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 전 버프 건만 하더라도 나는 저에게 조금도 잘못한 것은 없다. 

계집애가 인던을 가면 갔지 남 조각상 깎는 데 쌩이질을 하는 것은 다 뭐냐.

그것도 발소리를 죽여 가지고 등뒤로 살며시 와서,


"얘! 너 혼자만 일하니?"


하고 긴치 않는 수작을 하는 것이다.

어제까지도 저와 나는 이야기도 잘 않고 서로 만나도 본체 만 척하고 이렇게 점잖게 지내던 터이련만 오늘로 갑작스레 대견해졌음은 웬일인가.

항차 망아지만 한 계집애가 남 일하는 놈 보구…….


"그럼 혼자 하지 떼루 하듸?"

내가 이렇게 내배앝는 소리를 하니까,

"너 일하기 좋니?"

또는,

"사냥이나 하지 만날 조각상을 깎니?"


잔소리를 두루 늘어놓다가 남이 들을까 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그 속에서 깔깔댄다.

별로 우스울 것도 없는데 채플린을 찍더니 이 놈의 계집애가 미쳤나 하고 의심하였다.

게다가 조금 뒤에는 인던 입구를 할금 할금 돌아보더니 소매 속으로 꼈던 바른손을 뽑아서 웬 물을 불쑥 뿌리는 것이다.


언제 또 써댔는지 버프창에 버프 세 개가 올라와 있었다.


"느 직업엔 이거 없지?"

하고 생색 있는 큰소리를 하고는 제가 준 것을 남이 알면은 큰일날 테니 얼른 딴 데로 사냥 가란다.

그리고 또 하는 소리가,

"너 블레싱은 스킬에도 묻는단다."

"난 블레싱 안 쓴다. 너나 써라."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조각하던 손으로 버프를 다 지워버렸다.

그랬더니 그래도 가는 기색이 없고, 뿐만 아니라 쌔근쌔근하고 심상치 않게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이건 또 뭐야 싶어서 그때에야 비로소 돌아다보니 나는 참으로 놀랐다.


내가 이 마을에 들어온 것은 근 일 개월째 되어 오지만 여태껏 가무잡잡한 점순의의 얼굴이 이렇게까지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법이 없었다.

게다가 눈에 독을 올리고 한참 나를 요렇게 쏘아보더니 나중에는 눈물까지 어리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무기를 집어들더니 이를 꼭 악물고는 엎어질 듯 자빠질 듯 인던으로 횡하게 달아나는 것이다.


어쩌다 다른 고렙이,

"님 얼른 6랭 가셔야죠?"

하고 웃으면,

"염려 마서유. 갈 때 되면 어련히 갈라구!"


이렇게 천연덕스레 받는 점순이었다.

본시 부끄럼을 타는 계집애도 아니거니와 또한 분하다고 눈에 눈물을 보일 얼병이도 아니다.

분하면 차라리 나의 등어리를 아스페르길룸으로 한번 모질게 후려쌔리고 달아날지언정.

그런데 고약한 그 꼴을 하고 가더니 그 뒤로는 나를 보면 잡아먹으려 기를 복복 쓰는 것이다.


설혹 주는 버프를 안 받아먹는 것이 실례라 하면, 주면 그냥 주었지 '느 직업엔 이거 없지.'는 다 뭐냐.

그렇잖아도 지는 취업이 보장된 채플린이고 나는 그저 조각상이나 깎으며 소일거리를 보내고 있는 판에.

그런데 이놈의 계집애가 까닭없이 기를 복복 쓰며 나를 말려 죽이려고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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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흘리고 간 담날 저녁나절이었다.

나무를 한 짐 잔뜩 지고 페디미안으로 오려니 어디서 나무 패는 소리가 난다.

이거 또 누가 조각상 깎을 준비하나, 하고 깎아둔 여신상으로 가는데 나는 고만 두 눈이 똥그랬다.

점순이가 부엉이 조각 앞에 서있는데 이게 한손에 몇백만이나 하는 이그니션을 들고는,


"이놈의 조각상! 죽어라 죽어라."


요렇게 암팡스레 패 주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평타나 치면 모른다마는 아주 다 부셔지라고 풀버프로 5대씩 쥐어박는 것이다.

언제 불이 붙어 조각상이 탈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눈에 쌍심지가 오르고 사지가 부르르 떨렸으나 사방을 한번 휘둘러보고야 그제서야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알았다.

잡은 발타스 모닝스타를 들어 허공에 후려치며,


"이놈의 계집애! 남의 작품 다 망칠일 있니?"


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나 점순이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고 그대로 의젓이 아스페르길룸을 쓰더니 또 죽어라, 죽어라, 하고 패는 것이다.

이걸 보면 내가 마을에 올 때를 겨냥해 가지고 미리부터 조각상 앞에 서 있다가 네 보라는 듯이 내 앞에서 줴지르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나는 그렇다고 채플린 계집애하고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형편이 썩 불리함을 알았다.

그래 조각상이 맞을 적마다 허공에 평타를 후려칠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내구도만 까이는 나만 밑지는 노릇이다.


"아, 이년아! 남의 조각 아주 다 부술 터이야?"


내가 도끼눈을 뜨고 다시 꽥 호령을 하니까 그제서야 입구로 쪼르르 오더니 조각상을 내팽겨친다.


"에이 더럽다! 더럽다!"

