.

▲샘 와이즈 디디에가 그린 저글링 컨셉 아트

마이크 모하임 또한 이 개발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 그는 유닛의 액션과 아트, 애니메이션 구현에 직접 참여했고,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자원 채취의 제어 코드를 직접 만들었다. 또한, 게임 내 치트 코드도 마이크 모하임이 직접 만들었다.

이 재개발 과정은 그 과정만으로도 전설적인데, 기술 감독인 '밥 피치'가 두 달에 거쳐 엔진을 새로 개발하고, 시나리오를 다시 썼으며, 2 종족을 3 종족으로 확장하는 한편, 종족별 장단점을 부여했다. 마이크 모하임은 이 과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스타크래프트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모든 팀원이 죽을 힘까지 다해서 만든 게임이었죠. 스타크래프트를 개발할 때는, 정말 온 세상을 짊어진 기분이었습니다. 게임을 완성할 수 있다는 보장 같은 건 전혀 없었죠." -Mike Morhaime (스타크래프트 개발 회고록 中)-


스타크래프트의 개발에는 앞서 말한 '혼돈'과 가까운 자발적 혁신이 이뤄졌다. 테란의 유닛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조이레이 홀'은 시네마틱 영상을 만들기 시작했고, 애니메이터들은 장면을 만들어 끌어모은 후, 캐릭터와 주제를 즉흥적으로 생각했다. 현재 선임 작곡가로 일하고 있는 '글렌 스태퍼드'는 마이크에 대고 저그의 음향을 연기했으며, 사내 직원들이 만든 밴드 음악을 시네마틱 도입부 음악으로 넣어버렸다.

사실상 게임 이름 외에 모든 것이 바뀐 이 작업에는 8개월이 걸렸으며, 스타크래프트의 정체성이 되는 중심 시스템은 출시 4개월 전까지도 구현된 바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1998년, 스타크래프트는 대중 앞에 첫선을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말 그대로 폭발했다. 블리자드 직원들은 이 엄청난 반응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고, 밥 피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10만 장만 팔려도 좋을 거라 생각했건만, 게임은 이미 수백만 장의 판매고를 넘어서고 있었다.

▲ 영 좋지 못했던 알파 버전의 스타크래프트

▲ 북부의 왕 시절의 마이크 모하임

스타크래프트가 공전의 히트를 하면서 블리자드는 더는 웨스트우드를 의식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웨스트우드가 공들여 준비한 RPG인 '녹스'마저 '디아블로2'와 맞붙어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이쯤 되어 마이크 모하임은 회사 경영 외에도 자신의 원래 전공인 게임 개발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마이크 모하임은 단순히 블리자드의 경영에만 전념하지 않았다.

그는 '디아블로2', '워크래프트3',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개발에서 선임 프로듀서 역을 맡았고, 이 게임들의 개발 과정에서 마이크 모하임이 중점을 둔 것은 '온라인 플레이' 였다. 이렇듯 대규모 온라인 게임 개발에 공로한 바를 인정받아 그는 2008년, 'AIAS(Academy of Interactive Arts & Sciences Interactive Achievement Awards)의 공로상을 받아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고, 같은 해 '월드오브워크래프트'로 기술공학 에미 상까지 받았다. 지금까지 이 두 개의 상을 공동 수상한 개발자는 단 두 명으로, 마이크 모하임과 '존 카맥(둠 시리즈의 개발자)'뿐이다. 2000년대 후반에 이르러,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개발자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었다.

▲ '롭 팔도'와 공동창업자 '프랭크 피어스'

▲ 이제는 어엿한 개발사가 된 블리자드의 세 공동 창업자. 좌측부터 '앨런 애드햄', '마이크 모하임', '프랭크 피어스'

▲ 스타크래프트의 성공 후, 여섯 번째 사옥은 직접 지어 올렸다.

▲ AIAS 홈페이지에 특별상으로 기록된 '마이크 모하임'


철학
Embrace your inner 'Geek', 내면의 '괴짜'를 수용하라

마이크 모하임이 강조한 블리자드의 핵심 가치인 '내면의 괴짜를 수용하라'는 그의 경영관과 그간 블리자드가 보여온 철학을 정확히 나타낸다. Geek은 'IT 기술이나 계열에 정통한 괴짜'를 일컫는 속어인데,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Nerd'와 비교하자면 'Geek'은 보다 큰 실행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나타낸다. 최근 한국 문화에 맞춰 풀이하면 '행동하는 덕후'정도가 되겠다.

마이크 모하임은 블리자드를 경영하는 지난 27년간, 단 한 번도 개발자들에게 '회사의 직원'이나 '사회인', '어른'으로서의 모습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블리자드의 직원들이 게임을 사랑하고, 게임이라는 미디어 자체에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으며, 그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과 미디어에 대해 장시간 토론을 나누는 것을 바람직한 과정이라 생각했다. 2000년대 후반에 이르면서 그는 일선 개발에서 손을 떼고 거대해진 회사의 경영에 전념했으며, 자신보다 젊은 감각을 가진 개발자들의 작업에 간섭하지 않았다. 개발자들이 자유롭게 개발을 이어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 것이다.

