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서버] <운상지성> 설의문파 설정 (1)

피가 응결되어 나비의 날개를 묶고, 빛의 그림자를 정련하여 눈옷(설의)으로 갈아입는다.



1. 운석편

[714년]
이융기가 28세 때 큰 운석이 서북쪽에 떨어져 있고 그 밖에 중원, 동쪽 모두 떨어졌다.
유리꽃 씨앗은 운석을 따라 떨어졌다.

[715년]
중원 운석 조각은 방사능이 비교적 약하고, 운염 조각으로 각종 신병을 제작하며, 외곽 부분은 천망석이라 불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720년]
이융기는 서북쪽 주석을 탐사하도록 파견하였고,  서북쪽 방사능이 강해 가까이 가면 죽었다.

[722년]
이융기가 파견했던 당 파견사의 주석탐사는 귀환하여 아뢰길, 이 돌은 빠른 속도로 방사능 감소를 보이고 있다고 하였다. 이융기는 유생세가(柳生世家)에게 간수를 명했다.

[730년]
이융기는 이필을 천마교에 보내 서북쪽을 재탐사를 하게 했다. 이필은 곤륜노를 시험 삼아 서북쪽 주석의 일부를 장안으로 가져왔다. 이후 비밀리에 칠성전을 건립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740년]
이융기의 양 왕비는 이필에게 방사능을 계기로 장생의 방법(불노불사)을 연구하도록 명하였다. 칠성전을 장생전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나 이 주석의 잔류 방사능은 이융기의 정신에도 영향을 미쳤다.

[750년]
이필, 서북쪽 주석의 핵심을 찾아 판양으로 갔다...앵무새 모양 두 개의 혈옥이 처음으로 합체하자 순식간에 600여 명이 피눈물을 쏟았다. 혈색이 암담할 때, 하나의 왕비가 죽음을 무릅쓰고 두 조각의 혈옥을 갈라놓았고, 결국 죽었다가 되살아났다! 이필은 이에 따라 다시 태어나는 방법(중생의 방법)을 창안했다.

[755년]
안사의 난이 발발하자, 이필은 양 왕비를 꾀어 죽은 체하며 도망치도록 했다. 갈라진 혈앵무 두 조각을 이화로 가져와서 숨겼으며, 혈앵무가 섬의 취심화의 효능을 점차 떨어뜨렸다.

[760년]
낙성공주와 신평공주는 장생전을 운상지성(구름 위의 성)으로 옮겨 방사능과 제약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낙성공주의 말을 관리했던 설리겸과 그의 가문은 대대로 남아 운성을 지켰다.

[762년]
이융기가 승하한 후, 이필이 다시 서역을 방문했더니 현지 우고포족에서 방사능에 접근해도 죽지 않는 여성이 있었다.
이필은 그녀를 위해 자주빛반딧불검(자인유형 紫刃流萤)을 만들고 큰 주석을 더 가져갔다.

[777년]
이필은 새로 가져온 서북쪽의 주석으로 신평공주의 아들 배방연과 손잡고 공작령 초판 원형을 만들었다. 장안으로 돌아와 대종 황제를 섬기며 국사를 지냈다.

[782년]
이필은 신제 덕종에게 "정원지맹"을 맺으라고 권하고, 사자를 위구르족·운전·대식(아랍)·천축(인도) 4개의 지역에 보내 교역하였다. 실제로 도보를 만들어 운석에 맞출 재료를 은밀히 찾아낸 뒤 2세대 공작령으로 만든다.

[789년]
덕종은 두통을 호소하였는데, 이필은 이에 대항하여 피폭에 대항하려 하였고, 이루지 못하여 오발불출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805년]
덕종이 임종한 이필의 유서를 열자 이필은 공작령을 완전히 없애라고 요구했다. 덕종은 차마 없애지 못하고, 유서를 불태우고 공작령을 아들에게 비밀리에 전한다. 후에 당나라 황제의 육체와 정신은 그 영향을 받았다.

[829년]
이필의 아들 이번은 당 문종이 보낸 사람들에 의해 멸족되고 그의 대비부 7권을 빼앗긴다. 문종 이후 감로지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환관에게 연금당했다. 

[840년]
문종이 승하하였다. 환관 원사량은 여러 방면의 절도사의 지지를 구하기 위해 대비부를 분리하여 후세에 나누어 주었다.

[888년]
당나라의 풍미, 당 소종은 장생전, 유야성 등 각 방면의 힘을 12루 5성으로 통합해 당의 마지막 비밀과 부를 빼돌렸다.

[904년]
소종이 피살되었다. 배방의 후손 배정일은 12루 5성을 지키며 비밀리에 퇴궁하여 운성에 피신하였고, 여관의 추벽노는 공작령을 들고 함께 갔다.

[905년]
당이 멸되고, 대대손손 일본의 주석을 지켜온 유생 일족은 중원으로 돌아와 오래전 방사능이 감퇴된 일본 운석을 세류검으로 정련하였다.