"더러운 걸 널더러 입때 치고 있으랬니? 망할 계집애년 같으니"


점순이는 앙칼진 목소리로

"이 바보 녀석아!" 

하더니,

"애! 너 솔플도 안되지?"

한다.

이렇게 되면 나도 다른 배차를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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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부엉이 조각을 깎아가지고 빌나숲 구석에서 츄파루카나 잡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각상을 두어 짐 깎고 나서 부엉이 조각을 안고 밖으로 나왔다.

마침 라단자 농원에는 아무도 없고 점순이만 모닥불 피워놓고 뭘 하는지 앉아서 멍 때리고 있을 뿐이다.

가져간 부엉이 조각을 내려놓고 가만히 맥을 보았다.

부엉이 조각상이 멋지게 불을 쏴대서 츄파루카들이 맥없이 죽어갔다.

불을 쏘는 바람에 츄파루카들은 푸드득푸드득하고 올라 뛰고 뛰고 할뿐으로 제법 한번 어찌 해보지도 못한다.

라이마 여신상을 깔고 부엉이 조각을 깔면 쿨타임이 20% 감소된다 한다.

105초에서 시간이 확 줄어드니 "이 맛에 딥디르비 한다!" 하며 혼자 흥이 절로 났다.


나는 두 손으로 볼기짝을 두드리며 연방,

"잘한다! 잘한다!"하고, 신이 머리끝까지 뻐치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넋이 풀리어 조각상같이 묵묵히 서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허니멜리 한 마리가 한대 맞은 앙갚음으로 호들갑스레 연거푸 쪼는 서슬에 조각은 이내 다 부서질듯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이걸 보고서 이번에는 점순이가 깔깔거리고 되도록 이쪽에서 많이 들으라고 웃는 것이다.

나는 보다 못하여 덤벼들어서 조각을 붙들어 가지고 도로 마을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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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삭정이를 따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암만해도 고년의 목쟁이를 돌려놓고 싶다.

이번에 내려가면 망할 년 등줄기를 한번 되게 후려치겠다 하고 싱둥겅둥 나무를 지고는 부리나케 내려왔다.

거지반 마을에 다 내려와서 나는 부부젤라 소리를 듣고 발이 딱 멈추었다.

산기슭에 널려 있는 굵은 바윗돌 틈에 노란 눈의 꽃잎이 소보록하니 깔리었다.

그 틈에 끼어 앉아서 점순이가 청승맞게시리 부부젤라를 불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도 더 놀란 것은 고 앞에서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고있는 굵지막한 나무다.


필연코 요년이 나의 약을 올리느라고 또 조각상을 집어내다가 내가 내려올 길목에다 설치를 해서 이그니션으로 불을 붙여놓고 저는 그 앞에 앉아서 천연스레 부부젤라를 불고 있음에 틀림없으리라.

나는 약이 오를 대로 올라서 두 눈에서 불과 함께 눈물이 퍽 쏟아졌다.

나뭇지게도 벗어 놀 새 없이 그대로 내동댕이치고는 발타스 모닝스타를 뻗치고 허둥허둥 달려들었다.


가까이 와 보니 과연 나의 짐작대로 부엉이 조각이 다 불타 거의 빈사지경에 이르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짝 없이 고대로 앉아서 부부젤라만 부는 그 꼴에 더욱 치가 떨린다.

서버에서도 소문이 났거니와 나도 한때는 걱실걱실히 힐 잘 하고 얼굴 예쁜 계집애인 줄 알았더니 시방 보니까 그 눈깔이 꼭 여우새끼 같다.


나는 대뜸 달려들어서 고 계집에의 왼손을 확 잡아채고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그니션을 똑 부러뜨렸다.

눈앞에서 몇백만 하는 로드가 그대로 쓰레기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멍하니 섰다가 점순이가 매섭게 눈을 홉뜨고 닥치는 바람에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이놈아! 너 왜 남의 로드를 때려 부수니?"

"그럼 어때?"

하고 일어나다가,

"뭐 이 자식아! 이게 누구 무긴데?"

하고 복장을 떼미는 바람에 다시 벌렁 자빠졌다.


그리고 나서 가만히 생각을 하니 분하기도 하고 무안도스럽고, 또 한편 일을 저질렀으니, 인젠 어쩌나 싶기도 했다.

나는 비슬비슬 일어나며 소맷자락으로 눈을 가리고는, 얼김에 엉 하고 울음을 놓았다.


그러나 점순이가 앞으로 다가와서,

"그럼 너 이담부텀 안 그럴 테냐?"

하고 물을 때에야 비로소 살길을 찾은 듯싶었다.

나는 눈물을 우선 씻고 뭘 안 그러는지 명색도 모르건만,

"그래!"

하고 무턱대고 대답하였다.

"요담부터 또 그래 봐라, 내 자꾸 못살게 굴 테니."

"그래 그래 이젠 안 그럴 테야!"

"로드 뿌러진 건 염려 마라, 내 안 이를 테니."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눈의 꽃잎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너 말 마라!"

"그래!"


조금 있더니 요 아래서,

"점순아! 점순아! 이년이 이그니션 들구 어딜 갔어?"

하고 어딜 갔다 온 듯싶은 링커 한 명이 역정이 대단히 났다.


점순이가 겁을 잔뜩 집어먹고 꽃밑을 살금살금 기어서 산알로 내려간 다음 나는 바위를 끼고 엉금엉금 기어서 산 위로 치빼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