오랜 기간 게이머들이 '블리자드'라는 게임사에 거부감을 가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이유다. 블리자드는 내적으로 모든 구성원이 게임을 비롯한 대중문화에 정통한 'Geek'이었으며,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는 것을 감추지 않았고, 동시에 자신들이 만든 콘텐츠를 소비하는 게이머들과 동등한 위치의 게이머였다. 실제로 마이크 모하임도 꽤 수준 높은 게이머이며, 하스스톤 마스터스 코리아 시즌4 이벤트전에 출전해 좋은 플레이를 보이며 승리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사내 문화에는 팀 이동의 자유로움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이크 모하임은 회사 구성원들이 자신의 의사에 따라 타 직군의 업무를 배우거나 직군을 이동하는 것에 대해 관여하지 않았는데, 한국에도 알려진 네임드 기획자인 '크리스 멧젠'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일러스트레이터로 블리자드에 합류했다가 '워크래프트2'부터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 이후 블리자드 내 거의 모든 프렌차이즈의 세계관을 구상해냈다.

직원들부터 게임과 블리자드의 세계관을 좋아하고, 애착을 가지다 보니 블리자드는 근속 년수에 따른 기념 선물도 다른 회사와는 꽤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블리자드 직원으로 2년을 일하면 기념 맥주 컵을 얻을 수 있고, 5년째엔 매년 디자인이 바뀌는 실물 크기의 도검, 10년 근속은 방패, 15년에는 반지를 얻을 수 있으며 20년을 일하면 기념 투구를 선물한다.

사내문화가 게임과 미디어 콘텐츠를 기반으로 꾸려지다 보니 직원들의 소모임 활동도 굉장히 적극 이뤄졌다. 대표적인 예로는 일러스트레이터 그룹인 '폭풍의 후예들(Sons of the Storm)', 사내 밴드인 '엘리트 타우렌 족장들(Elite Tauren Chieftain, ETC)'이 있는데, 마이크 모하임은 ETC에서 베이시스트를 맡고 있다. 이렇듯 개발사가 '잘 놀고 즐거운 상태'로 개발을 이어가니 게이머 층의 응원도 더욱 커졌다. 개발사가 신이 나야 게임이 잘 나온다는 것을 게이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 하스스톤 마스터즈 코리아 시즌4에 한국을 찾은 마이크 모하임

▲ 이기고 피자도 쏘고 갔다. 피자는 역시 파파XX

▲ 블리자드 세계관의 대부분을 만든 '크리스 멧젠'

▲ 블리자드만의 근속 기념품. 도검은 매년 디자인이 바뀐다.

▲ ETC 공연에서 베이스를 연주하는 마이크 모하임, 뒤에 있는 드러머는 그 유명한 '앨런 다비리'다

이런 마이크 모하임의 자유분방한 경영 철학은 곧 게임의 완성도로 나타났다. 블리자드의 직원들은 '노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게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진 이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게임을 만드는 과정 또한 허투루 만들어질 수가 없었다. 중대한 디자인 결점이 발생해 차후 통으로 수정하는 일은 있었지만, 적어도 게임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출시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뜻이다. 앞서 말한 '스타크래프트'또한 투자자들의 압력이 있었지만, 마이크 모하임은 게임 개발이 완료될 때까지 게임을 내놓지 않았다.

물론 이와 같은 개발 철학이 누구에게나 반가운 건 아니었다. 게임 개발이 완료될 때까지 출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어쩔수 없는 변수 때문에 개발이 미뤄질 경우 출시 일자가 미뤄진다는 뜻과 같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블리자드의 작품들은 출시 지연이 꽤 잦게 이뤄졌고, 이는 'Blizzard Soon'이라는 밈이 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같은 철학 때문에 개발이 엎어진 게임도 꽤 있다. 먼저 떠오르는 게임으로는 블리자드의 새 MMORPG가 될 것으로 기대되던 '타이탄'이 있다. 타이탄의 경우 개발 과정에 이미 프로젝트명이 유출되었고, 굉장히 많은 팬들의 기대를 받던 게임이지만 개발 난항이 지속되자 마이크 모하임은 과감히 프로젝트를 엎어버렸다. '타이탄'의 개발 잔재는 가장 최근에 선보인 신규 IP인 '오버워치'로 녹아들었다.

'스타크래프트: 고스트'도 마찬가지의 사례다. '스타크래프트: 고스트'는 콘솔용 액션 어드벤처 게임으로 기획되었고 게임 플레이 영상까지 공개되었지만, 차세대 콘솔의 출시와 개발 협약 파기 등의 이유로 게임 완성이 요원해지자 과감히 프로젝트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스타크래프트: 고스트'의 주인공인 '노바 테라'는 스타크래프트2에 출연하게 되었다.

