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마스터 트레이서 원챔

이것은 지난 몇개월 간 옆집 좆망겜에서 내가 가지고 있던 칭호이다. 나는 게임을 썩 잘한다고 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못하는 축은 안 되었다.
아주 잠깐은 파란색의 번쩍거리는 마크를 가진 적도 있었다. 496등. 비록 그 영광은 3시간 후에 사라졌지만, ‘그래도 나정도면 게임 좀 하지’라는 생각을 가지기엔 충분했다.

좆X워치에 심한 회의감을 느낀 최근, 나는 알파테스트와 클로즈베타 이후 봉인해둔 히오스 계정을 꺼냈다. 알파 당시 40레벨이었던 나는 패치 때문인지 400에 육박하는 레벨이 되어있었고, 영웅 목록의 최상단에는 금빛으로 번쩍이는 세 개의 캐릭터가 있었다. 머키, 아바투르, 노바.

‘마스터 머키’ 스킨을 갖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지난 날의 추억에 잠시 잠긴 이후, 나는 바뀐 수집품들과 전리품상자를 구경하다가 홀린듯 트레이서를 구매했다. 쓰레기같은 무빙과 포지셔닝에도 불구하고 씹X워치에서 내가 상위 티어를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은 에이밍 때문이었으나, 히오스에서 에이밍은 아바투르의 싸대기딜만큼이나 미미한 존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다. 실은 핑계고, 나는 그저 트레이서가 좋았다.

히오스를 꾸준히 플레이해온 지인과 그룹을 맺고 빠른대전으로 7레벨을 찍는 동안 나는 꽤나 칭찬을 들었다. 물론 역행 쿨이 생각보다 너무 길었던 탓에 적응기가 필요하기도 했으나, 기본적인 운영법과 포지셔닝은 큰 차이가 없는 듯했다. 같이 게임을 하는 지인 뿐만 아니라 무작위로 만난 빠른대전 팀원 조차도 ‘트레 잘하네’라는 칭찬을 건낼 때면,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등급전에 입성한다.

X버워치의 적폐다운 딜러충답게 나는 픽창에서 트레이서를 찍어둔 채 팀원 채팅을 모두 차단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아하게도, 그 누구도 내게 픽을 바꾸라거나 딜러를 양보해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새로운 게임문화에 깊은 감명을 느꼈고, 아직 한국 게임계에는 희망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게임이 로딩되는 동안 초상화 옆에 써있는 마크가 생소했지만, 나는 그것이 어떤 등급이거나 레벨이겠거니 했다.

게임은 순조로웠다. 물론, 새로운 캐릭터와 메타에 익숙치 못한 내가 실수를 하기도 했고, 채금인 새끼들에겐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기도 했다. 그러나 빠대를 하면서 가장 나를 빡치게 만들고, 심지어 마우스 버튼에 홀드키를 옮기게 만든 겐지가 필밴인 상태에서는 딱히 카운터를 느끼지 못했다. 8승 2패. 꽤나 준수한 성적이 아닌가.

25레벨 새 계정으로 경쟁전 배치를 본 직후, 굳이 점수를 보지 않아도 백의자리까지 맞출 수 있는 개고인물 새끼답게 나는 나의 배치 점수를 예상했다. 다이아 쯤은 나오지 않을까,하는 작은 기대와 함께, 감은 눈을 뜬다. 금색. 아니, 이것은, 이건 아무리 봐도 동색이다. 뭘까. 이 숫자 1은. 아, 옆동네 분식겜을 하는 친구들에게 들어본 적이 있는 것같다. 조합하지면, 그거였다. 브론즈1.

“아니 씨X”
실제로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나는 밀려오는 충격을 잠시 뒤로 한 채 최대한 이 상황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몇 가지 가정을 생각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나는 어떤 기억을 생각해냈다.

베타 때였다. (알파일 수도 있다)
등급전이 처음 나왔던 당시엔 팀리그 개념이 없는 상태였다. 나는 지인들과 함께 5인 풀파티를 완성하여 등급전을 주로 플레이했는데, 그 당시 5인큐라하면 으레 프로 준비생들을 만나곤 했다. AOS 경험이 일천했던 우리 다섯명은, 준프로들에겐 그저 잠깐의 휴식같은 큐였으리라. 더군다나 당시 나의 픽은 머키, 아바투르, 노바로 고정되어 있었으니 오죽했을까. (아직까지도 프로생활을 하고있는 그들은, 마치 분식겜의 ‘페이X’같은 존재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결국 우리의 등급전은 초반 몇 게임 승리 이후에 약 25연패로 마무리되었고, 나는 잠깐의 게임 휴식기를 가진 후 X버워치로 노선을 갈아타게 된다.

이 가정에 거의 확신을 가지고 나는 알파때부터 게임을 계속한 히창, 아니 ‘히오스 그랜드마스터’ 지인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마님]에게 귓속말 : 히오스 mmr 소프트 리셋임?
[그마님]의 귓속말 : ㅇㅇ
[그마님]에게 귓속말 : 클베 mmr도?
[그마님]의 귓속말 : ㅇㅇ ㅋㅋㅋㅋㅋㅋ
[그마님]에게 귓속말 : 씨X 이런 X망겜을 봤나

이성을 되찾기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랬다. 내가 히오스 트레를 꽤 잘한다고 느꼈던 건, 만났던 이들이 모두 브론즈였기 때문이었다. 종종 보였던 은색의 테두리는 다이아도, 플레티넘도 아닌 ‘갓 실버’였던 것을 왜 그때는 깨닫지 못했을까?
마음을 간신히 추스른 후엔, 한 가지 다짐이 생겼다. 반드시 트레이서로 점수를 올리겠다는 거였다. 카스트X망겜을 경험해온 나는 ‘브론즈’, 그것도 레벨이 꽤 있는 ‘브론즈’가 게임에서 어떠한 취급을 당하는지 너무도 잘 알았다. 금장 골드도 아닌 플장 브론즈가 꼭 내 꼴인 것이다.

내가 이 다짐을 뭇 지인들에게 선포하자 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 게임은 심해에서 못올려요’
그러나 나는 이것이 참으로 허황된 말이라 생각한다. 무릇 실력이 있으면 점수가 올라가기 마련이며, 딜러는 더욱 그러하다. 팀원 탓을 하는 것은 자기의 부족한 실력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 뿐이 아니겠는가? ‘팀빨겜이라 점수가 안올라요’라고 구슬피 울던 브실골플다 친구들에게 나는 얼마나 모진 말을 해왔던가?
그러나 나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모든 지인들은 난색을 표했다. ‘이 게임은 안 돼요’

그럼에도, 나는 브론즈 탈출을 꿈꾸며 오늘부터 모험을 시작한다. 과연 내 꿈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