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前) 오버워치 사령관이었던 잭 모리슨은 6시가 넘도록 지브롤터 사무실 한 구석 자기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무슨 잔업이 남은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멍청하니 그저 앉아있는 것이었다. 마치 오늘 경쟁전에서 조금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던 화물처럼.

"잭 선생님은 안 나가세요?"
이제 청소를 해야 할테니 그만 나가달라는 윈스턴의 말에 잭 모리슨, 솔저:76는
"나가야지." 하품같은 대답을 하며 문을 나섰다.

길을 나서 저만치 골목 막다른 곳에 오자, 누런 시멘트를 누덕누덕 기워붙인 집이 보였다. 솔저:76는 때에 절어서 마치 가죽끈처럼 된 헝겊이 달린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비틀어진 문 틈으로 아나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가자! 가자!"
미치면 목소리마저 변하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이미 아나의 조용하고 부드럽던 그 목소리가 아니고, 쨍쨍하고 간사한 게 어떤 딴 사람의 목소리였다. 방 구석에 앉아 있던 메르시가 슬그머니 일어서 솔저:76의 앞을 지나 부엌으로 나갔다. 분명 벙어리는 아닌데 메르시는 말이 없었다.

"아저씨."
솔저:76는 누가 쿡 쥐어박기나 한 것처럼 움찔했다. 바로 옆에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파리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솔저:76를 쳐다보고 있었다. 웃어 보이려는 솔저:76의 얼굴이 도리어 흉하게 일그러졌다.
"나, 라인하르트 할아버지가 스킨 사 준댔다."
"응."
"그리고 스프레이도 막 줄 거라구 했다."
'응."
"그럼 나 메르시 언니랑 지브롤터 구경 간다."
"......" 가엾은 것. 솔저:76는 마지막 말을 차마 뱉을 수 없었다. 측은한 눈길로 파리하를 바라보는 솔저:76의 감상은 아나의 날카로운 고함소리에 또 한 번 깨져버렸다.
"가자!"


가자는 것이다. 앞으로 가자는 것이다. 나노 강화제를 투여할테니 앞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정신 이상이 생기기 전부터 아나가 입버릇처럼 되풀이하던 말이었다. 화물. 그것의 중요성을 아무리 설파해도 늙은 아나에게만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난 모르겠다. 암만해도 난 모르겠다. 화물. 그래 거기에 우리 행동에 제약을 걸고 시키는 것만 하라는 것이냐 어쩌란 것이냐. FPS에서 킬을 따겠다는데 그래 막는 놈들이 대체 누구란 말이냐." 지더라도 킬을 따고 지겠다는 아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주저앉곤 했다.
그런 아나에게 우리가 화물이라도 미니까 이러고 살지, 그러지도 못하면 구석에 찌그러진 메이처럼 평생 잊혀질 뿐이라고 설득을 해도 공염불이었다.

솔저:76는 담배를 태우러 옥상에 올라갔다.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이 지옥같은 나날을 견뎌낼 정신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을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의 소총은 어느 순간 약해졌다. 총구가 예전처럼 통 말을 듣지 않는다. 그것 뿐인가. 평범. 몰개성. 솔저:76에게 늘 따라붙는 꼬리표였다. 아무리 활약을 해도, 아무리 화물을 열심히 밀어도 누구 하나 그를 알아주는 이 없었다.

"가자!"
아나의 저주같은 목소리가 아래층에서부터 울려왔다. 그렇다. 이것은 저주다. 맥크리, 그놈이 내린 저주. 맥크리가 살아날 때 솔저:76는 바늘 가는 데 실 따라오듯 주저앉았다. 지금도 세상은 맥크리에게 지배당하고 있다. 원거리, 근거리 무엇 하나 솔저:76가 맥크리에게 앞서는 구석이 없었다. 전술 조준경? 그래, 상대가 다 맞아주고만 있으면 그보다 좋을 수 없겠지. 하지만 개활지에서의 파괴력은 황야의 무법자가 더 무서웠다.


솔저:76가 가진 장점이라면 꾸준한 장거리 화력이었지만 이젠 그것 하나만으로 통하는 시대가 지나버렸다. 솔저:76은 겐지나 트레이서같은 신출귀몰함도, 리퍼같은 막강한 근접 화력도, 파라같은 공중 포격도 가질 수 없었다. 평범하게 접근해 평범하게 총을 갈겨대기를 반복해온 외곬수 인생, 시대는 정녕 그런 솔저:76의 한결같음을 저버린단 말인가? 솔저:76는 왼편의 허리춤에 있는 히오스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맥크리와 자신을 차별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 그러나 솔저:76가 그저 맥크리의 하위 호환에 지나지 않게 된 지금, 히오스탄은 길을 잃었다.