▲폐기된 StarCraft: Ghost 프로젝트

하지만, 마이크 모하임 '불완전한 게임'을 출시하는 것 보다 조금 늦더라도 완벽한 게임을 내놓는 것이 게이머의 신뢰를 덜 잃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게이머'층의 목소리에 굉장히 민감해 늘 게이머 층과의 소통 창구를 열어둔 채 생활했는데, 본인에게 오는 이메일은 아무리 간단한 것이라도 무조건 전부 다 읽어보았다. 심지어 국외에서 외국어로 메일이 와도 통역을 통해 내용을 확인했다. 실제로 SNS를 통해 직접 게이머에게 댓글을 달아주는 것도 심심찮게 목격되었을 정도였다.

동시에, 그는 블리자드의 게임이 만들어내는 생태계에도 굉장히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가 발표되었을 때, 마이크 모하임은 한국에서 처음 e스포츠를 관람했던 1999년의 이야기를 꺼냈다. 마이크 모하임은 이 날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단언컨대 그런 장면은 처음 봤어요. 저희 게임, 저희가 만든 게임을 그렇게 높은 수준으로 플레이하는 것과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시청자까지도 너무나 멋있었죠." -Mike Morhaime (스타크래프트 개발 회고록 中, 한국 스타크래프트 브루드워 200만장 판매 축하 행사에 참석한 마이크 모하임 대표의 당시 심경)-


블리자드가 한국을 중요한 시장으로 여기고, 한국 게이머들과 친숙한 기업이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마이크 모하임은 이 경험에서 플레이어들이 자신들이 만든 게임을 얼마나 열정적으로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그 게임이 만들어내는 생태계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거대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런 경험을 보여준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 크게 감동했고, 이후 한국에 대한 끝없는 관심과 지원을 드러냈다.

그 단적인 예가 '블리자드 월드와이드 인비테이셔널(BWWI)'이다. BWWI는 2004년부터 2005년을 건너뛰고 총 네 번 진행되었는데, 이중 한 번을 제외한 세 번의 행사가 한국에서 진행되었다. 2007년 열린 BWWI에서는 '스타크래프트2'를 전 세계 최초로 공개하기도 했으며, 이후 10여년이 지나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또한 한국에서 최초 공개했다.

마이크 모하임의 경영관은 매우 복합적이기에 한 문장으로 나타내기 쉽지 않지만, 굳이 정리하자면 '끝까지 게이머의 유전자를 가진 CEO'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게이머의 처지에서 생각했고, 게이머를 찾아갔으며, 게이머를 위한 행동을 이어왔다. 심심찮게 한국에 방문해 피자를 쏘고 가는가 하면, 2.0 패치를 기준으로 '디아블로3'의 수익모델을 폐쇄해버렸고, 국내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게임업계와 게임, 그리고 삶에 대한 견해를 막힘없이 풀어냈다. 개발자이자 CEO로서의 자아가 강해지면서 '게이머'로서의 자아를 잃었다면 나올 수 없는 모습들이었다.

경영 외적으로도 그는 매우 원만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가 자신을 표현하는 문장은 'All Around Good Guy'. 말 그대로 두루두루 원만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재임 동안 단 한 번도 불편한 이슈를 만들어낸 적이 없고, 게이머들의 신뢰를 잃을 망언도 한 적이 없으며, 매사에 신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많은 스타 개발자들이 자만하거나, 과격하거나, 혹은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이며 잊힌 것과는 대비적이다.

▲ 언제나 웃는 모습을 보여주던 마이크 모하임

▲ 모나지 않은 리더쉽이 그의 매력이었다.

▲ 2007년, BWWI 당시

▲ Swag

▲ 어느덧 최정상급의 개발사가 되었을 무렵


전설
27년의 여정, '업계의 전설'이 되다.

마이크 모하임은 은퇴한다. 고문이라는 역할로 블리자드와 끈을 이어가겠지만 그의 역할은 이제 실행이 아닌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 그가 은퇴를 발표한 2018년 후반기부터, 블리자드는 꽤 험난한 길을 가고 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는 전부 다 알 수가 없지만, 블리자드의 코어 게이머들은 아마 은연중에 '지금의 블리자드는 예전과 다르구나' 라고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상황이 어떻든 과거의 위업이 퇴색되지는 않는다. 마이크 모하임은 블리자드의 전신인 '실리콘&시냅스'를 창립했고, 27년 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배의 크기가 돛단배에서 타이타닉급 여객선이 되었음에도, 선장의 운항 솜씨는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동안, 블리자드가 진정 게이머의 옆에 서는 개발사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이크 모하임의 철학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앞으로의 블리자드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역사 속 수많은 위인들도 나라를 세우고, 회사를 세웠지만, 그들이 떠나고 난 후 남은 집단은 이후의 사람들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실리콘&시냅스'를 설립한 후, 27년 간 이어오면서 만든 명작들과 그의 개발 철학이 퇴색되는 일은 없을 테다. 시간이 지난다 해도 그가 블리자드의 CEO로 재임했던 동안, 게이머들이 느꼈던 즐거움은 잊혀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마이크 모하임도 마찬가지다. 세월이 지난 후 그를 지켜볼 때, 그때의 그가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와 그의 직원들이 만든 게임과 문화는 기록 속에 남아있을 테고, 블리자드의 CEO로서 재임했던 '27년 간의 마이크 모하임'은 게이머와 게임업계 사이에서 '전설'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마사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