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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2 20:51
조회: 9,454
추천: 1
친일파 열전 1:전 중추원참의 홍종철중추원 참의란?
중추원(中樞院)이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왕명의 출납과 군사기무를 담당하던 중앙관청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상적으로 그 기능이 돌아가던 고려시대와 달리 조선시대에 그 권한이 위축되면서 문무를 가리지 않고 3품이상의 관직을 가진 당상관[堂上官] 중 특별한 소임이 없는 사람들을 앉히는 일종의 원로원으로 변질되기 시작되었고 급기야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는 조선총독의 자문에 응하거나 총독의 지시를 받아 조선의 구관(舊慣) 및 제도에 관한 조사업무가 전부인 허수아비에 가까운 기관으로 전락했습니다.
일제시대 중추원의 풍경.jpg 그럼 일제는 왜 이런 있으나마나한 정부기관을 페지시키지 않고 놔둔것일까요? 이 의문은 굴욕의 한일협방으로 거슬러올라가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추원참의는 이 중추원의 고위간부에 해당되었습니다.
중추원 참의 홍종철
그럼 이런 중추원참의를 지낸 홍종철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다음은 제가 위키 백과에서 퍼온 홍종철의 이력입니다. 홍종철 (1890년)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홍종철(洪鍾轍, 일본식 이름: 洪海鍾轍, 1890년 4월 25일 ~ 1973년 4월 29일)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 겸 기업인으로, 본적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면이다. 민주통합당의 정치인 홍영표는 그의 손자이다. 생애[편집]1909년 2월 대한협회 무안지회 회원을 역임했으며 1910년 11월 전라북도 무장군 사립동명(東明)학교를 졸업했다. 1913년 3월 고창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을 역임했고 같은 해 12월 24일 현금과 미곡을 기부하여 조선총독부로부터 목배 1개를 받았다. 1914년 9월 22일 고창소방조 설비비를 기부하여 조선총독부로부터 목배 1개를 받았으며 1915년 4월 21일 도로개수비, 1915년 6월 17일 도로부지용 토지를 각각 기부하여 조선총독부로부터 목배 1개를 받았다. 1915년 6월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면 독행자(篤行者) 표창을 받았고 같은 해 11월 10일 일본 정부로부터 다이쇼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6년 7월 5일부터 1917년 7월 10일까지 전라북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을 역임했으며 1918년 6월 25일부터 1920년 9월까지 전라북도 고창군 참사로 근무했다. 1920년 1월 14일 동아일보사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23년 4월 동아일보 고창지국 고문, 1923년 7월 사립 고창고등보통학교 이사, 1924년 9월 시대일보 고창분국 고문을 역임했다. 1924년 4월 1일과 1927년 4월 1일 전라북도 민선 도평의회원으로 임명되었으며 1929년 5월 1일 조선박람회 평의원으로 위촉되었다. 1924년부터 홍해농장(洪海農場)을 경영하는 한편 같은 해에 고창연해어업조합을 설립하고 조합장에 취임했다. 1927년 11월부터 고창산업조합 감사를 역임했고 1928년 11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8년 11월 22일 교육 보급과 산업 발달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조선총독부로부터 특례은배를 받았으며 1930년 4월 1일 전라북도 관선 도평의회원으로 임명되었다. 1930년 6월 3일부터 1933년 6월 2일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으며 1933년 2월 고창고등보통학교 전무를 역임했다. 1933년 5월 11일과 1937년 5월 11일 전라북도 관선 도회의원으로 임명되었고 1935년 7월 전라북도회의원 만주시찰단의 일원으로 만주를 방문했다. 1934년 9월 광주세무감독국 정읍세무서 소득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1935년 10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시정 25주년 기념표창과 은배 1조를 받았다. 1939년 11월 고창요업주식회사 사장과 고창흥산주식회사 이사를 역임했으며 1940년 2월 대흥광업주식회사 이사와 대흥상사주식회사 이사, 1940년 12월 전라산업주식회사 이사를 역임했다. 광복 이후인 1949년 8월 6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며 같은 해 8월 31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중추원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참고자료[편집]
여기서 [생애]파트의 위쪽을 보시면 그는 한일합방 직후부터 조선총독부에 돈,곡식,땅 따위를 기부하며 일본에게 살랑거린 골수친일파였다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렇게 총독부에 로비할 자금을 마련하기위해 자신의 고향인 전라도의 고창을 경제적으로 수탈하였으며 덕분에 당시 고창지방에선 그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만행을 저지르고도 그는 해방후 독재자 이승만이 저지른 희대의 개짓으로 인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자손은 지금 정치에까지 진출하여 대대로 호위호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친일파 홍종철의 자손은 바로 민주당 소속의 국회의원 홍영표입니다.
지난 2012년 4-11 총선직전에 이 문제가 제기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맨날 민주당과 물고 뜯고 싸우는 새누리 당쪽에서-_-)그는 대변인을 통해 "일말의 대응할 만한 가치가 없고 진흙탕싸움에 휘말리기 싫다"며 오히려 뻔뻔스러운 모습을 보이는등 반성의 여지가 없습니다. 물론 당시의 정치상황이 그의 대변인이 말했던것처럼 '진흙탕싸움'인것은 맞지만 그래도 과거사에 대한 반성없이 어물쩍넘어갈려는 그의 태도는 참 보기 껄끄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것은 이 사례에서 보듯이 친일파의 후손들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계에 숨어들어와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 중 절대다수는 자신의 조상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반성이 없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이런 과거사가 적어도 우리세대가 끝나기전에 제대로 청산되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나라의 미래는 불보듯 뻔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긴 글 읽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3줄요약 1.중추원 참의 홍종철은 2.친일파이며 3.그 자손은 정계에서 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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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 대통령 박정희(창씨명:다카키 마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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