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온라인 게임이 머드,머그 게임이라 불리던시절

전화선 꼽고 집에서 뭣 모르고 과금 지르다 당시(99년) 한달 전화비가 45만원이 나와서 부모님께 뒤지게 처맞던 시절.

각 동네마다 해당 게임 전용 피시방이 있던 시절.

스타크래프트 전용 피시방, 리니지 전용 피시방, 레드문 전용 피시방. 전용으로 내건 게임들도 제각각 이었다.

그 시절에 한시간 2천원 가량되는 피시방비가 부담되 2,3시간 이상 있기에는 힘든 코흘리게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 간의 게임들 속에서 길드라는 집단에 속한 나의 위치를 회상해 보면,


사생결단이라는 각오를 다지며 게임 한적도 없었고.

서버라는 국한된 데이터베이스 안에서 타인들의 첨예한 권력 다툼은 인지조차 못할 정도로 쓸데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비 상식에 맞서고자 마우스를 놀리며 캐릭터를 소위 '초개와 같이 던진다'는 느낌 또한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항상 막내라서 길드원들의 귀여움을 받는건 있었지만, 그 속에서 어떠한 소속감과 사명감을 느끼기엔 너무 어렸던 나이였다.


머리속에 항상 따라다니는 자기위안 혹은, 허무하게도 당연한 생각.

'어찻피 게임인데 뭐, 그깟 게임에 죽자 살자 아둥바둥 대는게 웃긴일이지'

겪어왔던 모든 게임에 흥미가 식었을때에 떠올렸던 마음이자, 겁을 먹고 카마엘 서버를 떠날 적에도 최초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허나, 카마엘서버에 다시 복귀하여 생사연합과의 일련의 사건 이 후 300혈맹에 가입한 나에게 더이상 게임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었다.

'이제 다시는 한낱 게임이라고 폄하 하지말자'

아는 만큼 보이는 법
아직은 어렸지만, 몇살이라도 더 먹어가며 기성의 가치관을 조금씩 흡수 할 시점이었다.

MMORPG는 흔히들 인생의 축소판이라고도 한다.
그 안에는 '노가다'라 불리는 사냥을 하여 금전적 가치를 창출하고, 나의 캐릭터를 성장시킨다는 노동의 의미가 가장 우선적이고
의리, 소속감, 사명감, 성실함, 보상, 명예, 긍지와 같이 긍정적인 의미의 가치도 있지만,
사기, 배신, 전쟁, 단절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의 사회적 경험까지 간접 체험 할 수 있었다.
더러 가끔은, 사랑도 가능했기에 통칭 '낭만'이 있었던 또다른 사회였다.

'낭만'을 무시하는 지극히 계산적인 행태.
이른바 '생계형 유저'이자, 게임을 '부업'으로 생각하는 단지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보는 이들이 모인 곳이 바로 생사연합 이었다.

'니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반대세력을 말살시키고, 원하는 물질을 획득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겠지만 나는, 아니 우리는 다르다. 비록 게임일지라도, 적어도 비상식에 맞서서 자유를 쟁취한다는 고차원적인 것에 그 목적이 있다.'

혈맹내의 분위기가 더욱 그런 사명감과 긍지를 고취 시켰다.
거듭되는 압재와 죽어버린 서버의 목소리 까지, 모든 상황이 부정적이었음 에도, 그들은 한 없이 해맑았고 즐거워 보였다.
마치, 꿈이 없던 이가 꿈과 목표를 가진것 처럼 활기와 생기를 띄었다.

숨이 벅차올랐다.
이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폭압과 압재에 맞서고자 나선 자들이었다.
그 예전, 최초의 해방을 이루었던 1섭 '바츠 해방기' 처럼 우리도 그러한 실록같은 역사를 이루어 낼 수 있을까.

허나, 나의 내면적 고취와는 반대로 나 자체의 능력은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급기야, 의지와는 다르게 교전 멤버에서 제외된 나는 그저 레벨업을 위한 사냥에 몰두 해야만했다.

수시로 아덴 영지 이북을 순찰하는 적들의 감시를 피해 내가 택한 사냥터는 '신탁의 섬' 이었다.


휴먼 캐릭터가 최초로 생성되어 삼는 거점이 '말하는섬'
월드맵을 기준으로 남서쪽으로 최남단이다.
19,20레벨이 되어 1차전직을 앞두고 본토로 불리는 글루딘 영지로 가기위해 말섬을 떠나 북진 한다.
글루딘,글루디오,디온,기란,오렌,아덴,루운,고다드에 이르기까지 동,서의 개념이 잠시 존재할 뿐, 캐릭터는 성장 할 수록 월드맵상 끊임없이 북쪽으로 진출 하게된다.

하지만, 패치가 거듭되고 어느 순간 획일화된 세력진출 방향에서 갈림길이 생긴다.
더러는 리뉴얼된 맵속에 어떤 곳은 물리공격에 내성을 가진 몹들이 나타나는곳,
어떤 곳은 물리공격 중 에서도 활 공격에 내성을 가진곳 또, 마법 공격에 내성을 가진곳.
그러한 특성을 가진 사냥터중에서도 '신탁의 섬'은 70레벨 초중반의 밀리 격수들이 가는 곳이었다.

다만, 몹이 쉽게 죽는만큼 단타의 경험치가 적었고, 사냥시 드랍에 의한 보상이 그리 크지 않았던 곳이기에
가뜩이나 유저가 적은 카마엘섭에서 신탁의섬은 거의 버려지다시피한 사냥터였다.
자연적으로 위도 상, 최남단에 위치한 인나드릴영지를 거쳐가야 하는 만큼 적들의 감시에서도 꽤나 멀어진 곳이었다.


'시간의 방'에 들어가 폐관수련을 하는 손오공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별에별 생각이 다들었다.
하루에 10시간 남짓 똑같이 한산한 풍경속에서 사냥만 하노라면,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뚜렷한 목적이 있기에, 최소한 1인분이라는 내몫을 당당히 해내고 싶었기에, 끝이 없는 지루함 속에서도 끊임없이 마우스와 키보드를 놀렸다.

때로는 졸음과,때로는 권태와, 
때로는 교전 중 밀고 밀리는 상황속에서의 식구들의 긴박한 목소리를 접할때 그 끓어오르는 호승심과 맞서며,
드디어 76레벨에 도달했다.

보통은 2주일이 걸릴 것을, 불과 8일만에 이루어낸 쾌거였다.

3차 전직의 절차는, 8일동안의 쌩 노가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캐릭터를 감싸는 눈부신 빛이 잦아들고 나의 캐릭터는 그렇게 '듀얼리스트'로 전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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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