[930년]
배무책은 이화에서 혈앵무를 가져온 후 4대 호법 설의인, 추봉오, 화군후, 모두 운성에서 모임을 가졌다. 후제무기작 《주신잔편》은 운석의 원류를 상세히 기록한다.

[935년]
초대 백옥경은 혈앵무를 운성 설의인에게 맡겼다. 또 공작령을 추봉오에게 맡기고 공작산장을 지었다. 이필은 화군후를 파견하여 자주빛반딧불검(자인유형 紫刃流萤)을 들고 천마교로 돌아가게 하고, 세류검는 유생가로 돌려보낸다.

[940년]
백소 누각에서 초임 마교 교주는 운석을 없애는 일을 위해 중원으로 가서 심랑을 만났었다.

[942년]
심랑이 진행하여 사람을 죽이는 운석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심랑이 방사성이 가장 강한 운심을 모두 녹였다. 무해한 덕륭망존사령을 만들고, 강호인들은 존자령을 심랑에게 증정하다.

[949년]
설무가 세상에 등장하다.
설무미는 운성으로 보내져 설씨 집에 맡겨졌다.

[960년]
백옥경은 병이 위중했고, 화군이 배반하여 중원을 공격하였고, 소림에게 격퇴당하였다. 백효생은 얼마 후 백옥경을 혈의대법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여 연명하였다.

[961년]
송나라 태조는 천망사를 세워 곳곳에 널려 있는 천망지석(天望之石)을 찾아다녔다.

[965년]
설도 설행, 주인 설무는 약재로 엎다.
설무미는 설무에 떠밀려 운석을 가른 물에서 내려왔고 유리화심이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가 죽지 않게 하고, 그 천격만면의 역용술을 이룩하였다.

[966년]
백옥경, 억지로 혈앵무를 켜려다 연기처럼 사라진다. 당대의 백옥경은 명호(이름)를 이으며, 설의인을 죽이고 설씨를 운성에서 축출하였다. 배상은 물에 혈앵무를 담그고, 혈무루로 갔다.
설무는 백효생에게 구원을 받아 백효생을 따른다.

[968년]
설무는 백효생을 따라다녔다. 직접 백천우의 죽음을 몸소 겪으며, 신도당과 함께 사라진다.

[970년]
설무 역용술이 처음 이루어지다. 천마교가 두 번째 중원을 침공했을 때, 역용술을 써서 화백봉을 위해 마교에 가서 소식을 염탐하여, 청룡회가 마교를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화군후가 다시 찾아오자 백옥경은 격퇴하고 장생검을 매개로 혈무루에서 응징했다. 화군후는 밤낮으로 부대끼며 십여 년 동안 폐관하여 연명하다가 결국 고통으로 죽었다.

[971년]
원자하는 운성에 갇힌 채 유리꽃과 운성의 독간의 연관성을 스스로 짐작해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있었다. 후에 백옥경을 만나다.

[972년]
백옥경은 천마교에 가서 장옥언 외에 천마녀의 핏줄을 가졌을지도 모르는 자주빛반딧불검(자인유형 紫刃流萤)을 다룰 수 있는 옥씨 여자 세 명을 모두 암살한다.

[973년]
백옥경은 자신의 이중인격증은 치료할 약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대물림될 줄 알았다. 천하를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원자하와 혈윤을 맺지 말 것을 약속한다. 같은 해 유야성에 들어가 해성지서에 서명했다.

[975년]
설무루는 백효생과 백옥경을 따라 하천천산장에 가서 장기를 부렸다. 후응왕은 산채를 '용수산(龙首山)'으로 개명했다.
설무루는 강남에서 심채미를 만나 남성복으로 갈아입을 수 있도록 남장으로 바꾸게 도와줬으며, 심채미는 헌원십사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떠돌았다.

[977년]
백옥경 심창해 일전. 심창해는 장생검의 상처를 입고 복용골에 피신했다가 7년 만에 숨졌다.

[980년]
백옥경이 실종된 후 설무는 백효생을 따라다니며 세월을 보냈다. 강력한 권유로 백효생은 목우를 찾아 청룡회를 인수하기로 결심하였다.
주가, 신낭이 세상에 나타나다.

[981년]
혈영롱, 옥나비가 세상에 나오다.

[982년]
유야성의 난. 제1차 칠성은룡 계획을 취소하고 백옥경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중에서도 흑루는 최소림으로 보내졌고, 이후 아비에게 맡겨졌다. 15년 후 피원청되어 청에 소환되었다.

[988년]
설무는 장몽백의 참언을 얻었다. 주가와 신랑, 그리고 다량의 여자 아이를 입양해 쌍생실험을 시작한다.

[989년]
설무는 혈영롱, 옥나비의 가문을 멸문시키고, 두 사람을 입양해 쌍생광영(双生光影)으로 키웠다.