'설마 이보다 더 나쁜 일이 일어나진 않겠지.' 솔저:76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쓰린 속을 달랬다.
"가자!"



"... 지금 뭐랬지?" 솔저:76은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도라도로 출격하기 전, 솔저:76는 메르시의 얼굴이라도 한 번 보기 위해 그녀가 일하는 병동에 들렀다. 그러나 어디서도 활짝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반겨주는 메르시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접해야 했다.

"그게... 치글러 박사님이 맥크리 씨와 함께 야반 도주를 하셨..." 솔저:76의 귀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언제나 화물이 꿈쩍하지 않아도 웃으며 팀원들을 다독이던 메르시였다. 정신을 잃은 아나가 매번 같은 소리만을 반복해도 군말없이 수발을 들어주고, 때때로 치유가 늦어 치명상을 입은 누군가가 불평을 토로하면 연신 사과의 말을 건네던 이가 메르시였다. 비록 아군에 아나나 솔저:76, 한조가 가득해 늘 패배를 하더라도 메르시는 승패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메르시 역시 승리를 갈망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다만 그녀가 웃은 까닭은 팀원들의 불화를 앞장서서 메우기 위함이었으나, 모두는 그런 메르시를 그저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 일쑤였다. 메르시가 자신에게 승리를 안겨줄 수 있는 남자와 눈이 맞아버린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솔저:76가 이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늦은 밤, 솔저:76는 낡은 주점에서 몇 병째 술을 들이키며 자신을 더욱더 깊은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얼큰하게 취기가 올라오자 잠시나마 밀려오는 고통이 줄어든 기분이었다.
'아저씨, 영웅 맞죠?' 도라도에서 구해줬던 한 소녀가 했던 질문이 알딸딸한 정신 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자신이 했던 대답도.
'이젠 아냐...' 그래, 이젠 아냐. 영웅은 무슨. 능력이 없어 여자나 뺏기는 영웅이 세상에 어디있단 말인가. 그는 영웅이 되지 못했다. 솔저:76는 라인하르트처럼 모두를 든든하게 지켜줄 방벽도, 메르시처럼 쓰러진 이를 한꺼번에 일으켜세울 구원자의 면모도 없었다. 게다가 맥크리처럼...

맥크리에 생각이 닿자 솔저:76는 우직한 팔로 거칠게 테이블을 휘저었다. 빈 병이 처량하게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서 산산조각났다. 자리를 박차고 나온 솔저:76는 택시를 잡고 던져지듯이 좌석에 쓰러졌다.
"어디로 가시죠?" 택시는 벌써 구르고 있었다.
"지브롤터." 택시는 속력을 늦췄다. 지브롤터로 가려면 U턴을 해야하는 까닭이었다. 운전수가 핸들을 비틀어 쥐자 솔저:76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 순간 그가 다시 외쳤다.
"아니야. A병원으로 가." 솔저:76는 갑자기 메르시를 떠올렸던 것이다. 운전수는 다시 핸들을 틀었다. 운전수 옆에 앉았던 조수가 한 번 솔저:76를 돌아보았다.


솔저:76는 뒷자리 한 구석에 가서 몸을 틀어박은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때 또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아니야. 도라도로 가." 메르시는 이미 떠나고 없다는 냉정한 사실이 솔저:76를 베었다. 이번에는 차의 방향을 바꿀 필요가 없었다.
"도라도입니다, 손님." 조수가 몸을 틀어 돌리며 말했다.

"가자." 솔저:76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어디로 갑니까?"
"글쎄, 가."
"하, 참 딱한 아저씨네."
"......"
"취했나?" 운전수가 조수를 쳐다보았다.
"그런가 봐요."
"어쩌다 히오스탄 같은 손님이 걸렸어. 자기 갈 곳도 모르게." 운전수는 기어를 넣으며 중얼거렸다. 솔저:76는 서서히 잠이 들어가는 것 같은 와중에 그들의 말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공격수 구실, 화물 운반 구실, 팀장 구실, 오버워치 구실, 할 구실이 많구나. 확실히 난 아마도 오버워치의 히오스탄인지도 모른다. 정말 갈 곳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나는 지금 어디건 가긴 가야 한다...

"가자." 솔저:76는 또 한 번 귓가에 아나의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며 의식을 잃고 말았다. 빨간 불에 택시가 멈추가 조수가 다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디로 가시죠?" 그러나 머리를 푹 앞으로 숙인 솔저:76는 말이 없었다. 신호가 바뀌고 택시는 행선지도 모른 채 다른 차들의 대열에 섞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솔저:76는 꿈 속에서 지브롤터의 화물에 x6이 뜨며 빠르게 빠르게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냉정하게도 화물이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잠시나마 현실을 벗어난 솔저:76의 마음을 더 상처입히지 못했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