[990년]
설무는 강남·운전·이화·파촉 등지로 떠나며 그 기록에 따라 세상의 기이한 약들을 찾아다녔다.

[991년]
칠왕이 동행하여 와서 주가와 신랑을 구출하였다.

[992년]
백옥경은 다시 유야성으로 돌아와 원자하와 어린 왕손을 종룡 제자에게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3월을 기한으로 한다.
원자하의 뜻밖의 임신으로 백옥경은 망설였다. 송태종 소성태자(허왕 조원희)는 백효생에 의해 독살되었다. 이를 안 백옥경은 결국 혈육을 남기기로 하고 칠성은룡 프로젝트를 재개하였다.

[994년]
명월심은 은룡 중의 하나를 소림으로 보낸다. 공현은 그에게 법호를 지호로 하사했다.

[1002년]
설무는 백효생을 위해 만설굴을 세웠다.

[1004년]
설무는 백운헌과 은밀히 돈을 주고받으며 백효생을 치료하였다.

[1006년]
음력 섣달에, 혈안이 되어 맹씨를 멸문하고 팔황협사가 구원의 손길을 떠났다.

[1007년]
헌원십사는 운성에 갔다가 백옥경을 만나 유리꽃 심지를 떼서 가져왔다.

[1008년]
헌원십사가 목우의 '절지(绝智)'에 유리꽃 심지를 집어넣자 목우의 몸에 이변이 일어났다.


연기(缘起)

개원 2년, 이융기는 28세 일때 이다.
그는 서역 사절로부터 처음 들었다 "'천외운석'이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다." 는 말을 들었다.
"운석이 폐하의 즉위를 따라 나타나는 것은 폐하의 천명에 따라 천지에 통일될 징조임에 틀림없다."
이융기는 "이왕이면 짐이 사람을 보내 분명히 알아내야 한다. 하늘은 천명(天命)이 상관없지만, 하늘 밖에서 온 물건이 있는 것은 짐이 흥미가 있다"고 말했다.
사당정예로 서북의 주석, 중원의 부석, 운성의 부석과 일본의 부석에 파견되어 20년을 탐색하였다.

개원 25년, 이융기는 51세 일때 이다.
그는 국사 이필을 입궁시켜 운석 연구의 진도를 물었다.
"신이 이 돌을 파고든 지 벌써 7년입니다. 7년 전 신하는 이 바위가 만 명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 신하들은 그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면 이 바위가 10만 명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융기는 "짐은 사람을 죽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짐과 옥배는 내생을 바라지 않으나 이 세상에 불로장생하고 영원히 헤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필, 당신은 서북 주석으로 짐의 뜻을 대신 이룰 수 있습니까?"

서북의 주석은 가까이 가면 곧 죽는다.
오직 이필만이 곤륜노의 체격으로 필사적으로 채집하여 장안으로 돌아왔다.
이후 두 왕비는 명나라 황제와 함께 살지 못했고, 이필이 손으로 만든 혈앵무, 공작령, 대비부 세 가지 물건이 해마다 전해져 내려온다.

'혈앵무는 시간을 죽일 수 있고, 공작령은 공간을 죽일 수 있으며, 대비부는 시공간이 무너졌을 때 자신을 보존할 수 있다.' 이필은 죽기 전 어린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나는 아직 서역에 두고 온 자주빛반딧불검(자인유형 紫刃流萤)이라는 칼이 있다. 우고포족 중에 혈윤이 있어 운석의 위세를 타고났으면 이 검을 가지고 숙명을 끊고 모든 것을 원만히 할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했다.

서북쪽의 주석은 서역에 남아 있고, 우고포족과 응준(매와 송골매)가 대대로 이어졌지만, 옥씨 천마의 피는 끝내 끊겼다.
중원 부석 후성주가 주물가의 필쟁의 재목이 되었는데, 천망, 운염, 운심, 사령, 다소간의 분쟁이 벌어지는지는 여기서 나온다.
일본 부석은 유생 일족이 대대로 지키고 있다. 당나라가 망했을 때, 유생가는 장안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검으로 삼았다.
서남부석이 화산 속으로 떨어져 맹렬한 불길이 세차게 치솟는 것을 막고 점차 종적을 잃어버렸다.

이필이 평생 매달린 '모든 숙명'은 아무런 반향도 없었다.
이융기는 말년에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고 소리쳤다. 일 년 내내 공작령의 방사능을 받아, 그는 심지가 포악하여 가위눌려 어지러웠다. 꿈속에는 수많은 철새들이 하늘을 뒤덮고 강철 불짐승이 혀를 내두르고, 요염한 빛은 밤새 잠 못 이루고, 삼엄한 거관이 솟아오른다.
그때 그는 "짐이 죽는 것 아니냐?" 고 떨며 이필에게 물었다.
이필이 답하길 "신하가 주상 황제의 영속과 장생지전을 원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